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막 7:24~30)

  • 잡초 잡초
  • 471
  • 0

첨부 1


우리가 한 세상 살아가노라면 우리 자신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경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소용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사람들은 여러 가지 행태를 보여줍니다. 자포자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합니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기사에 보니 한국인 가운데 자살하는 사람이 1년 평균 만900여명, 하루에 36명. 1분30초당 1명꼴이라고 합니다.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4위에 해당하며, 한국인 전체 사망원인 중 자살이 5번째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죽 살기가 힘들면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할까요? 사람은 강한 척해도 사실은 파스칼이 말한 대로 물 한 방울로도 죽일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절망스러운 형편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믿음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사건들을 수없이 대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절망적인 형편에 처한 한 여자가 예수님을 만나 문제를 해결 받은 은혜로운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지방을 벗어나서 두로 지경으로 가셨을 때였습니다. 헬라인으로서 수로보니게 족속인 한 여자가 찾아와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불쌍한 여자를 매우 냉정하게 대하십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개처럼 멸시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주님께서 이 여자를 개처럼 여기셨다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그 여자가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여자는 주님의 냉정한 태도에 조금도 괘념치 아니하고 말하기를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했습니다.

여자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니, 그 시로 그 여자의 딸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시간 저는  수로보니게 여자를 통해서 ‘주님의 은총을 받는 길’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주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주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이 여자의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다”고 했습니다. 귀신은 다 사악하여 귀신 들리면 무참하게 인격을 유린당합니다. 몸과 마음이 병들고, 제 생각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귀신이 시키는 대로 말도 하고 행동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귀신 들린 것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스로보니게 여자의 딸과 같이 흉악히 귀신 들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정도가 좀 가벼운 사람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3절로 4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44)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에 대하여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막 16L9)고 했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렸다 함은 귀신들린 중에서 가장 최악의 상태를 말합니다. 아마도 스로보니게 여자의 딸이 이와 같았던 것 같습니다. 귀신이 들리면 인격이 파탄되어 포악하게 발광을 합니다. 간질 증상을 보이기도 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 들기도 합니다(마 17:15).

귀신 들려서 소경이 되고 벙어리가 되거나 몸이 마비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요 10:10)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사람은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귀신 들린 딸을 둔 스로보니게 여자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이 여자는 귀가 번쩍 뜨이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말로만 듣던 예수께서 두로 지방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 여자는 자기 딸을 고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음을 감지했습니다. 즉시로 수소문해서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가서 그 발 앞에 엎드려서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애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의 은총을 입으려면 먼저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병자가 고침을 받으려면 의사를 만나러 가야 하듯이, 죄인이 죄 사함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불신 이웃을 교회로 인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구원 받는 길은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지극히 쉽고 간단합니다. 로마서 10장 9절로 10절에 이르기를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원 받는 데 우리의 공로는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불신 이웃이 주님을 믿게 되려면 먼저 믿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전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했습니다(롬 10:14).

주님께서는 먼저 믿은 우리에게 생명의 주님을 전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불신 이웃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저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 오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인생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았지만, 한 번 만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설령 면담을 허락 받았더라도 청와대 입구서부터 몸수색을 받아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면담을 마쳐야 합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를 만나는 데는 이 같은 절차가 필요 없습니다. 무슨 사회적인 신분이나 자격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는 누구나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파격적인 은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환대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스로보니게 여자 역시 주님께 나아와서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침 받았습니다. 혹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청을 거절하셨지 않느냐고 반문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 주님께서 이 여자의 요구를 거절하신 것은 그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조금만 통찰력을 발휘한다면, 주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신 이유가 이 여자에게 은총을 베푸시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으로 이 여자의 귀신들린 딸을 구하시려고 두로 지방으로 발걸음을 옮기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삶에 지친 우리를 도와주시기 원하십니다. 문제를 만났거든 혼자 고민하지 말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가기로 발걸음을 옮길 때 이미 문제 해결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주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스로보니게 여자는 주님 앞에 엎드려서 자기 딸을 구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이 여자가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물러가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그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믿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의 응답을 믿지도 않으면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고 허공을 향하여 말하는 독백에 불과합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 우상 앞에서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성껏 빌어도 우상이 복을 내려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와 대결했던 450인의 바알의 선지자들을 보세요. 그들은 제단 위에 송아지를 제물로 올려놓고 종일토록 단 주위를 돌면서 “바알이여, 바알이여, 응답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나중에는 창과 칼로 자기들의 몸에 상처를 입혀 피를 흘리면서 열광적으로 바알의 이름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바알의 응답은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알이 우상에 불과함을 생각할 때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응답 받는 기도를 하려면 먼저 기도를 받는 대상을 올바로 정해야 합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지쳐서 물러나자 엘리야 선지자가 나서서 하늘을 우러러 크게 외쳤습니다. “36)…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그러자 즉시로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과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자는 거짓 신에게 기도한 것인데 반해 후자는 참 신에게 기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상천하지에 신은 오직 성경에 계시하신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허상에게 구하므로 응답을 받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반드시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스로보니게 여자는 예수님을 보고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이는 그가 기도의 대상을 올바로 선정했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기도가 응답받은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은 범사에 많지만, 그 중에서도 기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문제를 만나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그 대신 인간적인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기도가 약자의 호소로 보일지 모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7)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우리에게 힘을 주는 말씀입니까! 그런즉 기도하십시오. 기도할 때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클지라도 하등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고도 남은 부스러기를 열 두 광주리에 차도록 거두셨으며, “고요하라, 잠잠하라” 한 말씀에 바다의 거센 풍랑을 잔잔케 하신 주님이십니다.

기도는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언제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 성도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라도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3)라는 책망을 받지 말고, 주님께 나아가 열심히 간구함으로써 풍성한 응답을 받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주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주님께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스로보니게 여자는 귀신 들려 고생하는 딸을 고치기까지 여러 가지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힘든 시험은 주님의 무관심과 냉담한 태도였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이 여자가 집에 계신 주님을 찾아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로 지경에 들어가셨을 때 이 여자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도움을 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여자는 그 지경에서 나와 외치기를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나중에는 제자들이 청하기를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냉담한 반응입니까? 그러는 사이에 여자가 와서 예수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하니, 대답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쯤 되면,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자존심이 상해서 일어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님 곁을 떠났을는지도 모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나와서 간구하는 여자에게 너무나 가혹한 대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더구나 사람을 보고 “개”라고 하다니, 아무리 이방인이지만 모욕감을 느낄 법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주님의 냉담한 태도와 무례한 언사를 노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낙담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여자는 주님의 말씀에 화답하기를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이 여자는 시험에 들지 않고 그처럼 놀라운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스로보니게 여자가 예수님의 선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으므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노엽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기도하다가 낙심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지 못하고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오래 기도했는데도 아무 응답이 없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나 보다” 생각하고 중도에서 물러갑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자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하되 스로보니게 여자처럼 어떤 낙심할만한 일이 생길지라도 주님의 선하심을 믿고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난관이 생길수록 더욱 매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주님의 은총이 얼마나 귀한 줄을 알았습니다. 그는 떡덩이를 달라고 하지 않고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라도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받기만 하면 흉악히 귀신 들린 그의 딸이 온전하게 회복될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어떠한 시험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의 은혜를 소중하게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값싼 은혜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주님의 은혜치고 부스러기 은혜란 있을 수 없습니다.

스로보니게 여자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그 말에 감탄하셨습니다. 여자에게 이르시기를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자의 믿음의 대답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이 여자는 주님의 시험을 당당하게 통과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입을 조심해야 합니다.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부정적인 말, 불신앙적인 말이 나오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우리 입으로 낸 말이 우리 자신을 얽어맵니다. 원망, 불평을 내면 그것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얽어매서 사태를 올바르게 대처해 나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반면에 우리가 입으로 감사하고 긍정적인 믿음의 말을 하면 그로 인해 우리의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어서 어려움을 너끈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는 자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담대한 말씀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 입에서 이와 같은 믿음의 말이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스로보니게 여자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이 여자는 주님께로부터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삶에 시련이 다가왔습니까? 성도님들의 믿음을 주님 앞에 나타내 보이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역경의 때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으십시오. 축복은 위기의 가면을 쓰고 다가온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나아간다면 얼마든지 위기를 축복의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역경을 이겨낼 힘이 없다고 낙심할 것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오히려 우리 자신의 부족과 약함을 깊이 자각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약함을 알 때 비로소 주님만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지만, 주님의 능력은 무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주님의 능력이 연약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심으로 어떠한 시련도 능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많은 경험을 통해서 터득했으므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즉 다가오는 시험에 굴복하지 말고 그럴 때일수록 더욱 믿음으로 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스로보니게 여자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그 믿음으로 주님의 은총을 받아 누렸습니다. 그는 귀신에게 사로잡힌 딸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때 결단을 내리고 즉각적으로 주님을 찾아 왔습니다. 도중에 낙심할 일을 만났으나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모든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드디어 그의 딸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가니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의 암담하고 절망적인 인생을 밝고 소망 찬 인생으로 바꾸어주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동일하신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믿는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고생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부요하심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한 인생이 아니라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원하실 뿐 아니라, 친히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와 저주와 죽음을 청산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복되고 은혜로운 결과를 믿음으로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를 위해 날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시기 바랍니다. 늘 깨어서 기도하십시오. 다가오는 시험과 난관을 믿음으로 이기십시오. 그리하여 날마다 주님의 은총을 힘입어 합력성선의 삶을 살 뿐 아니라, 일평생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