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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기 앞에서 (창 32: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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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난, 가난, 갈등, 질병, 상처, 실패. 이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이것들을 만나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불행하게도 이것들을 피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실제로 이것들이 우리 인생에 오면 이것은 불행이 되고, 몇몇 사람들은 인생에서 중도하차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닥치면 우리는 이것을 ‘위기’라고 부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의문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한다면서 왜 우리에게 이러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일명 나병이라 불리는 ‘한센시’ 병입니다. 이것의 가장 큰 특징은 신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필립 얀시는 1950년대까지도 병의 이러한 특징을 몰랐다고 합니다. 나병환자의 흉한 신체는 신체적으로 감각을 느끼지 못해서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나병환자들은 언제 눈을 깜빡여야 하는지 모릅니다. 신경에서 뇌에 이러한 신호를 전달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될 때, 눈을 계속 뜨고 있다가 망막이 말라서 실명이 되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나병 환자들이 좁은 신발을 신어서 너무 꽉 죄는 바람에 발가락이 떨어져나가는데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발가락을 다시 복구하기가 힘든 경우입니다. 따라서 고통을 못 느끼는 것이야말로, 나병의 가장 큰 위험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느낄 때, ‘아! 내가 이렇게 하면 안되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변화하여야 하고 달라져야 함을 압니다. 따라서 고통이란 회복해야 할 부분과 그 시점을 알려주는 하나의 신호(Signal)가 됩니다. 우리를 바르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삶의 신호등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존재와 은혜를 아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이렇게 볼 때 고통은 더 이상 우리에게 저주스럽거나 쓸데없는 것만이 아닙니다.

고통을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가 우리의 인생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위기’가 닥쳤다고 할 때, 진정한 위기란 가난이나 질병이나 고통이 아닙니다. 진정한 위기란 이러한 고통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길 원하시는가를 깨닫지 못하고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전에 의하면 위기란 ‘중요한 전환점(Turning Point)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위기 상황에서의 고통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일종의 중요한 신호수단이자 통로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 있어 복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는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복 있는 자가 되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을 만들어 가신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복된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해서 고통 받는 인생의 과정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야곱을 더 이상 예전처럼 살게 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으로서 야곱을 변화 시킨 도구가 바로 변화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 어려운 일이 다가왔다고 해서 그것을 ‘위기’라고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위기를 주셨다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변화되기를 원하셨는지 깨달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야곱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신호(sign)로 해석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야곱을 홀로 두셨습니다.

야곱의 소유와 사람들이 얍복 나루를 모두 건너고 홀로 남아 밤을 맞이하고 있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장자의 축복을 빼앗아 도망갔던 사람입니다. 벌써 20년 전의 일입니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서 자신의 재산을 많이 불려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20년 전의 고통을 잊지 못한 야곱의 형 에서가 4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야곱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야곱은 꾀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에서에게 줄 선물을 제일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유를 세웁니다. 그 뒤에 자신의 자녀들과 아내를 보냅니다. 그들이 모두 얍복 나루를 건너갔을 때, 야곱은 홀로 강 이편에 남아서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고독이었습니다. 홀로 있는 것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도 많았고, 자식도 많았고 재산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자신의 존재를 설명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늘 바쁘게 살았습니다. 많은 재산을 일구어 내야하고 가족 일도 돌보아야 했습니다. 수많은 문제들 속에서도 승승장구하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밤은 야곱에게 어떤 밤입니까? 어떤 수를 써도 문제가 해결될 방법이 보이지 않는 밤입니다. 아무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외로운 밤에, 야곱은 홀로 남겨져 있습니다. 야곱에게는 육축도 종도 아내도 아이도 많았으나, 이들을 다 보내고 야곱은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진실한 모습으로 홀로 서서 진지하게 이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람이 홀로 있을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떻게 살아 왔는가 등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일과 사람 사이에 있을 때는, 일과 사람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여러 가지 이야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때로는 내면의 욕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원하느냐, 이것을 하라’  등의 소리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정 들어야 할 음성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 말씀은 우리 길의 빛이 되고 우리 발의 등이 됩니다. 한발 한발 디딜 때에, 한발만 잘못 디뎌도 헛디뎌서 넘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발에 등이 있으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발의 등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인생을 ‘방황한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이 모두 헛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평소에는 세상의 소리, 자신의 욕심의 소리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음성은 비인격적으로 크게 다가오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우상과 싸워서 이길 때, 황후 이세벨의 위협을 받아서 지쳐서 탈진해 있을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호렙산의 동굴에 들어가게 합니다. 천둥소리나 큰 바람소리 중에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숨을 죽이고 고요히 홀로 조용히 있을 때,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낙심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음성은 새로운 미래를 여는 생명의 언어였습니다. 지친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음성은 새 힘을 주는 능력의 말씀이었습니다. 혼돈에 빠진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음성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에 대한 놀라운 지혜의 말씀이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의 삶과 사역이 더욱 커지고 복되어 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정욕의 이야기와 환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메시지에 지쳐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생의 광야로 몰아넣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조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조용하고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을 변화시킬 때에 야곱을 항상 홀로 조용한 곳, 인생의 밤중으로 몰아 넣으시고 하나님의 음성만 듣게 하십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키십니다.

여러분, 외로우십니까? 가족들이나 지식이나 재산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우십니까? 사랑하는 이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시베리아 벌판처럼 시리십니까? 어디에서 나의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습니까? 어떤 질병이나 가족간의 갈등으로 홀로 있는 사람처럼 지쳐있고 낙심해 있습니까? 당신에게 세상의 언어가 아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을 인생의 광야로 몰아넣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이 ‘진정한 위기’라고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 나는 이대로 사는 것이 좋다고 아무런 자각 없이 인생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것이 진정한 위기입니다. 우리가 외롭고 고독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새로운 축복의 통로입니다. 낙심하고 절망하고 죽을 생각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영혼의 문을 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서, 듣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자아를 깨뜨리셨습니다.

32장 52절을 보면,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부러뜨립니다. 환도뼈는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뼈인데, 이것이 위골 되어서 야곱은 나머지 평생을 절고 다닙니다. 여기서 환도뼈는 인간의 생명과 힘의 상징입니다. 오늘날 야곱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힘, 야곱을 야곱되게 하고 야곱을 지금까지 있게 한 지혜나 경험의 힘을 하나님께서 꺾으신 것입니다.

자아는 ‘내가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지,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강남에 아파트 한 채는 있어야 이 나라에서 부자 축에 드는 것이라는 등의 생각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으로 하여금 야곱이 되게 했던 것을 꺾으신 것이 이런 자아입니다. 야곱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합니다. 야곱을 성공시켰던 지혜나 물질, 힘 같은 모든 것을 야곱으로 하여금 지탱하지 못하도록 꺾으셨습니다.

내 계획과 이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꺾여졌을 때, 사람들은 낙망하고 실망하게 됩니다. 자아가 무너지는 것은 ‘내 인생은 이렇게 살면 되’ 하는 인생의 철학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시카고 대학 병원에 있을 때, 한 자매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조선일보에서 기자를 했던 자매였습니다. 이 자매는 불교 신자입니다. 그녀가 말하길, 인생은 게을러서 못하는 사람들 천지라고 합니다. 자신의 지금까지 시험 쳐서 합격 못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자아관이 있었습니다. 이 자매가 결혼해서 미국을 오게 되었는데, 뜻밖의 상황에 직면합니다. 자신의 남편을 어떻게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자식을 낳고 싶은데, 자궁에 혹이 생겨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어려움에 처합니다. 그때에 그 자매는 ‘인생이 물질이나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내 인생에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어떤 것이 있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때쯤 이 자매는 저를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자아가 깨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자아를 깨뜨리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정말 좋고 귀한 것을 주고 싶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질이나 명예, 자존심, 주관, 소신이 최고인줄 알고 이것만 붙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계속 붙들고 있으면 이것이 그 사람을 죽이게 되는 것임을 알고 계시기에 우리에게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물질이나 명예가 좋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모두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선순위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 영원한 것을 주고 싶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무언가를 줄 때에는, 일시적인 것 보다는 오래 가는 가치 있는 것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더욱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 일시적인 것을 빼앗고 가치 있는 것을 주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것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옳다고 믿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자아는 절대 깨어지지 않습니다. 자아가 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솔개의 수명은 70년 입니다. 솔개가 40년쯤 살면, 입과 발톱이 날카로움을 잃고 무뎌지고, 털은 점점 불필요하게 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솔개 특유의 날카로움과 날쌤이 없습니다. 이 때 솔개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에 대한 결단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살 것이라고 결심한 솔개는 높은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서 둥지를 틀고 바위에 자신의 부리를 사정없이 박는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피투성이가 되어도 부리가 완전히 깨질 때까지 계속해서 박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부리가 새로이 자라는데 2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 때까지 솔개는 마음껏 먹지도 못하고 고통과 아픔 가운데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부리가 다 자라고 나면, 날카로워진 부리를 가지고 자신의 무뎌진 발톱을 모두 뽑는다고 합니다. 발톱이 새로이 나는데 또다시 2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발톱이 다 나고 나면, 발톱과 부리를 가지고 털을 다 뽑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깃털이 다 뽑힌 솔개는 볼품 없고 나약하고 초라해져 보입니다. 2개월쯤 지나면 솔개에게 새로운 깃털이 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난의 과정이 5~6개월쯤 지나면, 솔개는 새로이 태어나 남은 30년을 옛날처럼 찬란하고 의미 있게 살아간다고 조류학자들은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일평생 살아온 것을 깨는 것은 아픈 일입니다. 고통스럽고 힘들고 지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깨뜨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좋고 귀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것이 아무리 귀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자녀와 아내와 물질이 최고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의 환도뼈를 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인생은 자신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라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중심적이고 정욕적이며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깨뜨려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십니다.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이 나의 노력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하십니다. 지금까지 몰랐던 인생의 새로운 세계와 철학이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깨어진 자아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은 야곱을 만나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아가 깨어지셨습니까? 사업이 망해서 마음이 아픕니까? 정성껏 기른 자녀가 당신을 실망시킵니까?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실패의 모습으로 서 계십니까? 산다는 것이 이것을 붙들고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깨달음이 오셨습니까?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최선이 끝난 그 자리,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자리 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려오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길이 무엇인지,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는 시점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새롭게 변화되어야 할 존재임을 알려주시고 변화시켜 주십니다. 고통은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경고이자 신호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여전히 야곱을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외롭고 깨어질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누가 나와 함께 하는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32장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십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삶의 신분이 바뀌거나 삶의 인격의 극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살아가던 야곱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야곱은 에서의 발 뒤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인간적인 쾌락과 욕망만 쫓아 살았습니다. 그랬던 야곱이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고 걸어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발 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자’라는 의미를 가진 야곱이라는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십니다. 이스라엘을 원어로 해석해보면,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 의식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을 안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생각해보면 겁이 납니다. 이들에게는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어려울 때마다 엎드린 분들은 보면, 곤고하고 어려울 때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살아 계시며 내가 기도할 때 들으신다는 신앙적 고백이 있는 분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확실히 가지고 있으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고통이나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없다는 믿음을 품고 삽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자신을 유혹하는 여인을 뿌리칩니다. 요셉은 바로왕 앞에 갔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간직하고 지켰던 자신의 삶을 당당히 선포하며 자신이 감옥에 갈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알립니다. 하나님이 그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데도 안 보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대로, 경험대로 살아갑니다.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돈과 정욕만 있으면 됩니다. 어리석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가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살펴봅니다.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분별력이 있습니다.

저는 집에 가면 아내에게 교회일을 하면서 속상했던 일이 있으면 잘 털어놓는 편입니다. 다른 곳에는 털어둘 곳이 별달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내가 조용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교회일 하면서 속상했던 일들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데요, 약간 걱정이 되는 건 우리 딸 지연이가 식탁에서 당신이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을 듣고 마음속에 쌓아두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예요’라고 말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나도 모르게 아이가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 없이 말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딸의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아버지인데, 어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살수 있는 믿음이 되겠습니까? 야곱이 절뚝거릴 때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자각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회복하는 속도가 굉장히 빠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는데,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는 분리되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서 자신의 아들을 죽여서 우리와 죄 가운데 함께 거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조그만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구나, 나를 돌아보지 않으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절망합니다. 조금만 잘되면 우쭐대고 교만하게 자신을 자랑합니다.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은, 내게 주신 축복을 가지고 어떻게 남을 섬길지 고민합니다. 남이 갖지 않은 축복을 주신 것의 사명을 알고, 자신의 것을 남에게 나누어주고 봉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려움과 고난 속에 있어도, 다윗처럼 임재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냅니다.

여러분, 야곱의 환골뼈는 위골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임재 의식을 심어주셨습니다. 야곱의 인생관이 여기서부터 크게 바뀝니다. 하나님이 이 자리에 계심을 믿습니까? 믿음 없이 예배를 드리면, 예배의 구경꾼이 되고 맙니다. 기도할 때, 회개하지 않습니다. 목사 설교나 성가대의 찬송가, 꽃꽃이를 평가합니다.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이 드린 습관적인 예배라면, 회개하십시오. 그 인생 속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죽은 예배를 드린 인생 속에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직분이 있다고 오래 신앙생활 했다고 핑계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체험하고, 내가 일평생 옳다고 생각한 자아를 무너뜨리고 다시금 하나님을 붙드는 자가 되십시오. 찬송 속에 임재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십시오. 찬송 시간에 주보보고, 기도시간에 부스럭거리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저도 예배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임재하심에 대해서 의심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믿음의 흔적들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일이 오면 그것들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사람임을 하나님께 고백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연약한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부족한 인간들이 거대한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깨어지고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가 계시기에 나도 존귀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함부로 죄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존감과 정체성이 있습니다. 인순이가 불렀던 ‘사랑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많이 힘들었나요. 무엇을 갖고 무엇을 버렸나요. 처음 시작했던 때가 너무 멀리 있어요. 사랑과 꿈과 희망은 어디에 있나요. 사랑, 사랑, 떠나간 줄 알았나요, 잊혀진 줄 알았나요. 아직 여기 있어요. 사랑, 사랑, 여기까지 왔잖아요. 그전처럼 하면 되요. 항상 여기 있어요. 사랑, 사랑, 이미 알고 있잖아요. 떠나지 않는 사랑과 자유로움 속에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번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적은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떠났다고 탄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49장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49:14-15)’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8장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20)’

여러분, 우리가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자세가 무엇입니까? 야곱을 통해서 바라보십시오.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을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자신을 축복해줄 사람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가진 소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셔야 내가 살아갈 수 있다며,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리고 지금 바로 이순간, 내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하나님의 자녀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며 절박하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야곱은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에 주의 음성을 듣고 주의 길을 걸어 갔던, 그리하여 세상의 복이 아닌 하나님의 복을 누린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수많은 문제 앞에 서 계신 줄 압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마음은 울고 있는 사람도 많으실 겁니다. 더 이상 인생을 살아갈 수 없어서 주저앉아버린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것이 위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위기는 이 앞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삶의 자리에 내 삶이 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내 삶의 자리가 너무 멀리 와 있다면, 주의 음성을 듣는 자리로 가십시오. 내일 새벽부터 시작되는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우리를 인도해주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기 앞에 서 계십니까? 진정한 위기가 무엇인지 아십시오. 그리고 그 위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는 축복의 문을 열어가는 주님의 자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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