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길(2) (골 4:5-6)

  • 잡초 잡초
  • 260
  • 0

첨부 1


< 예수 안에 있어야 행복합니다 >

서울 강남에 사는 한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의 아내는 원래 샘이 많고 욕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작은 월급으로는 아내를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가끔 친구 집에 갔다가 좋은 것을 보고 오면 그날 저녁부터 짜증과 바가지가 시작되고 엄청나게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내에게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한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평생 불평하는 아내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자신의 처지가 정말 비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아랫집 사람의 인도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친구를 만나는 횟수가 급격히 줄고, 가정을 지키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더 감사한 것은 아내가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가정에 관심을 더 많이 가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남자들은 아내가 교회에 나가면 가정을 소홀히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한 이단 교회에 나가면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교회에 나가서 정상적인 말씀 교육을 받으면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정상적인 목사라면 어느 목사가 가정을 소홀히 하라고 가르치겠습니까? 다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남편을 존중하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나 바람을 쐬고 싶은 속성이 있습니다. 가정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그 바람은 점차 거세지고 있습니다. 그 바람을 옛날처럼 억지로 막으려 하면 감정은 더 상하고, 마음은 더 멀어지고, 부부관계는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이런 때에 아내가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남편에게 일석삼조로 좋은 일입니다. 왜 좋습니까?

첫째, 아내가 맞이하는 교회의 거룩한 바람은 다른 잘못된 바람을 잠재울 수 있게 합니다. 여자 교인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춤추러 가겠습니까? 사교모임을 가지겠습니까? 도박을 하겠습니까? 단체 쇼핑에 나서겠습니까? 계를 하겠습니까? 돈 벌러 전화방 가자고 하겠습니까? 가장 못하는 일이라고 해야 고작 수다부리는 일 정도일 것입니다.

반면에 잘하는 일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모이면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전도심방을 하고, 교회 청소하고, 강단 꽃꽂이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남편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남편을 용서해주고 존중해주라고 합니다. 그런 거룩한 바람이 수많은 나쁜 유혹의 바람을 잠재우고 그 거룩한 외출이 잘못된 외출을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가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고, 얼마나 안심이 되는 일인지 모릅니다.

둘째, 아내는 자신의 교회생활을 뒷받침하는 남편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남편의 삶만 있었고 아내의 삶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아내가 남편만을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아내들은 겉으로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속으로는 미운 감정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남편들이 교회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인정해주고 더 나아가 적극 뒷받침해주면 아내들은 자기의 삶과 인격을 존중해주는 남편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셋째, 목회자의 설교와 교회생활은 아내의 삶을 바람직한 모습으로 변화시킵니다. 교회에서는 항상 남편에게 순종하고 가정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합니다. 그처럼 남편이 꼭 하고 싶었던 교훈적인 말을 대신해 주니까 아내는 점차 바람직한 아내가 되어갑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남편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다니는 남편도 세상 남편들처럼 유혹을 당하지만 그 유혹에 넘어갈 확률은 훨씬 적습니다. 특히 한국 남자들은 책을 거의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좋은 설교 한 편은 때로는 좋은 책 한 권보다 훨씬 더 남편의 마음에 양식이 되고, 그 설교로 시야가 넓어지고, 이해가 깊어지고, 다만 술 한 잔이라고 덜 마시게 됩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교회를 함께 다니는 부부는 이혼 비율도 현저하게 낮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아내와 내 남편이 교회를 잘 다니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처럼 복된 일은 없습니다. 교회 잘 다니는 남편과 아내는 한 마디로 복덩어리입니다.

그처럼 그 집사님의 아내가 교회가 나가면서 삶이 달라지기 시작해서 잡지책을 멀리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세상 친구가 하나둘 끊어지더니 교회 식구가 친구가 되면서 가는 곳, 원하는 것, 그리고 사는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전에 세상 친구 집에 갔다 오면 짜증과 바가지가 시작되었지만 교회식구 집에 갔다 오거나 교회에 갔다 오면 항상 얼굴이 환하고, 기쁨이 넘치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의 월급은 여전히 적었지만 그 가정은 천국이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남편이 간증하며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믿는 아내 때문에 사는 맛이 달라졌습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길 >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말씀 안에 있으면 우리는 행복의 든든한 기초를 닦은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지난주에 골로새서 4장 2-4절 말씀을 통해서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가장 기초적인 원리로 기도생활, 감사생활, 전도생활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실천적인 원리 세 가지를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세상의 빛 된 생활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쉽게 말하면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믿음과 생활을 분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즉 믿음이 생활이고 생활이 믿음이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할렐루야’가 충만한데 교회 밖에서는 ‘신경질’이 충만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길을 가는데 자기 교회 집사님이 다른 사람과 크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말리며 “집사님! 고정하세요”라고 했더니 “목사님! 말리지 마세요! 지금 이 순간만은 집사 떼어 놓았어요!” 하고 계속 싸웠다고 합니다. 그처럼 교회 밖에서 집사 떼어놓고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영적 신분이 변했으면 우리의 사는 모습도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곡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을 ‘공짜로 얻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공짜로 얻고자 하면 세상의 빛 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은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을 좋아하고, 얻으려고 안달하는 믿음이 아닌 손해 볼 줄도 아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손해를 각오하면 나중에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이익입니다.

믿음은 구름 위에서 신선노름을 하는 환상적인 노름이 아닙니다. 병이 들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믿음으로 고쳤다! 하나님이 고쳐주셨다!”라고 하면서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신다는 것만 알지 하나님이 의사 선생님을 통해 고쳐주신다는 것은 외면하는 그런 편협한 삶에서는 빛 된 삶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은 말 그대로 노름입니다. 노름을 좋아하면 노름빚만 많아지듯이 믿음을 신선노름으로 생각하면 인생의 부채만 많아집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실생활에서 모범적인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성도의 하는 일은 세상이 썩었다고 자꾸 비판하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이 하루아침에 썩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죄인이 된 순간부터 썩었습니다. 그것을 자꾸 되짚어 비판만 하는 것은 성도의 할 일이 아니고, 그런 썩은 세상에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목적을 깨닫고 그 목적 가운데 사는 것이 성도의 할 일입니다.

앞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썩은 세상에서 얼마나 빛 된 삶을 살았는가를 보고 상급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 잘하다가 천국에 가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때문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첫째, 우리와 같은 부족한 사람이 마침내 천국에 왔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놀라게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 천국에서 큰 상급을 받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소리 없이 하나님의 기쁘신 일을 행했던 것입니다.

셋째, 이 땅에 있을 때 ‘위대한 종’이라고 했던 사람이 천국에서 아주 초라한 상급을 받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그토록 유명한 목사님과 부흥사가 상급이 적고 심지어는 천국에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것입니다.

우리의 부끄러움과 영광은 그날에 판가름 나게 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이 세상에서 누리는 지나친 명예는 천국에서 부끄러움의 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항상 중간 결과를 보고 모든 것을 평가하지 말고 인생을 너무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열심히 하나님의 자녀답게 세상의 빛을 비추며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2. 지혜로운 시간생활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지혜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정의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비극적인 일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누가 성공합니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잘 구분해서 시간을 배분하고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이 세상에서 돈만큼 중요한 것이 시간입니다. 돈도 자본이지만 시간도 자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자본은 축적이 가능하지만 시간은 축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두고 지혜롭게 시간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 앞서나가게 됩니다. 우리의 성공과 행복을 막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게으름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성실한 사람을 쓰십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불렀을 때 이새의 7명의 아들들은 무엇인가 축복을 예상하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8번째 막내아들 다윗은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형님들! 다 가십시오. 제가 양들을 지키겠습니다.” 결국 누가 선택받습니까? 축복받겠다고 달려간 사람이 선택받지 않고 형들을 위해 혼자 양떼를 지킨 다윗이 선택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이 안하는 것을 자원해서 하려고 하는 사람을 쓰고 남이 못하는 것을 힘써 해낼 줄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우리는 너무 축복만 뚫어지게 바라보지 말고 먼저 축복된 존재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축복에 대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성실한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축복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노동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아담에게 저주를 내렸습니다.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으리라!(창 3:19)” 이 장면만을 보면 인간에게 노동이 생긴 것이 죄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노동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거룩한 노동은 인간이 죄를 짓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 말씀을 보면 아담에게는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는 일이 사명으로 주어졌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3절에는 천국의 삶이 묘사되어 있는데, 천국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합니다. 노동은 천국에서도 있다는 말입니다.

노동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다만 노동이 따분해지고 노동의 참된 가치를 상실한 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지금 우리의 하는 일에 사명감을 갖고 하고 보람을 느끼는 것! 그것이야말로 바로 이 땅에서의 천국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일 가운데 최고의 일은 섬기는 일입니다. 누구에게 마음의 천국이 찾아옵니까? 내 것으로 남을 섬겨주는 사람에게 마음의 천국이 다가옵니다.

땀이 없으면 행복도 없습니다. 행복은 땀을 흘릴 때 주어집니다. 땀이 없으면 축복이 주어지지도 않고 깨달아지지도 않습니다. 또한 땀이 없으면 복을 지킬 수도 없고 복의 가치를 지켜나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름길을 너무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름길은 대개 사단이 유혹하는 길입니다. 예수님 40일 금식 기도 후에 사단이 시험한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지름길로 가면 축복받고 성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그런 시험을 많이 당하고 있습니까? 그 시험에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말했습니다. “생각도 없이, 할 일도 없이, 전념할 일도 없이, 완전한 휴식 속에 사는 것처럼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없다.” 일이 많다고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오히려 행복한 것이다. 사람에게 일이 없으면 자기 허무, 자기 불안, 자기 회의, 자기 무력, 자기 공허에 빠지게 됩니다. 바로 그때 마음 깊은 곳에서 권태와 우울과 고뇌와 회한과 절망이 생깁니다.

바쁜 것은 원망할 일이 아니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 없이 바쁘지는 말아야 합니다. 사람 됨됨이는 그 사람의 일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휴식하는 것에서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너무 일에 매달리면 탈진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을 보면 자기 생명을 거두어 달라는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그 전에 그는 큰일을 치렀습니다. 갈멜산 대결을 했고, 그 대결 후에는 아합의 마차 앞에서 갈멜산에서 이스르엘까지 달렸습니다. 그렇게 지쳐있었기 때문에 이세벨의 위협에 무너지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입니다. 육신이 너무 피곤하면 영혼에 영향을 미칩니다.

철야 기도할 때 너무 힘들면 잠시 누워 자십시오. 금식할 때 너무 힘들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굳이 처음에 작정한 날짜를 채우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꼭 40일 금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 갱신을 목적으로 금식하면 몸만 축이 날 뿐입니다.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피곤하면 쉬어야 합니다.

쉬는 시간은 일의 목적을 상기해 보게 하고, 내일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재충전하는데 필요한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그런 휴식이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상품처럼 되지 않고 인간답게 됩니다. 그처럼 일과 휴식을 적절히 배분할 때 행복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3. 은혜로운 언어생활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말을 잘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말을 잘하는 능력도 구해야 합니다. 이단을 만나서 대화를 한 후에 고작 하는 말이 “그 사람들 정말 말 잘하네!” 하지 말고 내가 가진 참된 진리로서 거짓 진리를 깰 수 있을 정도로 말을 잘해야 합니다.

한 마디 말을 잘해서 거래처가 생기고, 상품을 더 팔 수 있습니다. 한 마디 말이 자녀의 삶을 달라지게 만들고, 병자와 실패한 사람을 일으킵니다. 말이 그처럼 중요합니다.

살면서 가장 이상한 것은 멀쩡한 여자들이 제비족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대학원까지 나온 여자들도 외모부터 제비족이 뻔한 남자에게 어리석을 정도로 넘어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비족들이 하는 말 때문입니다. “사모님!” 하면서 왕비를 대접하는 것처럼 말하면 그런 말을 못하는 훌륭한 남편을 버리고 제비족에게 빠지는 것입니다.

한번은 큰맘 먹고 비싼 옷을 사고 남편에게 애교를 부립니다. 그때 남편이 “이게 뭐꼬? 미쳤나?”라고 말하는데 제비족은 뭐라 말합니까? “아, 사모님! 잘 어울립니다!”라고 하니까 이성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들이 좋은 말 한 마디 하는 것은 아내에게 큰 힘이 됩니다. 행복하게 살려면 공부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말을 잘 해야 됩니다. 좋은 말을 들으면 인생이 행복하게 되고, 좋은 말을 해도 행복감이 넘치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은혜롭게 하라고 말합니다. 왜 말과 관련해서 소금이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소금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역대하 13장 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 가문에 주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언약을 ‘소금 언약’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소금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말도 수시로 달라지지 않고 진실한 말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남에게 충고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가 한 말을 변함없이 지키는 것입니다. 결국 최후의 승리는 진실이 차지합니다.

또한 소금은 부드럽게 만듭니다. 배추에 소금을 넣어 절이면 부드럽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을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는 말은 공동체를 부드럽게 해주는 온유한 말을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거칠고 뻣뻣하고 교만하고 상처 주는 말을 싫어하십니다. 반면에 온유하고 부드럽고 항상 화해와 용서를 전달하는 말을 기뻐하십니다.

또한 소금은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처럼 맛깔 나는 말을 할 때 영혼이 살아나고 인간관계가 살아날 것입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와 칭찬을 주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말을 논리적으로 못하고 더듬거려도 격려와 위로의 말을 주는 사람이 최고로 말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격려의 작은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어느 날, 시골 교회에 다니는 한 처녀가 서울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토요일이어서 교회 목사님이 멀리 서울까지 갈 수 없어서 전보를 쳤습니다. “축! 결혼! 요한일서 4장 18절!” 이런 말씀입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그런데 우체국 직원이 잘못해서 “축! 결혼! 요한복음 4장 18절!”이라고 전보를 쳐 보냈습니다. 두 부부는 신혼여행을 갔다 와서 그 전보를 보고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이런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그 전보 때문에 한 바탕 소동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작은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키가 작은 사람에게 “왜 자라다가 말았냐?”라고 놀리면 얼마나 상처가 됩니까? 저의 아내는 저보다 키가 큽니다. 가끔 키 얘기가 나오면 아내는 저의 영적인 키를 보아서 결혼했다고 말합니다. 전도사님 말에 의하면 요새는 키가 작은 남자가 번듯한 여자와 함께 다니면 “저 남자 능력이 있구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자도 체면이 덩달아 높아진다고 합니다. 얼마나 좋은 말들입니까?

저는 두 딸이 위해 거의 매일 기도하는데 가장 많이 하는 기도가 결혼기도입니다. 특별히 기도할 때 우리 두 딸이 예쁘게 잘 자라서 키는 조금 작아도 능력 있는 남자, 열심히 일하면서도 즐길 줄 아는 여유를 가진 남자, 이해심이 많은 인격적인 남자, 합리적이고 상식이 있고, 무엇보다 언어가 따뜻한 남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지금부터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말하는 것을 보면 그 말에 그 사람의 삶의 양식과 인격이 거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는 사람은 말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말로 인한 싸움이 생기면 성도는 져주어야 합니다. 말싸움에서 이기면 영혼을 잃어버리고, 말싸움에서 져주면 영혼을 얻게 됩니다.

인터넷을 통해 가끔 보면 전도한다고 하면서 논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논리가 탁월해서 기필코 그 논쟁에서 이깁니다. 그런데 논쟁에서 져서 승복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이제껏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논쟁에서 져줄 준비를 하고 대신에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때 영혼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한때 믿음 좋은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런 말도 때로는 필요하지만 너무 남용하면 더 전도를 어렵게 하고, 더 사단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편이 술을 먹고 조금 주정을 한다고 어디서 배운 대로 남편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소리친다면 그 남편은 결코 변화되지 않고, 오히려 그 말을 듣고 사단은 “얼씨구나! 신난다!”고 하면서 남편의 마음에 더 역사할 것입니다.

언어는 인격의 척도입니다.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듯이 언어는 그 사람의 삶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 큰 역할을 합니다. 성도의 성도다운 태도는 바로 그의 언어생활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전후 상황을 잘 고려해서 감정적인 언어와 거친 언어를 멀리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설교를 끝내고 집에 들어갔는데 아내가 말했습니다. “당신! 설교를 그것밖에 못해요.” 그런 말을 듣고 목사님이 암담해졌다고 합니다. 설교를 못해서 암담해진 것이 아니라 그런 아내와 평생을 같이 살 생각을 하니까 암담해졌다고 합니다. 남편에게 잘하라고 침을 찔러 자극을 하려고 하다가 칼을 찔러 죽이는 꼴입니다.

최고의 사모 역할은 자기 남편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이든지 남편을 사모하는 아내가 결국 사모님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남편은 아내를 ‘안 해’, 즉 ‘집안의 태양’과 같이 여길 때 자기 자신이 태양처럼 빛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 뒤에는 반드시 ‘성공적인 말’이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말이 결국 믿음직한 남편과 아내와 자녀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믿음의 말을 많이 하고 들으십시오. 우울한 얘기는 하지도 마시고 듣지도 마십시오. 어떤 목사님이 다른 목사님이 쓴 한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집사님이 와서 한 시간 동안이니 몰아세우다가 갔다. 그때 뒷산에서 뻐꾸기가 뻐꾹뻐꾹 하고 우는데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이런 시를 지었다. ‘뻐꾹아! 뻐꾹아!/ 너는 왜 그리도 슬피 우니?/ 뻐꾹아! 뻐꾹아!/ 너는 목회도 안하는데 왜 슬피 우니?’”

그 글을 보니까 자신도 같이 슬퍼졌습니다. 그리고 우울해졌습니다. 그런 표정으로 집에 들어가니까 사모님도 우울해졌습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우울하게 지내니까 교회도 우울해졌습니다. 어느 순간, “이것이 아니다!”하는 생각으로 믿음으로 행동할 때 그 몇 주간의 우울함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믿음의 말을 주고받을 때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제는 비관적인 말과 부정적인 말을 멀리 하고 소망적인 말,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말을 많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주신 말씀처럼 항상 세상의 빛 된 삶을 살고, 지혜롭게 시간 관리를 잘하고, 언어 관리도 잘해서 행복하게 사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한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