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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시는 분의 권세 1 (마 8: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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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제자로서의 자세를 제자도라 말합니다. 이러한 제자도를 간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감이 우리 신앙인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와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태는 이러한 제자도의 자세를 바르게 간직하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베푸신 이적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서 먼저 극복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치유의 역사(work)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들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자고 명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요청에 응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어떤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시면서 거절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성공에 의지하여서 많은 추종자를 모으려고 노력하지 않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의지해서 그 뒤를 따라 배를 탄 제자들은 심한 풍랑으로 죽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뒤를 따랐지만, 그 결과는 안정된 삶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죽을 위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부르짖었을 때에,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실 때에 풍랑이 잔잔해지게 되는 것을 제자들은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광경 앞에서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 예수님께  다시 한 번 놀랍니다.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뒤를 따르게 된 제자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권능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더욱 분명하게 함으로,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데 부족함이 없어야 할 줄 압니다.

오늘은 귀신들린 두 사람을 고치시는 주님의 모습을 증거하는 성경말씀을 보게 됩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던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주님의 모습에 이어서 오늘의 말씀 역시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 다음에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마태복음을 쓴 사람의 나름대로의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세력을 제압하는 예수님의 권위를 보여줍니다. 바다의 사나운 흔들림은 외적으로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혼돈의 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귀신들은 우리 사람들에게 내적으로 임하여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불가사의한 악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최고의 대리자로서 나타나고, 예수님의 권능은 악의 권능을 압도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던 풍랑을 잔잔케 한 경우와 오늘의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을 볼 때에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일들은 초자연적인 기적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일이나, 귀신을 쫓아내신 일은 그야말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습에는 어떤 궁극적 차이도 있습니다. 풍랑과 귀신은 물론 초자연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풍랑은 어떤 비인격적 대상이라는 것이고, 귀신은 인격적인 대상이라는 점에서 궁극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악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는 비인격적인 힘인 것입니다. 이러한 악은 물론 때로는 자연의 현상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광대한 힘이 있지만 이러한 힘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즉, 이러한 힘 앞에서는 그저 피한다든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면 해를 입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토네이도(Tornado) 같은 경우는 그 위력이 대단하지만, 그 범위에서만 벗어나면 해를 입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인격적인 악에 어떤 인격적인 요소가 가미된다면, 이는 참으로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방영된 영화중에 “I - Robot”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로봇에 인간과 같은 인격이 가미되었을 때의 그 힘과 능력을 상상적으로 그린 이야기입니다. 또한 전쟁과 같은 경우도 일종의 여기에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그저 피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람이라는 인격적인 바탕에 이러한 악의 요소가 가미된다면 얼마나 위험한 존재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옛말에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바로 사람”이란 말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초자연적인 능력에 인격적 요소까지 가미된다면, 그 능력이 얼마나 더 하겠느냐 하는 것은 상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격이 이러한 악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자기 점검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이러한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얼마든지 이용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여 은 30에 팔아버린 가룟 유다를 가리켜 요한복음 저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 13:26~27). 이렇게 사탄은 우리의 심령과 인격 속에 들어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애를 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탄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귀신은 그 능력에 있어서 자연재해와는 차원이 다른 인격적인 요소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각시켜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자연의 재해와 같은 비인격적인 모습을 제거하는 데에도 나타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귀신과 같은 인격적인 모습에게도 그 능력이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러한 귀신까지도 제어하시고 쫓아내시는 그러한 능력과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분은 바로 이러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알 필요가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귀신의 이야기는 막 5장에는 좀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러한 귀신의 능력이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귀신들린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면서, 그 힘이 무척 세어서 쇠사슬로 묶어놓아도 금방 끊을 정도로 힘이 세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기회만 되면 이 사람을 꼼짝 못하도록 쇠사슬과 고랑으로 매었지만, 어느 사이에 이러한 쇠사슬과 고랑을 깨뜨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 늘 괴성을 지르고, 자기 몸을 돌로 상하게 하는 그러한 일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공포감과 혐오감을 주는 일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나고 무시무시한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결국 자기의 실체를 밝히는데, 자기 이름을 “군대”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군대”라는 말은 로마의 군대 단위로 “레기온(region)”이라는 단위인데, 약 6000명으로 구성된 군대 단위를 말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 사람의 몸속에는 수많은 귀신이 들어가 있어서 막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이상 막 5:1-10 참조).

그런데, 마태는 이렇게 귀신들린 사람이 하나가 아닌 둘이라고 소개를 합니다(28절). 하나가 아닌 둘이기 때문에 이러한 귀신의 모습은 그 끔찍함과 막강함이 더 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간 1학년 때였습니다. 그 당시, 아이들 중에는 힘자랑하는 아이들이 꽤 있어서 걸핏하면 싸움이 일어나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싸움을 제일 잘하느냐는 문제로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반에는 얼굴이 똑같이 생긴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싸움을 잘 하는 아이들이라도 이 쌍둥이에게는 당하질 못했습니다. 이 쌍둥이 아이들과 싸우려하면, 이 쌍둥이가 양쪽에서 덤벼들기 때문에 누가누군지 헷갈려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쌍둥이 아이들이 반에서 싸움을 제일 잘 하는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귀신들린 자의 모습도 마치 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다”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신들린 이 두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때”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29절에 나옵니다. “이에 저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는 더더군다나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보통 사람들은 10분 후의 일도 모르는, 이른바 “때”를 모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이 귀신들린 자가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것은 이러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막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이렇게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 아는 귀신들은 이제 자기들의 때가 다 된 것을 알고, 예수님께 자기들을 돼지 떼에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에 허락하니, 이들이 돼지 떼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귀신이 들어가게 된 이 돼지 떼는 광란을 일으켜 모두 바다 속으로 들어가 빠져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하게 돼지 치던 자들은 동네로 들어가 이 모든 일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놀라 예수님을 만나려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더러 그 지방에서 떠나가 주시기를 간청하는 모습으로 오늘 본문은 끝이 납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동시적으로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이 능력을 체험한 가다라 지역의 주민들이 예수님께 가졌던 반응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에게는 이러한 놀라운 권능이 있으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는 어떤 대가가 치러져야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를 가다라 지역 주민들이 예수님의 이러한 놀라운 권세를 보고 놀라면서도, 이러한 예수님 때문에 입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생각하고는 이 예수님더러 자기들 마을에서 나가달라고 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 현대인 크리스천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의 한 모순적인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신학자 더글라스 헤어(Douglus R. A. Haire)는 그의 마태복음 주석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타나면 득과 실이 따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으로 인하여 물질주의의 귀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참으로 득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수반되는 손실도 현실적으로 있습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이방인의 돼지 떼가 죽는 것을 보고 웃었을지 모르지만, 그 반면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이 상세한 이야기 속에서 그들의 이교도 친족들에게서 소외당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경제적 안정을 상실하게 됨을 상징적으로 언급하는 것으로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어떤 이들에게는 부의 자발적인 포기를 의미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 역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데 있어서의 자세를 생각해 보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따르도록 불러주신 이 예수님은 이러한 풍랑이라는 자연의 힘과 귀신이라는 악의 세력을 능히 제압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이러한 능력과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다든지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뒤를 온전하게 따라가기란 불가능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상시의 아무런 일이 없을 때에는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천재지변이나 인재지변 같은 위기가 닥치게 된다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일은 쉽게 포기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일에는 물질적인 가치관이 변해야 한다는 사실도 올바른 제자도의 귀중한 모습인 것을 알고 또 믿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물질주의의 노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꼭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물질주의의 가치관이 우리 인간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현대 시대에 있어서,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아니하면 물질주의라는 거대한 귀신에 사로잡히게 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게 되고, 돈으로 사람을 이용하기도 하고, 돈으로 사람을 힘들게 하게도 하고,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려고 이용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물질을 하나님께서 주신 청지기적 가치로 대할 수 있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지닐 때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도의 모습을 바르게 지켜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모습이 이렇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모습이 되도록 늘 성령의 조명아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를 개방하며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풍랑을 잠잠케 할 때나, 귀신들린 자를 해방시키실 때에도 말씀 한 마디로 그 일을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권능이 담겨 있음을 알고,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를 개방하여, 그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감으로 제자로서의 삶을 온전하게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저희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나아가고자 오늘도 말씀으로 주님의 모습과 그 뜻을 뵙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으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귀신을 내 쫓으신 주님의 모습을 염두에 두면서, 저희들도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는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이 누구신 줄 알고 있습니다. 주의 종 야고보는 이러한 사실은 귀신들도 알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온전히 좇지 못하는 자들이 되지 아니하도록 주의 성령께서 저희들을 늘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특히 물질주의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물질을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서 선하게 관리할지언정,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아니하도록 저희들을 인도하시고 지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노강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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