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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과 열매 (요 1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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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속담에 참 재미있는 표현들이 많습니다. 한가지 일을 함으로 또 다른 한가지 유익을 얻게 된다는 의미에 해당되는 표현들입니다. 예를 들어 "마당쓸고 돈 줍고" "도랑치고 가제잡고" "꿩 먹고 알 먹고"

사실 저는 설교제목에 별로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목을 기가 막히게 정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떨 때는 그런 분들이 부럽습니다. "어떻게 본문의 말씀을 저리도 잘 표현하는 제목을 정할 수 있을까?" 하는 부러움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에 연연해하지 않는 이유는 제가 제목설교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말씀과 열매"라고 정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너무도 평범한 제목입니다. 그리고 흔히 접하는 제목이기도 하구요. 사실 본문의 말씀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제목이 생각이 나지 않아 '말씀과 열매'라고 정했는데 굳이 방금 말씀드린 속담의 표현을 빌려서 정한다면 "말씀 붙들고 열매도 맺고"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기서 두 번씩이나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가 '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한다'라는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거한다'라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내 말을 기억하라'라든가 아니면 '약속을 잊지 말아라'라고 하면 더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표현할 때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라는 말은 결국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을 떠나지 않는 것이 주님안에 거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35장을 보면 레갑자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레갑 족속은 유목민으로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손으로 추측되어집니다. 그런데 이들 조상 중에는 '요나답'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후손들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집도 짓지 말고, 한평생 유목생활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후손들이 수 백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말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들 앞에 포도주를 대접에 가득 담아서 갖다준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 포도주를 마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레갑이 살아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아주 오래 전에 살아있었던 조상일 뿐인데, 후손들은 그의 말을 존중히 여기며 그의 말을 지켰습니다. 이런 것이 가르침을 떠나지 않는 것이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거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안에 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분의 가르침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 가르침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켜 나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말씀의 의미를 계속해서 깨달아 아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렸을 적에 저희 아버님은 저나 혹은 저희 형제들이 누워 계신 아버님 머리위로 지나다니는 것에 대해 굉장히 야단을 치신 적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한 두번은 그런 경험이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왜 어른들은 아이들이 어르신들의 머리위로 지나다니는 것에 대해 야단을 치셨을까요? 아마도 머리위로 지나다니는 것은 웃어른을 공경하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 저희 가정뿐 아니라 우리네 대부분의 가정이 유교문화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때문에 머리 위를 지나다니다가 야단 맞은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한가지 더 예를 든다면 식사할 때 왼손으로 식사하는 문제입니다. 요즘은 왼손으로 식사하거나 왼손 쓰는 것을 오히려 장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뇌발달을 위해서 왼손을 쓰는 것이 좋다는 학계 보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뇌는 창의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창의력은 이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뛰어난 창의력을 바탕으로 세계역사를 주도했던 인물중에는 왼손잡이가 많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젊은 부부는 자신의 아이들이 왼손을 사용해서 식사를 한다고 그것을 못하게 막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예전엔 어른들 앞에서 왼손으로 식사하면 무조건 '버릇없는 놈'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그런 이유 때문에 야단을 맞으신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엔 왜 왼손으로 식사를 하면 버릇없는 놈이라 하여 야단을 맞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나이쯤 되신 분들 중에는 다른 것은 모두 왼손을 사용하는데 숟가락이나 젓가락은 지금도 여전히 오른손을 사용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과거 어렸을 때처럼 식탁에서 야단을 치시던 아버지가 계신 것도 아닌데,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되셨는데, 이제는 왼손을 사용한다고 해서 누가 야단치는 분도 없는데 왼손잡이이면서 숟가락은 굳이 오른손을 사용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제는 완전히 습관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왼손잡이라고 다시 왼손으로 식사를 하려면 그게 더 어색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뭏튼 그런 분들은 대개 유교문화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정에서 자라신 분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도 저희집 아이에게 제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저희 집 아이가 제 머리위로 지나다닐 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는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것에 관해 오랫동안 지켜 행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켜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시야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청소하다가 성전 깊숙한 곳에 숨겨진 두루마리 성경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깊숙한 곳에 감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발견하고 난뒤, 그것을 읽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삶, 전체가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이 그때까지 멸망당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자신들이 죄악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큰 회개와 애통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떠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왜 우리가 그 가르침을 떠나지 말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바르게 깨닫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들 중엔 자신이 왜 교회에 나와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가정의 평화때문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고, 마음에 평안을 얻기 위해 오신다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가르침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그 의미를 바르게 깨닫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안에 거하게 될 때 깨닫게 되는 것은 주의 말씀이 이야기하는 것과 나의 모습, 또는 우리교회 또는 우리의 가정이나 내 주위의 형편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과 너무도 다릅니다. 또 나의 가정이나 직장도 말씀이 요구하는 것과 너무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과 현실사이에 높은 벽을 실감하게 됩니다. 말씀대로 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해서 그 말씀을 묻어버릴 순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적인 양심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나씩 하나씩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술 장사를 하다가 그 장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늘 진실하지 못했는데 과장된 표현을 삼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떼어먹은 돈을 다 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전부 손해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돈은 손해보고 체면은 구겨졌을지 몰라도 그의 양심에는 놀라운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물론 주님은 이런 일들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뭐라고 하십니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는대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가 주님 말씀안에 거하는데 있어서 기도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우리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당장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매력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만화영화는 눈이 반짝 반짝 빛이 나도록 봅니다.

수년 전에 인기를 끌었던 '피카추'에 수백가지 변형된 동물들이 등장을 했는데 아이들이 그 동물들의 이름을 줄줄 외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름을 누가 많이 외우느냐?가 그들에게 관건이었습니다. 가장 많이 외우는 아이는 마치 그들 세계에서 영웅처럼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그 이름이 성경에 나오는 이름보다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잘 외우는지…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이름을 외우는데는 완전히 맹탕입니다.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아 이상하게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때때로 세상이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얘기나 어떤 일들은 상당히 매력적이며 우리의 시선을 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왠지 하나님의 말씀은 답답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지루한 얘기가 나오면 '설교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밤에 중심가를 나가본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중심가는 언제나 네온사인과 불빛 찬란함이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 붉은 빛과 찬란함이 화려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 화려함 뒤에 감춰진 실제의 모습은 너무도 비참한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영광은 진실되지 못합니다. 가짜투성이입니다.

반면에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가치를 알려면 나의 인생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어느 날 주님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요? 돼지는 진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돼지는 모든 것을 양으로 따집니다. 돼지에게는 질적인 척도가 없습니다. 돼지는 그저 많이 먹어야 만족합니다.

여러분!
왜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합니까? 우리의 눈을 현혹하는 세상의 것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말 가치있는 것을 바르게 보는 눈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인생관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에 따라 살려는 의지와 용기가 생겨납니다. 그럴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본문 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여기서 '많은 열매'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열매하면 제일 먼저 '전도'를 떠올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전도는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열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도가 열매의 전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리새파 같은 경우에는 그들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열정을 가지고 자기 제자들을 만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들을 향해 열매를 많이 맺었다고 하신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에 비유하시면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많은 열매'는 도대체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게 하는 삶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치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는 스스로 가진 것은 없지만 햇빛을 물을 끌어 올려서 열매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들도 그런 은혜의 통로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몇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멸망당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아니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되찾고 참 가치 있는 삶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먹을 것 잘 먹고, 좋은 환경에서 문화적인 혜택을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며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 것입니다. 다시말씀드려서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 이 세상에서 짐승처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죄송한 말이지만 짐승처럼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먹는데 만족하는 인생이 아닙니까? 아무리 많은 문화적인 혜택을 누리며 산다할지라도 내가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모르며 산다면 그것은 짐승과 다를바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습니까? 거울을 볼 때입니까? 물론 거울을 보면 자기의 얼굴이 어떤지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겉모습은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겉모습은 바꿀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형미인이라는 말이 왜 생겨났습니까? 다 뜯어고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겉모습은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사실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이 자기를 바르게 대해줄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치를 알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해 주고 자기를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날 때 비로소 자기의 정체성을 깨닫게 됩니다. 예를들어서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고나서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그가 자기를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양은이파의 두목이었던 조양은씨가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자가 찾아가서 어떻게 지난 수십년의 세월과 정반대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순전히 자기 아내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옥중에 있을 때 만났는데 조폭의 두목이었던 자기를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형님'하면서 따라다녔던 부하들은 자기가 가진 힘에 눌려서 자기를 대우해주었고 감옥에 있을 땐 죄지은 사람이었기에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어떤 면에서 보면 그는 일평생 인격적인 대우나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 아내는 자기를 그렇게 대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대우해주면서 거기에 사랑까지 쏟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는데 물론 그녀가 그렇게 조폭의 두목인 그를 그렇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변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자기 인생이 쓰레기 같은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변화되어 결국 신학을 공부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하게 그리고 편리하게 살 수 있을까?를 연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해 주는 진정한 만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향한 끊임없는 그분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으면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내어 놓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가 얼마나 귀하게 소중한 존재인지를 일깨워주는 사건이 아닙니까?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알려면 인격적으로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알기 위해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에 그치면 안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주님께 내 자신을 철저히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우리의 '자아'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본능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나부터 먼저 생각하는 습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라는 존재를 먼저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장래, 나의 자존심, 나의 필요,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동안 나의 자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독차지하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염려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런 열매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염려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영적침체입니다. 염려는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흔들릴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무엇인가를 믿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염려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염려할 때 생각이 복잡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침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 감정까지도 파괴시켜 버립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정신과 더불어 감정까지 모두 내려 앉아버리는 상태가 영적침제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많이 가졌기 때문에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내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없는 사람의 마음을 다 이해하는 것도 아닙니다. 감정이 메말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감정이 메말라 있으면 남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감정이 메말라 있지 않으면 자기의 가진 것으로도 얼마든지 남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이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상태를 말합니다. 즉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주님이 나를 사용하셔서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일은 자기를 포기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우리 자신들의 일에 얽매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내일의 먹을 것을 염려하게 만들고, 나를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서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선 나부터 많은 것을 확보한 다음에 남을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고 속삭입니다. 우선 생활부터 좀 안정을 시켜 놓고 그 다음에 봉사해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선 사회적으로 뭔가를 좀 이루어 놓은 다음에 주의 교회를 위해 뭔가를 해도 신앙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에 현혹이 되어 그렇게 행동하는 동안 결국 우리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완전한 모험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완전히 부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사실 세상에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도 저희집 큰 아이는 여전히 운동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한때 장래 희망이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라고 해서 고민 아닌 고민을 제가 잠시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저 저의 생각으로 운동선수가 된다는 것은 목회자가 되는 것만큼 쉽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운동을 해서 대학을 가거나 그래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 정도가 되려면 보통 노력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희 집 아이가 축구선수가 된다고 했을 때 저는 '운동선수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공부하는 게 더 쉽겠다'라는 말을 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공부하는게 쉽다는 말도 무리가 있는 듯 합니다. 만약 공부하는데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다면 제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공부든 운동이든 쉬운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도시에 사는 우리들은 대형할인마트에 가면 언제든지 싱싱한 과일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싱싱한 과일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오기까지 농부들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농부는 어떻게 됩니까? 그 열매를 팔아서 돈을 많이 벌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열매를 맺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이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머리로는 인정할는지 몰라도 그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통로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전달될 때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생기게 됩니다.

북한의 용천역 열차사고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는 얘기를 우리는 전해 들었습니다. 특히 용천소학교가 인접해 있어서 아이들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하니 마음이 참 아픕니다. 많은 아이들이 눈을 다쳐 실명의 위기에 있다고 하니 할수만 있다면 우리도 그들에게 뭔가 도움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용천역 열차 사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제일먼저 그들을 돕고자 발 벗고 나선 것은 바로 우리 기독교계입니다.

재빨리 성금을 모으고 각 교회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많이 지면 많아질수록 하나님을 머리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슴으로 느끼게 될 것이고 그분의 사랑이 메말라 있는 심령속에 조금씩 단비로 촉촉이 젖어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남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나를 사랑하든 하지 않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 반응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사랑을 했는데 저 사람은 왜 나에게 실망스럽게 대하는 것일까?" 이런 것이 아닙니다. 반응이 있으면 좋겠지만 반응이 없어도 실망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가 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 엉뚱하게도 열매를 많이 맺어야 제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도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확인을 요구하십니다. 그들이 참 제자인지 아닌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누가 참 제자인지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결국 제자들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기로 결정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확인까지 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심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가 많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확인이 필요합니다. 어떤 확인이 필요합니까? 그것은 많은 고난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편할 때 예수님이면 우리가 어려울 때에도 여전히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편할 때는 나의 주님이며 예수님이셨다가 막상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나의 주님이 아니라면 나의 믿음은 엉터리입니다. 사실 내가 내 자신을 생각할 때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어려움에 직면해 보면 압니다. 정말 어려울때에도 주님은 내 삶의 주인이 되심을 고백하고 그분을 의지하는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는지 어려움 속에서 증명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모두 용서하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용서의 확신은 확인이 필요합니다. 어떤 확인이 필요합니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행하고 아픔을 주고 많은 손해를 끼쳤을 때 그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를 용서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믿는 믿음도 부도난 믿음에 속합니다.

내 죄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보증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다면 나도 내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비록 내가 완전하지 못해도 그것을 인정하고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완전해지면 나를 인정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뭔가 나은 것이 있을 때 나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제자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습니까? 우리교회도 1기 제자반을 모집해서 반년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제자'라는 명칭을 주시고 끝내시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제자다운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계획과 기질에 따라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어서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은혜를 퍼트리며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라는 말씀은 결국 "내가 너희를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시겠다"는 말입니다. 교회 북까페 창가에 어느 집사님이 기증하셔서 허브 수십개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통풍에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물 주는데 문제가 있었는지 허브 몇 개가 조금 시들해 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저께 부랴 부랴 창문을 열고 물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날 다시 생기있게 줄기가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설교 준비하기도 바쁜데 왠 허브에 신경쓰느냐? 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허브가 없을 때보다 있을 때 쳐다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조그마한 일이지만 허브를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 통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히 그런 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열매를 많이 맺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온 세상에 퍼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말씀을 굳게 붙드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많은 과실을 맺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로인해 우리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고 저와 여러분은 또 다른 사람들을 향해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해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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