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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리라 (삼하 7: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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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평화를 주셨습니다. 다윗의 가정과 백성들에게도 평화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셨다" 고 선언적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평안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으로 부터 비롯됨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평안을 누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평안을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평안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라는 메세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다윗이 지혜롭고 능력있고 여러 모양으로 뛰어났지만, 그의 가정과 나라가 평안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대적을 막아주셨기 때문이라는 고백이 중요한 것이지요.

다윗은 두로 왕히람 이 보내준 백향목으로 지은 왕궁에서 평안을 누리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천연기념물로 보호되어야할 만큼 소중한 백향목을 목수와 석수까지 딸려 보내면서 히람 왕은 다윗에게 정성을 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향기나는 왕궁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유다 광야를 헤메던 다윗이었는데 말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윗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우리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구나......" 주의 종 나단 선지자를 만나 대화하던 중에 자기의 마음을 솔직하게 내어 놓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의 궤를 생각하면 자신의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고 성전 건축의 의지를 밝혔습니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마음을 귀하게 여겨 "왕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마음 먹은대로 하시라"고 동의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4절에 보면, 그 날 밤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부르셨습니다. 분위기로 보아 하나님께서 굉장히 언짢으신 모습입니다. 나단 선지자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도대체 네가 정신이 있는 사람이냐 없는 사람이냐...? 라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내가 언제 너희들에게 백향목으로 지은 집에 거하겠다고 부탁한 적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광야에서 부터 지금까지 장막 사이에 거하면서 너희들과 함께 하며 이스라엘을 이끌었는데 부족함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언제 백향목으로 집을 건축해 달라고 너희에게 부탁한 적 있느냐 면서 다윗 왕과 나단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우선순위였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사울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외형적인 어떤 실적이나 모양보다 내면적인 삶의 실전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나단도 다윗 왕의 헌신적인 열정과 태도에 감복하여 동의하였지만, 사실상 판단을 잘못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하니까 그 정성에 분별력을 잃은 것입니다. 종종 목회자들이 범하는 실수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좀더 본질적인 부분을 염려하고 계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서, 얼마나 거창하게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일인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 하는 점이 성도로서 검토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것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단이나 다윗의 실수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깊이 다가가며 그 분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세우실 때 제일 마음에 드셨던 덕목이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한 그릇이 주님의 마음에 드셨습니다. 비류들이 사울의 면전에서 당신 같이 지파 중에 꼴찌인 베냐민 지파에서 무슨 왕이 나올 수 있느냐고 공박을 할 때에도 사울은 너그럽게 받아주었습니다. 후에 왕이되어 그 사람들을 찾아내서 공박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그렇게 그릇이 큰 왕이었습니다.

고사에 보면, 어느 왕이 왕비와 더불어 신하들과 야외에서 술자리를 하다가 갑자기 분 바람에 등잔불이 모두 꺼졌습니다. 왕후의 미모를 흠모하던 한 신하가 순간 그를 만지려 하자 왕비가 놀라그의 갓끈을 잡아당겼습니다. 갓 끈을 손에 쥔 왕비가 소리칩니다. "왕이여 어떤 무례한 신하가 자기를 범하려 하여 내가 갓끈을 잡아당겨 손에 쥐었으니 그를 찾아 엄벌에 처해줄것"을 청했습니다. 불만 밝히면 그 신하는 죽은 목숨입니다. 긴장의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때에 왕이 모든 신하들에게 명령합니다. "모두 갓끈을 끊어라..." 그런 후에 등불을 밝히도록 했더니 모두가 갓끈이 없어 누가 범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 그 자리에서 왕비를 범하려고 했던 신하는 결심하였을 것입니다. "이토록 자비한 왕을 위하여 내 목숨을 걸리라" 그는 목숨을 걸고 충성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사울에게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는 하나님께 자신은 그릇이 아니라며 겸손해 했던 그였습니다. 이런 사울을 하나님게서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교만해 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쟁도, 제사도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판단하고 진행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경고하셨습니다. "네가 스스로 낮추었을 때에는 내가 모든 지파 가운데 머리가 되게 해 주었는데, 네가 오늘날 어찌하여 교만하여 졌느냐?"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기의 생각이 앞서는 것이 교만인줄 믿습니다. 전쟁을 나아갈 때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지만, 내가 그들을 너의 손에 붙이리라며 승리의 보장을 해주신것도 잃어버리고 자신이 잘싸워 승리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치 않은 것이 교만입니다. 전쟁에 이기고 나니까 그 많은 양떼와 소떼들을 진멸하기가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앞세워 살려가지고 온 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소떼를 많이 가지고 오고, 아무리 양떼를 많이 가져온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소떼와 양떼의 수ㅡ효가 아니라 말씀에의 순종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나는 제사보다 순종을 원한다..." 너 지금 뭔가 잘 못 알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지요. 변명하는 사람들은 항상 물귀신 작전입니다. 이거 하나님의 제사의 쓸려고 가지고 왔다며 하나님을 끌어 드립니다.

하와와 아담에게 왜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의 알게 하는 열매를 먹게했냐고 그럴때 하와와 아담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당신이 지은 그 여자가 먹으라고 그랬습니다. 넌 왜 먹었느냐? 당신이 지은 그 뱀이 먹으라고 그랬습니다. 가장 좋지 않은 우리의 모습이 이런 변명, 변명도 어떤 변명이예요. 하나님의 이름을 끌어다가 붙인 그리고 자기를 합리화 하는 우리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사울 하나님이 그를 추방했습니다. 내가 너를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후회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지만 하나님은 이제 그의 후손을 왕으로, 왕조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길브앗전투에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남은 자식으로 왕조를 이어가려 했지만 하나님이 후회하신 왕조는 더 이상 왕조로서의 의미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신앙의 진실한 모습은 무엇입니까? 얼마나 많은 성과를 거두느냐보다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일을 하느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냐에 있는 줄 믿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책망을 하고, 다윗을 책망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것입니다. 사울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크게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지요. 외형적으로 업적에 매달릴 때가 아니라 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이끌어 가는 일이 지금 시급한 일인데 지금 무슨 엉뚱한 소리하고 있느냐? 하는 이야기지요.

요한복은 3장 23- 24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외형적인 업적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삶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예배하는 자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책망을 하신 후에 8절 이후에 말씀하십니다. 내 종 다윗에게 가서 분명하게 전하라. 8절부터 16절은 다윗에게 전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 이 말씀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8절에서 12절까지는 다윗왕에게, 그리고 13절 이후는 다윗의 후손이 될 솔로몬왕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놀라운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9절의 말씀은 임마누엘의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9절 마지막에 보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존귀함의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자랑스럽고 사람이 살면서 살 이유를 느끼는 것은 자신의 존귀함입니다. 왜 아이들이 자살합니까? 왜 어른들이 자살합니까? 어른이나 아이나 직장이나 학교나 사회에서 왕따를 당합니다.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낳고나서 석달이 지나고 나면 엄마아빠의 품에 안겨서 교회를 나옵니다. 또 엄마아빠의 품에 안겨서 교회를 나왔을 때 담임목사가 축복기도를 해 줍니다.

그 축복기도 중에 내가 빼놓지 않고 해 주는 문구가 있지요? 하나님 이 아이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존귀한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 사람들이 존귀하게 여기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면 그가 많이 가지던, 적게 가지던, 많이 배우던 적게 배우던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는 이 땅에서 존귀한 자로서의 삶,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자긍심을 가지고 살게 되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지요. 네가 존귀한 자가 될 것이다.

10절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이리로 저리로 다시는 옮기지 않게 하리라. 정착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유목민족입니다. 우리가 이삭의 때에도 보면 그들은 양떼를 가지고 이리저리 풀이 있는 곳에, 물이 있는 곳으로 찾아다녔습니다.

정착을 해 보려고 이삭은 우물을 깊이 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와서 이 땅이 우리 땅이니 나가라고 할 때에 깊은 우물을 포기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몇 차례나 그렇게 했지만 그들은 계속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꿈에도 소원은 정착할 땅입니다.

집없는 우리 성도들 평생 소원이 뭔가요? 내 집 마련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입주예배는 감격 속에 드립니다. 눈물로 드립니다. 특별히 고난과 궁핍 속에서 그 삶을 길게 기어왔던 가정의 입주예배는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지금은 드물지만 옛날 어른들은 자기 석자 이름의 문패를 거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50대나 되야 직장 다니면서 저축해서 겨우 20평짜리 자기 아파트 하나 생깁니다. 그러면 아들 딸 결혼시키는 거예요. 이제 내 집 생겼으니 자식들 출가 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거의 부모들의 기쁨 중에 하나였습니다.

오늘 2-30대가 부모의 덕분으로 집을 척척 하면서 그 집에 대한 기쁨을 제대로 아는 지나 모르겠어요. 집없는 사람, 전세를 사글세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 집 마련하는 것보다 더 큰 꿈은 없습니다.

땅이 없는 나라의 민족에게는 정착할 땅을 가지는 것, 그 나라 민족들에게 더 이상의 축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약속합니다. 이제는 이리저리 방황할 그런 시대를 끝내고 한 곳을 정착하게 하리라.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10절 마지막 절에서 11절입니다.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며 사사시대처럼 그렇게 대적에게 시달림을 받지 않게 하겠다. 외적의 침략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안을 누리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 마지막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리라. 엄청난 축복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집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집이 아닙니다. 왕조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너를 위하여 왕조를 이루게 하리라. 굉장히 중요한 선언입니다. 이 선언을 신학자들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왕조의 창건을 신탁하신 선언이다. 왕조 창건의 신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요.

역사적으로 볼 때는 이스라엘 초대왕이 사울이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이스라엘의 초대왕조의 시작은 다윗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기억 속에서, 이스라엘의 자랑스러운 그 왕조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참 무서운 것 같습니다. 전에는 겸손했지만 지금은 왜 교만할까?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나이가 먹어서 교만해 집니까? 돈이 많아서 교만해집니까? 경험이 많아서 교만해집니까? 어쨌든 그러한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해서 교만으로 변질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변질된 것은 음식도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도 변질되면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울시내 교인들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목사님들에게 부탁을 했어요, 당신들이 원하는 성도들을 향한 제1요구조건이 무엇이냐?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성도들이 등록할 때에 그 모습, 그 마음 변치 않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의 목회자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변함이 없는 목사님의 모습을 원합니다. 목회자나 성도나 서로 기대하는 것이 똑같았어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옆사람과 인사한 번 해 볼까요? 옆사람과 손잡아 보세요. 절대로 변하지 맙시다.

목회자가 바라는 것도 성도가 바라는 것도 똑같았어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그 에베소교회의 변함이 뭐예요?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정착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1부예배 때도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올해로 22년이 되었는데, 1년 지하실을 지나고, 2년째부터 3년째까지 저 길가에 3층에 있었습니다. 한 30-40명으로 한창 교회가 재정적으로도 모든 면에 있어서 자립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습니다.

그 때 처음 등록한 김경원장로님이 교회 와서 집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오자마자 재정을 맡겼습니다. 그 분이 여기서 전세를 살다가 노량진으로 이사를 간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얼마나 마음에 염려가 되던지, 그런데 그 분이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변함없이 충성합니다.’

변함없이 노량진에서 9시에 어린이예배를 위해서 8시부터 차량운행을 합니다. 그 300만원짜리 20만킬로가 넘은 봉고차를 타고서 어린이수송을 하시는 것입니다. 11시예배를 위해서 성도들 수송을 위해서 차량을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그 분을 바라보면서 노량진에 사시는 저 분의 열심이 얼마나 갈까? 한 편으로 고마우면서 한 편으로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는데 교회 옆에 3층짜리 빌라를 짓기 시작을 합니다.

어느날 장로님이 와서 그래요. 목사님 저 계약했어요. 아니 무슨 이야기입니까? 제일빌라입니다. 10년이상을 사셨는데, 제가 10만원 주고 계약을 했습니다. 아니 집을 무슨 10만원을 주고 계약을 합니까? 그것은 그 돈을 집을 주고 살 그런 능력이 되지 않았던 분입니다. 그런데 10만원을 주고 계약을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얼마나 제 마음에 감사한지, 아, 이 분은 지금 집을 살 형편은 안 되지만 주의 일을 섬기기 위해서 지금 노량진에서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담임목사가 불편해 하고, 불안해 하니까 저 목사님의 오른팔이 되기 위해서는 이사를 와야 하겠다. 내가 형편이 안 되지만 수표한 장 주고 계약을 하면서 자기의 의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집을 사게 된 줄로 믿습니다.

아마 1부 예배를 마치고 장로님이 제 방에 들어오셔서 ‘목사님 그 때 이야기를 하셨는데 참 감동스러웠습니다.’ ‘장로님 정말 참 고마웠어요.’ 예배 전에 장로님과 눈시울을 붉히면서 그 때를 회상하고 감격과 감사함으로 눈물을 잠깐 보였습니다. 그 때 제게 40명이 채 안 되는 상황 가운데 그 분이 그런 결단을 하셨을 때 그 목사에게 주어지는 위로와 힘은 헤아리기 어려운 거예요.

성도들이 정착할 때, 의지를 보일 때 여기 이기무장로님 계십니다만은, 은퇴하셨지만 10번도 더 이사를 하셨습니다. 내 집을 마련하지 못해서 때로는 1년, 때로는 2년, 어느 때는 주인이 집을 판다고 내 놓으라고 하면 6개월만에 계속 개미 쳇바퀴 돌 듯이 교회 주변에서 열 번도 더 이사를 했어요.

그런 것을 볼 때에 목사의 생각은 그가 교회를 사랑하고, 그가 교회의 기둥이 되기 위해서 저런 수고를 감당하고 계시는구나. 목사에게는 큰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그런 분들의 수고와 희생이 오늘 평안의교회를 있게 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어 주리라. 왕조를 세워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12절 그의 후손에게서 날 솔로몬에게 축복을 계속 하셨습니다. 네 속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자식으로 이어지는 왕권에 대한 축복을 선언하셨습니다.

13절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라. 성전건축은 네 아들대에 가서 해도 상관없어. 지금 네가 신경 쓸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언제나 겸손하고, 언제나 변함이 없는 내적인 신앙을 다지는 일을 네가 한다면, 네 아들 때에 성전을 건축해도 나는 괜찮다.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셨습니다.

그 나라 위를 견고케 해 주리라. 국가기반을 든든히 세워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14절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14절 후반에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만일 저가 솔로몬이 죄를 범한다면 내가 사람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으로 저를 징계하겠지만 사울처럼 은총을 거두어 들이지는 않을거야. 감격스러운 말씀입니다. 후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윗 너를 세워서 사울처럼 결코 후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혹 너의 자손들이 잘 못하면 채찍으로 막대기로 징계는 하겠지만 은총은 거두어 들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약속인지 모릅니다.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밤에 다윗에게 가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선언하시는 이 말씀을 보면서 때때로 우리의 생각과 방법들이 앞서갈 때가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방법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하나님이 우선으로 하여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깨달을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전은 솔로몬 때에 지어도 상관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의 전처를 밟지 않고, 사울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일이 이것이 진정으로 내가 너를 통해서 지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외형적인 업적이 치우쳐서 많은 일만 하면, 큰 일만 하면 괜찮으리라는 생각은 다윗의 생각에서 잘못된 것인가를 우리는 깨닫게 한다는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찾아가며 깨달아가며 실천할 수 있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진정한 우리의 예배가 상실되었다면 그 예배의 모습이 아무리 거창하고 그 예배의 장소가 아무리 거창하더라도 우리 주님을 기뻐하지 않으시면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 주님의 뜻에 헤아려 주님을 예배하는 신령과 진정에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외형적인 것보다 내면적인 헌신과 봉사와 겸손이 변함없는 저희들로 삼아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나라를 세우시고, 우리의 위를 든든히 하시며 당신의 집을 세우시는 그 하나님의 소망이 우리의 자손 만대 계속 될 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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