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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기 (단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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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어느 대학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열 명의 학생이 한 방에 있게 합니다. 세 개의 길이가 다른 줄이 그려진 카드를 나누어줍니다. 선생이 가장 긴 줄을 지적하면 손을 들라고 합니다. 그런데 9명은 미리 지시를 받습니다. 두 번째로 긴 줄에서 손을 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만이 실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긴 줄을 선생이 지적합니다.

그러면 그 실험 대상자 학생이 손을 듭니다. 그리고는 주위를 살피지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은 것을 보고는 슬그머니 손을 내립니다. 유치원부터 고교생까지 대상자 중 75%의 학생이 그런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본다는 말입니다. 개인주의가 강한 미국이 이러니 우리나라에서는 어떨까요?

요즈음 우리나라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말을 하려면 서로 눈치를 봐야 합니다. 전에는 말 잘 못하면 어디론가 끌려가서 몹쓸 일을 당했습니다. 지금 북한이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말을 못해요. 특별히 공공장소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비판을 받지 않을까? 욕먹지 않을까 조심하는 것이지요.

1. 세상 분위기에 눌리지 말라

바벨론이 전 세계를 지배할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기원전 6세기로서 그 나라에 의해 유대가 망한 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바벨론의 방법을 따릅니다. 그래야 살 수 있었어요. 바벨론의 옷을 입고 말을 하고 그 문화대로 합니다. 안 그러면 주목을 받게 되니까요. 여기 하나님을 믿는 청년이 몇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에서 끌려간 포로들입니다.

바벨론 황제가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높이가 27미터 넓이가 2.7미터입니다. 평양에 있는 김일성 동상보다 높아요. 얼마나 많은 금입니까! 또한 얼마나 화려하게 조각했을까요. 보기만 해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지요. 거기다가 황제의 명령이 주어집니다. “누구든지 여기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 분위기를 그려보세요.

거기 절하면 유익이 있나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바벨론 사람 중에 하나가 되지요. 그 문화와 분위기로 흡수됩니다. 통치하기 쉽지요. 당시의 흐름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믿는 신 앞에 양이나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고 그것을 먹습니다. 그러니까 먹는 것부터 귀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경배하라는 십계명에 정면 대치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죄에 물든 세상을 무조건 따라가면 안 됩니다. 유대 청년들은 그것을 피하려고 채식만 먹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셔서 건강도 지혜도 형통도 모두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잘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강하고 아름답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상은 그렇지 않아요. 오늘날 우상이란 하나님 외의 다른 것들, 돈, 권력, 명예, 정치, 이념입니다. 우상에게 절하면 잘 되리라고 믿고들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귀신을 섬기면 얻는 게 없습니다. 오히려 거기 억압됩니다. 그래서 그 귀신의 성품을 가지게 됩니다. 더러워집니다. 귀신을 따르는 사회는 전체가 타락하게 됩니다.

유대 청년들은 고발당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황제 앞에 끌려갔습니다. 모든 권위의 정상에 있는 황제가 말합니다. “너희들이 일부러 그렇게 했느냐? 이 뜨거운 불에서 너희들의 신이 건져줄 것 같으냐?” 이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제국이 보는 가운데 대표자 앞에서 대답해야 합니다.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엔도 슈샤쿠의 <침묵>도 비슷한 내용을 줍니다. 천주교신자들이 처형을 당합니다. 아주 처참하게 죽였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의 초상화를 밟고 지나가면 살려줍니다. 한 신부가 그 초상화를 봅니다. 예수가 말하는 것 같았어요. “나를 밟고 가라. 내가 너를 위해 죽었고 너를 이해한다. 염려 말고 밟고 가라.”

그래서 신부는 밟고 지나갑니다. 사실 초상화 밟는 게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여전히 예수는 주가 되시고 나를 위해 죽었지 않습니까! 그 정도의 모욕을 용서 못하시는 하나님이 아니겠지요. 앞에 나온 유대 청년들도 그렇습니다. 우상을 마음으로부터 경배하는 게 아닙니다. 절하지 않으면 죽인다는데 그렇게 무가치하게 죽을 필요야 없지 않나요?

2. 모든 상황은 영적인 싸움이다

이런 일은 우리 문화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신입생 환영회건 신입사원 환영회건 죽도록 술을 먹입니다. 우리교회 전도사 한분은 해군장교로 입대를 했어요. 모두가 술을 권합니다. 신학대학 출신인데도요. 모두 거절 했습니다. 하루는 사령관 함장이 술을 받으라고 합니다. 도저히 거절할만한 분위기 아닙니다. 그 명령을 어디 거절하나요.

후르시쵸브가 권좌에 오른 뒤 전임자 스탈린을 죽도록 비난했습니다. 그의 실책 흉포 잔인함을 계속 외쳤어요. 하루는 청중 가운데서 누가 말합니다. “당신도 정치국원 아니요. 왜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오?” 후르시쵸브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어떤 놈이야?” 청중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어요. 그러자 말합니다. “내가 왜 그랬는지 이제 알았어요?”

이것이 세상입니다. 말하면 무서운 불이익이 오는 데 어찌 말하겠습니까? 세상에서 요구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왕따가 되고 미움을 받는 데 어찌 안 한다고 하겠습니까? 주일날 골프치러 안 나오면 높은 사람에게 찍히고 맙니다. 그래서 지방으로 발령을 내 버리고 맙니다. 이런 저런 방법으로 우상에게 절하라는 명령은 도처에서 들려오는 것입니다.

술 좀 받아먹으면 예수 믿지 못하나요? 예수 초상화를 밟으면 지옥가나요? 강제로 우상에게 절한다고 우상을 믿지도 않고 따르지 않는 데 우상 숭배입니까? 주일날 예배 안보고 놀러간다고 하나님이 벌을 주십니까? 그런 하나님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자비가 한없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쩨쩨하게 어떤 행동 하나로 벌주고 지옥 보내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술을 받으면 신자와 불신자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예수 초상화 밟으면 배교로 봅니다. 우상에게 절하면 그 섬긴다고 봅니다. 그래도 나만 속으로 안 그러면 된다고 말할 수 있나요? 그렇게 타협하면 양심이 깨끗해질 수 있나요? 행동 하나 하나는 자신의 신앙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어요. 자신부터 비굴하다고 비난해요.

유대 청년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 앞에 그리고 온 세상 전체 앞에 섰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명쾌합니다. 타협이 없어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서도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문제없이 건져내십니다.” 이들이 믿는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심을 문자 그대로 믿고 고백합니다.

만약 그 하나님이 돕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이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비록 죽더라도 아니 그냥 죽지 않고 모든 무서운 일을 당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분명히 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런 고백은 그냥 말로 그치는 게 아닙니다.

신비한 영적 힘을 줍니다. 또한 그러한 말과 행동을 통해서 신자는 업그레드가 됩니다. 아브람이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아브라함이 되듯,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람으로 일어나게 만듭니다. 이것이 용기입니다. 신자는 반드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 믿는 것 쉽습니다. 그러나 일상 삶 속에 신앙을 계속 고백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를 발하라

신자는 세상을 따르지 않습니다. 모나고 튀지 않아도 세상과 다릅니다. 오직 하나님을 따릅니다. 변하지 않는 진리를 따릅니다. 그러려면 얼마간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손해가 오고 명예가 실추될 수 있습니다. 모두 얼굴을 돌리고 심지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프러시아의 프레드릭 대제는 유명한 불신자였습니다. 어느날 축제에서 대신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야한 농담을 시작합니다. 대신들은 모두 배꼽을 잡고 웃어댔습니다. 폰 지아란트 장군만 제외하고요. 농담이 마쳐졌을 때 장군이 일어났습니다. “폐하, 제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아시지요. 저는 폐하 위해 목숨 걸고 38번 전쟁을 해 이겼습니다.”

“이제 저는 늙은이입니다. 조금 있으면 폐하께서 모독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됩니다. 그분이 저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주를 사랑하는 늙은이로서 폐하께 하직 인사를 올립니다.” 일순간에 장내는 조용해졌어요. 그리고 왕이 떨리는 소리를 말했어요. “폰 지아란트 장군, 용서해 주시오. 용서해 주시오.”

바벨론 황제도 유대청년들에게 사과합니다. 불 속을 거니는 제 삼의 인물을 본 겁니다. “너희들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몸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은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집행하는 병사들은 타죽었지만 그들은 불속에서도 살았어요. 하나님은 절대로 확실한 신앙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을 버리지 않아요.

분명한 입장 표명은 영적인 힘을 발하게 합니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엄을 줍니다. 상황을 흔들어 놓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말이나 행동은 영적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영적인 능력을 발하게 합니다. 말하는 사람에게 신비한 힘과 보호를 줍니다. 그것이 없다 해도 이기고도 남는 힘을 줍니다. 신자되게 합니다.

사령관의 술을 겸손히 거부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모두의 마음을 감동시켜줍니다. 압도당하게 만듭니다. 안 그래도 얼마나 영광스런 일입니까? 그러면 그 용기가 어디 있나요? 신자에게는 누구나 그 용기가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겁니다. 그러기에 두려워말라는 거예요. 이 사실을 믿으세요. “예수의 용기가 내게 있다. 내 영혼아. 힘을 발하라.”

스스로 어디 속했는지 확인하세요. 술집에 있나요? 예배시간에 골프장에 있어요? 세상 사람들 하는 대로 금신상에 절하는 겁니다. 수요일 금요일에 나와 경배하세요. 전도팀 위해 나서보세요. 주의 몸을 위해 벽돌 하나라도 쌓아보세요.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격려해 보세요. 하나님 편에 서 보세요. 목숨을 걸지 않아도 작은 용기부터 훈련해 보세요.

신자는 용기를 발해야 합니다. 용기를 선택하세요. 유대 청년들이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불 속에서도 살아나왔고 그들은 신의 아들이 되었어요. 이제 다음 주에는 특별 새벽기도회가 있습니다. 용기를 내 보시기 바랍니다. 복 받는 용기입니다. 좀 확실하게 자신을 표현해 보세요. 용기는 자기를 살리고 키우고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줍니다.
(김기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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