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상과 제자 (요 15:18-20)

  • 잡초 잡초
  • 258
  • 0

첨부 1


최근에 인도가 IT 산업에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며칠전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OECD 가입 회원국 가운데 IT 산업 경쟁력 부분에 있어서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외국 투자자들이나 IT 관련 기업들은 한국보다 인도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텔사나 마이크로소프트사 혹은 IBM과 같은 기업들이 모두 인도로 몰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IT 관련 기업뿐 아니라 금융회사인 GE 캐피탈도 인도에 콜센터를 두고 있고 스위스 항공은 경리부서를 인도로 옮겼습니다. 영국 항공은 마일리지 관리등 행정업무를 인도에서 할 정도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IT 산업 경쟁력 부분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기술력에 있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는데 외국의 기업들 우리나라에 투자하지 않고 왜 인도로 몰리느냐?는 것입니다. 인도는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환경적으로도 그렇고 무엇하나 우리나라에 비해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 외국의 기업들은 한국이 아닌 낙후된 인도를 선호하느냐? 는 것입니다. 마치 제조업을 하려면 모두 중국으로 몰리는 것처럼 왜 인도로 몰리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국의 기업들이 인도를 선호하는 이유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어민에 못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영어구사 능력을 갖춘 고급인력을 선진국의 5분의 1도 안되는 싼 값에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기업이 외국으로 진출할 때에도 아무렇게나 진출하지 않습니다. 그 기업이 가지고 있는 목표와 부합되는지 되지 않는지를 꼼꼼하게 따지게 됩니다. 기업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이나 목표가 무엇입니까?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이 무엇인가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 때문에 외국의 기업들은 우리나라보다 인도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기업활동을 하기엔 환경이 인도만큼 조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언어구사력에 있어서도 그렇고 임금에 관해서도 그렇고 기술력외엔 인도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에 외국의 기업들이 인도를 더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국내에 거주하던 외국의 노동자들이 최근에 발표된 정부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정책에 의해 강제 출국당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지금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과 복지정책이 어느정도 개선되어 예전보다는 한결 나아진 여건속에 있기는 하지만 초창기 외국의 노동자들은 참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특히 악덕 기업주들의 임금체불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외국이민사를 보면 우리도 똑 같은 일을 경험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도 있고 그 사회에 적응이 되지 못해 결국은 역이민을 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누구든지 다른나라에 가면 적응해서 산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응하려면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문화에 동화되어지던지 아니면 그 사회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어야만 그래도 견딜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살수가 없습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거절당하거나 정당한 권리가 부여되지 않아 마치 나그네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도 그런 사실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모두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18절에 "세상에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는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 이유없이 미운 경우가 있을까요? 흔히 하는 말로 '저 사람은 주는 것 없이 괜히 미운 생각이 든다'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도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나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해를 끼친 적은 없다할지라도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나에게 거슬릴 때, 다시 말씀드려서 나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거나 내가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을 때, 그때는 내가 그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경험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미운 생각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 대부분 내가 미워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당사자가 되어 직접 피해를 보는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함께 모여서 살고자 할 때 그냥 아무렇게나 모여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생각이 맞고 뜻이 통하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국사회에 발을 붙이고 살려면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생각에 일치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함께 산다는 것이 굉장히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동남아의 여성들과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농촌총각들 사이에 국제결혼이 성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대다수는 일년이 채 되지 못해 파경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살아왔던 문화와 한국의 문화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중에 어떤 이들은 한국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문화를 수용하고 받아들여서 한국사회에서 건강하게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가난한 동남아의 많은 외국여성들이 그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국제결혼을 했다가 서로 낭패 당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남편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자신들이 경험해왔던 자신들의 문화와 가치관을 뛰어 넘어 한국사람들의 가치관과 생각에 일치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농촌으로 시집온 여성에 대해 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결혼생활속에서 힘들어했던 이유는 농촌에서 감당해야하는 많은 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힘들었던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나이트 클럽이나 아니면 간이로 꾸며진 춤추는 장소에 가서 신나게 몸을 흔들며 춤을 추어야 피로가 풀리는 사람들입니다. 오랫동안 그런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 농촌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가 나이트 클럽에 간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아내를 위해 한두번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나이트 클럽으로 옮긴 적은 있지만 자신에게는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갈등들 때문에 힘들어 하다가 결국은 자신들의 결혼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재고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사회든지 자기의 이익을 지키고 싶은 욕망이 있고 가신이 경험해 왔던 가치관이나 생각에 동의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를 유익하게 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됩니다. 만약 생각이 같지 않거나 자기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거나 심지어 피해를 주는 일이 있다면 그런 사람과는 함께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연히 적대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데 그것이 이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신 것중에 가장 핵심된 내용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몸도 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으로 쓰임을 받아야지 내 마음대로 주장하면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좀 더 깊은 의미에서 말씀을 드린다면 우리 인간이 도대체 뭐냐?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존재는 단지 하나님앞에서 그분께 지음을 받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한줌의 흙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이 제일 듣기 거북하고 싫은 사람은 누굴까요? 그 당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기득권층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번돈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 말을 좋아할 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모른다거나 처음 듣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온 천하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틀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자기들의 이익과 충돌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것을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려면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것 중에 많은 것을 버리거나 포기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단지 내 생활에 크게 피해를 보지 않는 범위내에서 일주일에 한번 내지 두 번정도 예배에 참석하는 정도를 원하는 것일까요? 일년에 한두번 내 마음이 허락되는 범위 내에서 봉사하는 그런 정도를 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완전히 그분께 우리의 인생을 맡기고 그분을 우리의 주인으로 고백하며 그분으로 인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얘기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에 담을 쌓게 만드는 벽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면 도대체 어떻게 먹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봉사도 적당한 수준에서 해야지 봉사만 하면 생활은 어떻게 누가 책임지냐?는 것입니다. 예배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 드리면 되지 수요예배에 금요기도회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참석하다보면 언제 먹고 사는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느냐?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틀린 주장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걱정하거나 책임져야 할 일은 아닙니다. 주님은 반드시 주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할 때 책임져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세상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과 충돌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신의 이익과 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미움'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어떤 초등학교에서 반대말을 쓰는 시험을 봤는데 '미움'의 반댓말을 쓰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생이 '안 미움'이라고 썼다고 합니다. 미워하는 것의 반댓말은 미워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소극적인 의미이며 적극적으로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입술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하지만 그 사랑의 고백에 상응하는 희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내가 포기하고 버리는 것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주를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이 포기하고 희생하느냐? 로 증명되어진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버리는 것이 싫고, 희생하는 것이 싫으면 결국 미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절에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세상의 것을 사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처음 중국에 갔을 때 만났던 조선족들에게서 의외의 말을 듣고 당황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의 고향이 북한이었든지 아니면 남한이었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모두 한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중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나라 역사를 배우고 그 나라 문화속에서 살면서 그 나라 국적을 가지고 있다보니 자신들은 중국내에 거주하는 조선족이라는 소수민족일뿐 중국인으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평소 한국의 축구팀이 다른 나라와 경기를 벌이면 한국을 응원하지만 중국과 경기를 하면 자신들은 중국을 응원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 말에 저는 몹시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땐 놀라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년 1월 어신원졸업식 때문에 중국을 갔다가 서안지역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중국의 모든 도시가 역사의 도시지만 특히 서안지역은 우리나라 경주이상으로 곳곳이 중국의 오랜역사와 관련되어진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병마총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병마총은 진시황의 명령에 의해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 농부가 우연히 우물을 파다가 병마용갱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어찌나 웅장하든지---

솔직히 우리나라 경주에 있는 유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고 그 위엄이 당당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안지역에서 보았던 대부분의 역사관련 유물들은 저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 유물을 둘러보면서 한편으론 감탄하고 또 다른 한편으론 놀라기도 했지만 그래도 저는 우리의 역사속에 묻어 있는 조상들의 유물이나 물건들이 더 좋고 귀하게 여겨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는 중국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의 것을 사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자기에게 속한 자를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속한 사람은 그 세상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기들을 위해 그만큼 일한 사람을 알아줍니다. 그래서 여기서 '사랑한다'는 말은 그만큼 인정해 주고 그만한 지위를 보장해 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지도 않고 또 그만한 지위나 인정을 해 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했느냐 세상에 속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정신으로 결정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자체가 목적입니다.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그의 최상의 목적일 때 그는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자를 알아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위하여 하는 일은 최소한도에 불과합니다. 굳이 세상에서 인정받으려고 발버둥치지 않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을 가지지 못해 안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세상이 뭐가 답답해서 알아주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관련된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몇가지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안정되고 세상에서 자신이 뜻하는 바를 성취하며 사는 것이 최선의 목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로 하나님께 복종하여 사는 자체가 목적입니다.

어떤 지위나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가 사는 목적이 아니란 얘기지요. 하나님께 복종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하루 하루의 삶 자체가 그의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모호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세상사람들이 이런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서울 강남에서 아주 잘 나가던 치과의사 한분이 러시아 우스리스크에 있는 작은 농장에서 그곳에서 일하는 러시아인들과 고려인들을 진료하며 사는 분이 계십니다. 서울 그것도 강남에서 잘 나가는 분이라면 아마도 한달 수입이 수천만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진료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고시합격해서 판사가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고시에 합격했는데 그리고 좋은 성적으로 사법연수원을 졸업했는데 검사가 되지 않고 인권변호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그들의 삶에 현장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갑니다. 세상적인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의사가 되고 판사나 검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지위에 오르고 어떤 일을 성취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루 하루를 하나님의 뜻안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이 그의 목적입니다. 비록 오지에 가서 몇 명되지 않는 사람들을 진료하고 비록 판사나 검사가 아닌 인권변호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며 산다는 것이 결코 화려하거나 세상에서 인정받은 삶으로 여겨지지 않는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이런 사람을 어떤 시각으로 볼까요? 자기들은 일평생 피땀 흘려 노력해서 얻은 것을 이 사람들은 너무도 하찮게 여기며 마치 배설물처럼 생각하니까 이들을 볼 때마다 약이 오르고 밉습니다. '지들이 무슨 용가리 통뼈라도 되냐?'는 식으로 말하며 미워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루를 살아도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세상과 친해져 있다면 분명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약올라 해야 합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무슨 배짱으로 저렇게 사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이 하나님께 일치하는 삶을 추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세상은 의아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를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참 아이러니 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 세상을 향해 최선의 삶을 산다는 것이 쉽지도 않고 어떻게 생각하면 좀 모순 된 말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벗어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과 무관한자들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은 너무도 마땅한 우리들의 삶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군생활을 할 때 저희 내무반 제일 바깥쪽 끝자리는 다른 부대로 파견나간 사람의 자리였습니다. 저는 일병을 달때까지 그분의 얼굴을 한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 고참의 자리엔 '파견병'이라는 푯말만 붙어 있었습니다. 그 고참은 통신병이었는데 소속은 저희와 같았지만 항상 사단 본부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점호를 할때 그분은 한번도 제가 소속된 부대의 인원에서 제외된 일이 없었습니다. 인원파악은 똑같이 하고 사유만 파견근무였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들이 파견병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엄격하게 말해서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소속이 여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곳에서 생활합니다. 즉 세상에 파견 나와있는 파견병들입니다.

얼핏보면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전과 똑같은 가정이나 직장에서 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과 똑 같이 일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분과 소속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 파견근무중입니다. 우리의 소속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그렇다면 파견근무중인 병사가 그곳에서의 일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까? 파견병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병사를 파견한 부대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한미군의 경우 과거엔 우리들이 참 좋게 생각했습니다. 미국은 언제나 우리의 우방으로 우리의 부족한 국방력을 채워주는 좋은 동반자였습니다. 그런데 왜 최근엔 주한 미군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들이 우리나라에서 하는 행동은 너무도 상식이하의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두 명의 여중생을 죽게 한 장갑차 사건도 거기에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툭하면 민간인을 때리고 툭하면 연약한 여성들을 성희롱하고 그러니 좋아할리 있겠습니까? 젊은 사람들은 이런 저런 꼴을 보느니 차라리 미군들이 철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지 않습니까?

왜 그런 현상들이 나타납니까? 파견병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니까 일반 시민들이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파견병들은 자신이 그 부대를 대표하는 얼굴과 같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를 파견한 부대에 대해 호감을 가지느냐 아니냐가 결정되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소홀히 하게 된다면 파견근무의 의미가 상실되어져 버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할지라도 결국 이 세상과는 갈등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가면서 이 세상의 욕구를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속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파견병에게 있어서 아무리 파견근무하고 있는 부대의 지휘관명령이 중요하다 해도 결국 최종적인 명령은 자기가 소속된 부대의 지휘관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이 곳에 파견나와 있다고 이곳의 지휘관명령을 따라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최종적으로 수행해야 할 명령은 나를 파견한 부대 지휘관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은 마땅한 우리의 본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과 일치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 좋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 말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굉장히 필요하고도 중요한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변질시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면 결국 세상과 나는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아니 세상에 동화되어 '나'라는 존재의 신앙적 색깔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팝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종이 주인보다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 세상은 종에 불과합니다. 그 세상을 부리는 분은 주인입니다. 그런데 종에게 충성하는 어리석은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제가 부목사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전화를 하셔서 목사님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장황하게 저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들어보니 그분의 얘기에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교회 담임목사가 아니고 부목사입니다. 그랬더니 버럭 화를 내면서 진작에 그렇게 말하지 사람 입만 아프게 했다며 담임목사님을 바꾸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듣고 나니 저도 사실은 황당했습니다.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아마 그 사람도 그런 일을 여러번 경험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실컷 설명을 했더니 정작 그 설명을 들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참으로 어처구니없을 것입니다.

언젠가 나폴레옹의 얘기를 여러분에게 한 기억이 납니다. 한참 땀을 뻘뻘 흘리며 병사들을 데리고 고지에 올라갔는데 다 올라가서 하는 말이 '여기가 아닌가 봐'라고 했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리석게 종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바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세상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에 충성을 바치고 살다가 어느날 주인이 나타났을 때 그의 수고와 충성이 물거품처럼 되어버릴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빛이되고 소금이 되어야 할 자들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며칠전에 저희집 안방의 형광등이 수명이 다 되었는지 깜빡 깜빡 했었습니다. 형광등을 바꾸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제가 그만 깜빡하고 말았었습니다. 그런데 불이 제대로 비취지 않고 깜빡 깜빡하니 얼마나 불편합니까? 그래서 그냥 깜빡거리는 형광들을 빼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다음날 갈아 끼우기는 했지만 - - -

빛이 제대로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그것만큼 답답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야 할 자들이 우리들입니다. 물론 그렇게 산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에서 전적으로 환영받으며 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핍박이 있고 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우리의 소속을 분명히 알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며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때 그 미움으로 인해 우리의 소속을 더욱 분명히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세상에 속하여서 세상과 더불어 적당하게 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