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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디모데 훈련(13):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딤전 6: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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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神崇拜와의 그 힘든 싸움>
어떤 선교사가 우상을 섬기는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상 섬기는 사람 하나가 선교사를 찾아와서 손으로 깎아 만든 우상 하나와 은전(銀錢) 하나를 탁자 위에 놓았습니다. 그 원주민은 종이 위에다가 '이방신'이라고 써서 우상 앞에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은전 앞에다가는 '기독교인들의 신,' 이렇게 써서 놓았습니다. 선교사가 놀라서 이유를 물었더니 그 원주민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독교인들의 삶을 조심스럽게 관찰해 봤는데 기독교인들은 한결같이 돈에 대하여 큰 애착을 가졌으며 무엇보다도 돈에 대하여 큰 소망을 거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이라는 책을 써서 청교도들의 근면성실이 자본주의의 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분명히 서구 기독교의 뚜렷한 물줄기는 성실하게 돈 버는 일을 적극 긍정하는 데 있습니다. 기독교가 청부론(淸富論)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아왔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돈이 혹시 우리의 신이 되어서 맘몬(MAMMON), 즉 물신(物神) 숭배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부자들에게 주는 경계의 말씀>
바울 사도는 딤전 6: 10절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돈 그 자체가 악의 뿌리가 아니라 돈에 팔려 있는 우리의 마음이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고 말씀한 것이지요. 오늘 본문 말씀은 디모데 전서의 결론부분인데 여기에서도 역시 부의 위험성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17-19절 말씀에 보면 부자들의 그릇된 태도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습니다.

우리 17-19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볼까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저는 이 말씀이 디모데 전서의 결론부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말썽이 많은 교회였는데 특히 부자들의 세상 자랑이 아주 심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소유한 물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기들이 유능해서 얻은 자기 소유일 뿐 아니라 천년만년 누리고 살 것처럼 믿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빈주먹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빈주먹으로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도무지 자족(AUTARKEIA)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이제 세상의 부귀영화를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사도 바울의 경고는 매우 분명합니다.

첫째로,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마음을 높이지 말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 번역이야말로 희랍원어인 'HYPEREPHANIA'에 가장 정확하게 부합하는 말입니다. 부자들이 자기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부 때문에 높은 마음을 갖고 교만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지요. 사실, 오늘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 많은 사람들은 흔히 마음이 부풀어져서 교만에 빠질 위험성이 그림자처럼 항상 따라다닙니다.

둘째로,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물로 풍성하게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 한 분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누리는 부귀영화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쉽게 사라지고 말, 안개처럼 덧없는 것입니다. 눅 12: 13-21에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부자가 많은 소출을 얻었습니다. 지금 있는 곳간도 충분한 데 다 허물어버리고 더 크게 짓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면서 독백으로 말합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께서 부자의 영혼을 데려가시면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물거품이 되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는 우리에게 거짓된 환상을 심어줍니다. 거짓된 위로, 거짓된 안전, 거짓된 행복을 심어줄 뿐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부귀영화는 하나님께서 주신 일시적인 선물일 뿐,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 진정한 안전,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세요. 선물은 선물을 주시는 원주인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니, 선물 그 자체가 아예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부, 우리의 소유라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 선물이라고 한다면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겸손해야지 선물을 받는 우리가 마음을 높이고 교만해서 안 됩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이 의지해야 할 대상은 자기의 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부를 선물로 주셔서 즐기도록 하시는, 부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셋째로,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를 주시는 것은 마음을 높여 과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욕심을 가지고 땅에 쌓으라는 뜻이 아니지요. 좋은 일 많이 하고 이웃에게 기꺼이 베풀며 살라는 은혜 때문입니다.

굉장히 부자이기는 하지만 늘 행복감을 찾지 못했던 사람 하나가 랍비에게 찾아갔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기쁨을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랍비는 이 사람을 창문 곁으로 데려가 창문 밖을 내다보라고 하면서 무엇이 보이는지 말하라고 했습니다. "남자들, 여자들, 어린이들, 노인들, 나무, 풀, 새, 하늘, 등등이 보입니다."

이번에는 거울로 데려가 거울을 쳐다보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보입니까?" "제 모습만 보이는데요." "그것 참 이상하지 않아요? 왜 창문이나 거울이나 똑같은 유리로 되어 있는데 보이는 것이 다를까요. 자, 중요한 것은 거울 뒤에 붙어 있는 수은이나 알루미늄과 같은 금속성분에 있습니다. 똑같이 투명한 유리지만 이와 같은 금속성분이 부착될 때 더 이상 밖을 내다볼 수 없고 자기 모습만 볼뿐이지요."

그렇습니다. 거울로 자기 얼굴만 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거울 뒤에 있는 금속성분을 걷어내고 투명한 유리창너머로 우리의 이웃들, 아름다운 우주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욕심이라는 금속성분, 이기심, 교만, 등등 우리의 이웃을 볼 수 없도록 만드는 일체의 장애물들을 걷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누리는 소유를 귀하고 아름다운 일을 위하여 베푸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 이렇게 자기의 소유를 좋은 일을 위하여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약속이 주어집니까? 19절 말씀을 보세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선한 일을 위하여 베푸는 일은 곧 자기의 미래를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쌓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쉽게 말해서 이 땅위에서 물질적인 부를 좋은 일을 위하여 함께 나눌 때 다가오는 천국에서 영적인 풍요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보상을 말하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천국의 보상이 물질적인 축복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보다 훨씬 더 존귀한 것, 즉 하나님의 참 생명에 들어가는 영적인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으로 보건대 세상의 물질로서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 사도는 15-16절에서 이 세상의 물질적인 부와 족히 비교가 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찬송합니다. 이 찬송시를 표준 새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정한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이시요,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이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오직 그 분만이 죽지 않으시고,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속에 계시고, 사람으로서는 본 일도 없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입니다. 그 분에게 존귀와 영원한 주권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유일무이성과 권능입니다. 이것은 모두 이 세상에 덧없이 사라지고 말 물질적인 부와 대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지가지 선물로 주시는 물질적인 부나 온갖 풍요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하신 분입니다. 온 우주의 통치자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생명은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나옵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선물에 불과한 물질에 헛된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확신입니다!

<물신숭배와의 선한 싸움을 향하여>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선한 싸움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실, 오늘 저의 설교 제목이 '선한 싸움을 싸우며'인데 부자들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 선한 싸움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딤전 6장 전체를 놓고 보면 분명히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11-12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여기에 선한 싸움의 세 가지 요점이 나타나 있습니다.

① 선한 싸움의 주체: 하나님의 사람
선한 싸움은 하나님의 사람이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까? 믿음의 사람이요 경건의 사람이지요. 돈을 사랑해서 돈에 노예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소유물을 자랑하고 마음을 높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헛된 재물에 소망을 두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우리가 누리는 일체의 것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만 참 소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일에 온통 마음이 빼앗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요, 세상의 사람이요, 육의 사람일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일체만물의 주인이 되셔서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의 싸움이 악한 싸움이 아니라 선한 싸움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더 존귀하게 여기고 그 분을 위하여 싸우는 싸움이 선한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으로 악한, 육적인 싸움이 아니라 선한, 영적 싸움을 싸울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② 선한 싸움의 방법: 피할 것은 피하고 쫓을 것은 쫓아야 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는 데에는 피할 것은 잘 피하고 쫓을 것은 잘 쫓을 수 있는 분별력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먼저 11절에 보면 '이것들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들'이란 바로 위의 9-10절에서 하신 말씀, 즉 돈을 사랑함으로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싸움이 물질에 대한 탐욕과 싸우는 것입니다! 물질신(物質神)과 싸우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일체의 물질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는데 우리는 원주인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대신에 그 선물을 숭배하고 자기를 높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움에 있어서 이것을 피해야 합니다! 물신숭배와의 싸움, 바로 여기에서 선한 싸움의 승패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쫓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6가지 덕을 열거했습니다. 의(righteousness)와 경건(godliness), 믿음(faith), 사랑(love), 인내(endurance), 온유(gentleness)를 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 덕은 모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경건하게 잘 섬겨야 한다는 것과 아래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많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이 더 귀하기 때문에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이웃과 더불어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선하고 거룩하고 고상한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③ 선한 싸움의 결과: 영생을 얻게 됩니다.
선한 싸움을 끝까지 잘 싸워 이기면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이 땅위에서 누리는 기쁨은 일시적인 것이고 언젠가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썩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회원정보 보기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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