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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을 소멸치 말라 (살전 5: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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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19-23).

할렐루야!
거룩하신 성령님의 강림하신 주일을 맞이하여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그 날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불의 혀 같은 형상으로 각 사람의 머리 위에 내려앉으신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이래 지금껏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지탱하여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오신 날을 기념하는 예배를 우리함께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영광의 박수를 힘차게 보냅시다. 할렐루야~~~

성령강림절은 주님 탄생하신 성탄절과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죄 없는 몸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하여 스스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죄 있는 몸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값없이 갚아주시고 이제 그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되었고, 주님은 죽음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으니 바로 오늘부터 50일전에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날을 기념하여 우리는 부활절을 기독교 최대의 명절로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주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순교하신 순교자로 남게 될 것이며,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으며 40일 동안이나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실 것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승천하시고 다시 열흘 뒤에 홀연히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 머리 위에 나타나셨으니 이 날을 기념하여 오순절 성령강림절이라고 하는데, 우리 기독인들에 있어서 성탄절, 부활절과 함께 성령강림절을 기독교 3대 축제일이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받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상고하면서 은혜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았으면 실생활에서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갈 5:22)는 말씀대로 사랑을 동력적으로 실천할 때, 우리가 성령 받은 증거라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9-10).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의 은혜로 참된 평안을 얻었고 이제 주님의 종에서 주님의 친구로 승격되었습니다(요 15장). 값없는 은혜를 입었는데 우리도 주님이 가르치신 교훈을 멀리할 수 없습니다.

'파라클레토스'라고 번역되는 보혜사라는 말은 원래 신약성경에서의 용법은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내어 진 것이요(요 15:26), 영원토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요 14:16).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요청으로 파라클레토스를 보내셨다면 파라클레토스는 부름 받아 보내어진 살아 계신 주님의 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혜사를 우리말로 간단히 표현하면 변호자, 돕는자, 중재자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위해 무언가 도움이 되고자 하여도 그 길을 알지 못할 때, 성령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시는 권위 있는 교사요 지도자로서(요 14:26), 또한 계시에 대한 증인으로(요 15: 26)나타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길을 따르는 성도로서 보혜사 성령을 받았으면 응당, 우리보다 곤궁한 처지에 놓인 이웃을 위한 변호자로서, 위로자로서, 상대를 도와주는 협조자로서 책임을 다하여 보혜사 성령을 받은 자세를 보여야 하겠습니다. 믿는 믿음 위에 행함이 없다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아서는 아니 되고, 오직 보혜사 성령을 받은 우리는 "사랑하기를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요일 3:18)으로 서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하나님 안에 거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연약한 여자를 끌고 예수님께 와서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3-6)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모여든 무리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모두 떠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있던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고 말씀하신 후, 그 여자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녀는 이미 정죄함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여 죽은 몸으로 주님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당시 율법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 여자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에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우연히 도살장 근처에 갔습니다. 그런데 말 못하는 소가 눈물을 질질 흘리는 것이었어요. 그 소는 자기가 죽는 것을 알았어요. 그렇기에 울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나이 들어 그 이야기를 했는데, 실제 소가 도살장에 끌려 갈 때는 죽는다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운다는 거예요. 그 여자는 이미 죽었던 것이며 주님을 만나고 다시 새 삶을 찾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아무 대가 없이 살려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으로 우리에게 오늘 오신 것입니다. 성령님을 증거하는 일은 바로 이웃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2. 주님을 증거하라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요 15:26).

성령님이 강림하신 뜻깊은 날에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자만하지도 말아야 하고 자랑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성령님 그 자체를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성령님은 내 안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라고 하시면서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롬 8:15; 갈 4:6), 또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전 12:3)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이 같은 일에 대하여 고전 3:16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곧 하나님의 임재이심으로 성령이 나와 함께 계시는 사람은 곧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다는 말이며 그리스도의 영은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능력을 받았다거나 은사를 받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속에 들어와 나와 함께 계신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 됐다는 뜻입니다.

오직 성령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온 세상을 향하여 온 몸으로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며(행 1:8), 성령님이 주님을 증거 하셨듯이 우리도 주님을 증거 해야 합니다(요 15:27). 증거한다는 말은 성령님께서도 성경을 통하여 예수를 증거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듯이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증거는 성령께서는 성경이 예수에 대해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는 바를 믿는 자의 마음에 확증시켜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주님의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여야 할 줄 압니다. 주님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딤전 3:16)을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증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세상의 죄를 폭로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음을 증거하고 세상의 거짓된 의를 드러냄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드러내고 또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요 16:8). 

복음을 전하는 역사는 성령이 하시는 첫째가는 역사인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같은 역사를 성령을 받은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사도 시대에는 여러 사도들이나 스데반 등을 통하여 나타내셨으며 오늘날에도 성령의 능력을 받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이 증거 사역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행 1:8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명을 위하여 권능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이 같은 권능이 필요한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필요한 권능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증인이란 말은 "말투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증인이란 말 이외 순교자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바로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순교자가 되려면 성령의 권능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요 16:13절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한다고 해도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그 중에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으며 구원도 영생도 생명도 얻을 수 없으며 소망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고전 1:12절에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롬 8:26절에서 이르시기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행하고 있는 우리의 행실을 보면 당장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 같고 지옥에 갈 것 같을 때도 우리들이 용케도 그런 대로 예수를 믿고 있으며 오늘도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여러분들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하심으로 여러분의 죄를 위해 간절히 간구하시기 때문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성령을 소멸치 말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성령을 충만케 해야 할뿐만 아니라 성령을 소멸치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값없는 은혜로 성령을 받는 것은 믿는 믿음과 주님을 구주로 받아들일 때, 성령은 충만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선포하는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성령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골라 다니면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됩니다.

로마서 8:1-4절 말씀에 보면,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케 되어 즐거운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찾아오신 성령님을 내 안에 지키는 일은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은 이어서 다가오는 환란도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데 환란이 다가온다는 것은 왠 일이고 더구나 그 환란을 즐거워한다는 말씀은 참으로 어렵고 기묘하기마저 합니다. 사도는 로마서 2:9절에서 또 말씀하시기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다고 하시는 것은 분명히 환란의 대상은 악행하는 자의 몫으로 뚝 떼어놓아야 하는데 성도들에게 환란이 오고 또한 그 환란을 즐거워하여야 하며 그 환란을 인내로서 또 참아 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인하여 일차적으로 '죄와 심판'으로부터 '완전한 구원'을 받았음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을 내 안에 모시고 육신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주님이 주신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켜야 할(요 15:12) 의무가 남아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갈 때까지 육신의 몸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기까지는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을 분명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짐을 지고 동력적 사랑을 실천해야 할 과제(갈 6:2)를 안고 살아가면서 끝없는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귀는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모든 방해요소는 마귀의 시험입니다. 우리에게 얻어진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은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소망(롬 8:24)입니다. 이러한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에 끝까지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함께 할 때까지 우리는 연단을 희망의 약속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롬: 5:1-5).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은혜와 축복만을 강조하면서 그것만을 즐거워하는 것은 상당부분 잘 못된 신앙으로 보여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소망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0)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보이지도 않는 영생의 복락보다는 당장 피부에 와 닿는 현재적 안위와 복락을 추구하는 나머지 신앙생활에 많은 변질을 가져오지는 않았는지 이 시간 함께 통회하는 마음으로 자기신앙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사람은 눈을 감기 전까지는 인생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살아가는 여정이 시험의 연속입니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롬 5:4)고 하였습니다. 연단이란 헬라어로 '도키메'라고 하는 데, 이는 시련을 통해 쌓은 경력이라는 말입니다. 시련이란 성경적 표현으로는 시험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지만, 육신이 약하여 흔들리기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마 26:41).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로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환난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연단되고, 결국 소망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시험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문제는 '왜 시험을 당할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시험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하고 기도할 때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는 시험을 이기게 만듭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려운 시험을 이기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마틴 루터도 말하기를, 인내와 시련만이 진정한 신앙의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길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은 시험을 이겨내는 신자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1:17을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라고 하신 말씀은 시험을 통해 신자의 순종을 확인하고 있음을 여실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뭐가 답답하시다고 우리의 순종을 바라시겠습니까?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순종을 바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 순종할 수 있는 믿는 믿음의 은혜를 심어주셔서 우리 스스로 순종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를 허락하시기 때문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이 시간 확실하게 믿으시면 아멘으로 화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요한복음 15:16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분명히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입사시험을 볼 때도 면접을 보고 시험을 보고 나서 합격여부가 결정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시험에 빠지게 되면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좋은 소리 못 들으실 겁니다. 왜냐구요? 아들아 너는 친구(요 15:15)하나도 제대로 못 사귀었니? 라고 질타를 받으시면 예수님도 민망하실 것이고 우리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될 것이 뻔합니다. 세상에 자기 목숨을 다하여 친구하나 구해두었는데 둘도 아니고 딱 한가지 계명, '서로 사랑하는 것' 하나 제대로 못 지킨다는 것은 우리들의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그렇죠? 우리는 사랑의 계명을 지켜 나가는 데에 있어서 부딪히는 갖가지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그 시험을 이겨내는 자만이 성령님을 소멸치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감시자로 위로자로 변호자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의 9가지 열매(갈 5:22-23)가 맺을 때까지 우리를 지켜주시고 나아가서 성령님의 9가지 은사(고전 12:8-10)를 주셔서 우리를 유익하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은혜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맺음

우리는 주어진 성령, 받아진 성령, 오시는 성령님을 소멸하지 않아야 합니다. 소멸이라는 말은 헬라어 '스벤누미'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이는 '불타고 있는 것을 꺼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26절 말씀에서 성령의 은사가 없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의하여 은사를 받은 자들이 사회에서 그것을 행사할 수 없게 되거나 혹은 그들이 말하고 행하는 것이 무시된다면, 결국 성령의 불같은 힘과 빛은 꺼지고 교회는 존립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일러 '제단의 불을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하라'(레 6:12)고 하셨습니다. 제단의 불은 성도들의 지칠 줄 모르는 헌신을 상징하는 말로써 그 불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의 이 불이 신약본문에서의 '성령의 불'을 말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구약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이제 그들에게 구원과 소망과 복된 미래를 허락하셨습니다. 제단의 불은 성령의 불이며 이 불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헌신의 불인 줄을 믿습니다. 날마다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나무를 준비하였던 제사장처럼 오늘 우리가 받은 성령을 결코 소멸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불이 소멸되는 것은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소멸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늘 성령이 충만하도록 우리의 기도와 사랑과 순종이라는 나무를 준비하여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성령의 불이 타오르는 삶(살전 5:16-19)은 우리를 영생의 길로 안내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는 더 이상 세상의 욕심과 타락한 인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삶은 스데반처럼 순교자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그 길은 고난과 환란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영광의 길입니다.

마지막에 우리는 영광의 길을 걷게 됩니다. 신앙생활에 지치고 힘들지라도 우리는 결코 주님을 포기하거나 성령의 불을 소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불, 성령의 불을 소멸치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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