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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접하는 자에게 주신 권세 (요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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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화가인 홀만 헌트는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화가이자 평론가인 존 러스킨이 타임지에 상징주의에 대해 상세하게 살명하는 글을 쓰면서 이 작품을 가리켜 '전 세대를 걸쳐 그려진 성화중에서 가장 숭고한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극찬했습니다. 세상에 빛이신 예수님이 문밖에 서 계시는데 , 그 문은 담쟁이 넝쿨과 잡초로 무성해 있습니다. 문은 분명히 어떤 사람의 인생의 문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그의 삶에 한 번도 초청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대답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들어가서 그 사람의 인생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홀만 헌트가 실수를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문에 손잡이 그리는 것을 빠트렸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에는 손잡이 있는데 그의 그림에는 손잡이 없다는 것입니다. 홀만은 대답하기를 "아니야,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네. 손잡이는 하나밖에 없어. 그것은 안 쪽에 달려 있지."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에 들어 오시려면 우리가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억지로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만약 문을 연다면 그분은"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본문에서도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영접하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큰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를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영접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같은 말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내가 예수 믿었으면 그 분을 영접했으면 그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녀 되었는가? 13절에 기록했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낳아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요? 그 분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믿으려고 그처럼 애를 썼는데 안믿어져요. 몸부림쳐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분이 내 생애 속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믿을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향해 큰 기대를 하며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시시하게 살다 사라지도록 무관심하거나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다 사용하며 존귀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얼마전에 TV에서 가난을 대물림하는 아이들에 대한 것을 다큐로 다룬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불우한 환경에 자라나는 아이들 그중에서도 결식 아동을 찾아 인터뷰하였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여 다 찾아가 보았는데 대부분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리며 교도소를 드나들거나 심지어 사창가에 가 있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결론은 우리나라에서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며 성공한 인생을 살 확률이 낮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교회가 불우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중에 실력이 있고 가르침에 관한 일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 몇 사람이 모여 구체적으로 불우한 아이들의 실력을 돕는 시스템을 한번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아버지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생애가 달라지고 특권을 함께 누리고 삽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누리는 자녀의 특권은 무엇입니까?

1. 죄 사함의 특권입니다.

첫 번째 특권은 죄 용서받는 특권입니다. 인생을 불행케 만드는 것이 죄입니다. 죄가 없으면 인생은 담대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장난으로 50군데 무작위로 전보를 치기를 "모든 것이 들통났다. 빨리 도망가라." 그러니까 50명이 모두 외국으로 도망가고 어디로든지 다 숨었답니다. 죄가 없다면 "이것, 누가 장난질 하나보다" 그럴 텐데 늘 죄의식과 두려움으로 살다가 누가 쿡 찌르니까 그 밤에 다 도망갔었던 것입니다. 죄는 우리 인생을 두려움으로 살게 만들고 어둠 속에 숨어 살게 만듭니다. 그 죄가 가정에 들어가면 가정이 무너지고, 그 죄가 사회에 들어오면 사회가 모두 아파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그 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죄는 언제든지 인생을 불행케 만듭니다.

이 죄는 인생만 불행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불행케 합니다. 아들 예수가 밤이 맞도록 기도합니다. 그 간절한 기도 때문에 땀방울이 이마에 맺히더니 기도가 깊어지는 그 밤에 땀방울이 변해서 핏방울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단 한가지의 기도를 듣지 않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주시옵소서." 밤이 맞는 기도였습니다. 목숨을 건 기도였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된 기도였습니다. 우리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고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죄를 그냥 무효화할 수 없었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두 팔을 스스로 묶으시면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외쳐대는 아들의 소리에 귀를 막고 외면하시면서 끝까지 아들을 죽게 하는 아픔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불행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그처럼 불행케했던 죄, 그 죄 문제를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 위에서 모두 해결해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내가 지은 죄 값을 주님께서 대신 치루셨고 그것을 보시고 화목 제물로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주께서 이 죄를 십자가에서 완전히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런 나를 향해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재판장 되시는 우리 하나님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나에게 어떤 존재되십니까?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그 분은 용서밖에 못하십니다. 어떻게 용서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할 때 우리 하나님은 용서해주십니다. 성경 시편 103편입니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1-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우리의 죄과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저도 아버지입니다. 자식들을 기르면서 잘못을 보면 야단도치고 징계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 화도 나고 섭섭하다가도 그런 감정이 한 시간도 가지 않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잘못했어도 사랑스럽고 자식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까?를 고민하고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자식의 마음은 아버지께 받은 상처를 기억해도 아버지의 마음은 잘못을 용서해주고 잊어버리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죄 용서받는 이 놀라운 특권을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심판주입니다.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인 나에게는 아버지입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구하면 언제나 용서해주시는 아버지입니다.

2. 평화의 특권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특권은 평화입니다. 평화라는 단어의 뜻은 '올바른 관계' 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가 아니라 바른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수관계가 화목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른 관계가 안되면 참 불편합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과 관계가 나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돌아다니며 저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작은 일도 크게 과장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확산시켰습니다. 그래서 많은 오해가 생겼고 그로인해 몹시 힘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사람과 관계가 조금만 나빠져도 불안하고 고통스러운데 이 우주에서 만왕의 왕이고 만주의 주이신 창조주 우리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아니고 원수관계가 될 때 얼마나 불안하고 불행하겠습니까? 성경은 "악인에게 평화가 없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평화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분과 바른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분들을 위해, 예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과 나와는 전혀 화목할 수 없는데 그 분이 화목제물 되셔서 모든 하나님의 진노를 내 대신 온 몸에 다 받으셔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해주셨습니다. 그 다음부터 갖는 첫 번째 예수 믿는 느낌은 "평안을 맛보는 것입니다"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 믿고 나서 가장 놀라는 것은 '세상에 이런 평안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데 마음속에 밀려오는 이런 평안이 나를 너무 너무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이 평화는 화목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평안입니다. 그 평안은 근심도 두려움도 내어쫓는 평안이라고 말합니다. 어두운 밤 그 어둠을 해결하기 위해서 몽둥이를 아무리 휘둘러도 어둠이 도망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어둠이 물러가나요? 성냥불 하나 켜면 어둠이 사라집니다. 늘 불안하지요? 근심이 있지요? 문제가 무엇입니까?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평화예요. 어둠은 오직 빛만이 해결합니다. 근심, 걱정의 정답이 주의 평화입니다.

어떤 문제 속에서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로 채워주십니다.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평화로 내 심령을 붙잡아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최대, 최고의 관심은 내 자신이고 내 마음입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소유가 아닙니다. 여건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그 고통과 문제를 우리 주님 앞에 감사함으로 아뢰기 시작해보십시오. 놀라운 일입니다. 이 재미로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주께서 마음에 강처럼 넘치는 평화로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당하는 문제를 풀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내 생애 속에 평강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입니다.

3. 능력있는 삶을 사는 특권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권세는 능력있게 사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믿으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아주 어려운 삶입니다. 모두가 욕심을 내는 속에서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은 바보취급당하기 딱 좋은 모습입니다. 모두가 속이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회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은 자멸할 수 밖에 없는 길입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손 발 다 묶어 놓고 달려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주님게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사셨던 높은 수준의 완벽한 삶 아닙니까?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상수훈과 같이 완벽한 삶을 요구만 하신 것이 아니고 그런 대단한 삶을 살 수 잇는 능력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몫한 일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잇느니라. 하나님은 자녀에게 온갖 능력을 주십니다. 아끼지 않으시고 필요한 것은 다 주십니다. 사단과 싸워 이길 수 잇는 능력, 질병을 이길 수 잇는 능력, 사랑할 수 잇는 능력, 사명을 감당할 수 잇는 능력, 모든 것을 분별할 능력, 다 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아주 극치적인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에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보이기 시작하고 은혜와 진리가 마음에 충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감성과 의지 지성 할 것이 없이 그 모든 욕구가 만족하게 채워지는 순간이 충만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요한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가 고백합니다. 우리가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특별한 능력이 따라붙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비들기처럼 순결하며 뱀처럼 지혜로울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처럼 마음속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 수 있는 새힘을 주십니다. 큰 사명을 감당할 수 잇는 능력, 시험과 사단의 공격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두려워마시고 하나님아버지게서 주시는 능력으로 위대한 삶을 사실 수 있기 바랍니다.

유복자로 태어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라는 말만 나오면 그냥 땅에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 말씀을 붙잡고 일어섰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 분이 이 말씀을 붙잡고 온 밤을 통곡으로 지새우면서 아버지를 힘껏 불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십니다. 그 아버지 앞에서 내 인생에 용서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만 삶의 진정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주십니다. 믿으십니까? 그 분 앞에 돌아오십시오. 일주일 동안 염려, 근심, 걱정 많았지요? 망할 것 같지요? 안 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밖에 못하는 아버지입니다. 잘못할 때도 용서밖에 못하는 아버지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 사랑 앞에 나아갑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분을 부릅시다.  (문기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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