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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잠자는 요나 (욘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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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27:2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이 구절을 보면 잠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인생에서 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계산적으로도 인생의 4분지 1내지 3분지 1이 잠입니다. 또한 잠과 건강과 상관관계가 분명합니다. 장수하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잠을 잘 자는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은 심신이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육신이 건강하지 못하면 잠을 잘 자지 못합니다. 정신적으로 걱정과 스트레스가 많아도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잠을 못 자는 불면증은 아주 큰 병입니다. 미국에서는 수면제가 연간 7백억 정이나 판매된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거의 2천만 정이 소비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면증에 시달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정말 잠을 잘 자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잠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구절들도 나옵니다. 잠은 기본적으로 축복이지만, 적절하게 절제해야 진정한 복이지, 지나치면 오히려 해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잠6:9~11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그리고 또 하나는 영적인 잠입니다. 영혼은 어떤 경우에도 잠을 자면 곤란합니다. 영혼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의 잠은 위험한 것이요 저주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가 바로 그겁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혹시라도 나 자신이 영적인 잠을 자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그런 모습이 있다면 즉시 영적으로 깨어나야 합니다. 모든 불행과 저주가 영적인 잠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영적으로 깨어 있을 때 승리와 축복을 경험합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깨어나 우리의 영혼이 새로워질 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승리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잠에 빠진 요나 : 영적인 잠

요나는 BC 8세기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요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1절. “여호와의 말씀이 ... 임하니라” 그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니느웨는 당시 앗수르 제국의 수도입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적대 국가로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무리하게 조공을 요구하던 나라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더욱이 앗수르는 죄악이 관영한 나라입니다. 2절에도 그들의 모습을 ‘악독’으로 표현합니다. 나훔3:1을 보면 니느웨를 가리켜 ‘피 성’으로 불렀습니다. 피가 흐르는 성, 무죄한 자의 피가 밤낮으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궤휼이 심하고 강포가 가득한 성이라고 했습니다. 근대에 들어와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옛 페르시아의 기념비를 보면 앗수르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으로 정복을 하면 정복지 백성들을 잡아 입을 강제로 벌리고 혀를 뽑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땅에 네 개의 말뚝을 박아 사지를 묶어놓고서 칼로 난도질을 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짐승 같은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한 죄인들도 회개시켜 구원하기를 소원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고 요나에게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요나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기겁을 합니다. 그는 아마 몹시 불쾌하고,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3절.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는 자기 생각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불순종합니다. 그는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니느웨는 지금의 이라크 북부에 위치합니다. 그런데 다시스는 지금의 스페인 남부 지브롤터 해안에 위치합니다.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갈 작정을 한 겁니다.

배에 탄 요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5절(하). “ ...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어쩌면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몇날 며칠 고민을 했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선지자인데 하나님 말씀을 쉽게 거부했겠습니까? 며칠 밤을 설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 결단을 하고 배를 타니까 피로가 몰려와 깊은 잠에 빠지게 됐을 겁니다.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자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이 잠은 평안의 잠이 아니었을 겁니다. 겉보기에 육신적으로 평안했을지 모르지만 마음 속엔 불안감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새우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영적인 잠’이었습니다. 그는 육신적으로 잠을 자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깊이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요나의 문제였습니다.

본문의 상황과 아주 유사한 사건이 복음서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깨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큰 풍랑이 일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갈릴리 어부 출신이 여럿이었지만, 하도 풍랑이 심해서 당황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난파지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태평하게 잠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다급해진 제자들이 예수님을 흔들어 깨웁니다. 막4:37~38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 ” 예수님은 육신의 잠을 주무시고 계셨지만 영적으로는 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정도의 풍랑은 예수님에게 산들바람과 잔물결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이 어떻게 하나 보면서 태평하게 자고 계셨던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이 풍랑을 향해 외치자 곧 잔잔해진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나의 잠과 예수님의 잠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는 욱적으로 영적으로 모두 잠을 자고 잇었지만, 예수님은 육적으로 잠을 잤어도 영적으로는 깨어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의 경우를 보면, 사람이 영적으로 잠을 잘 때 어떤 현상들이 나타나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몇 가지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함께 살펴보도록 합니다.

① 영적 무지 : 요나는 배를 타고 잠들기 전에도 이미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였습니다. 영적으로 잠을 자면 영적으로 무디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물론 요나가 인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겠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임을 영적으로 분별한다면 순종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잠들어 분별력을 상실한 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멀리 도망 가면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부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이요 편재(遍在)하시는 하나님이신데 그걸 모르고 있다니 정말 한심합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잠을 자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꼭 망할 짓만 골라서 하고, 꼭 멸망의 구덩이로만 기어들어 가게 됩니다.

② 영적 나태 : 영적으로 잠을 자면 분별력을 상실하므로 사명도 놓쳐버리고,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영적으로 나태의 수렁에 빠져 버립니다. 그러면 영도 죽고, 모든 삶도 혼란스러워집니다. 본문을 보면 요나가 기도했다는 말이 물고기 뱃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③ 도덕적 해이 :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 하필이면 왜 다시스로 가려고 했을까요? 아주 먼 데로 가야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굳이 비싼 선가(船價)를 치르면서까지 그 먼 데까지 가려고 했던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요? 당시 다시스는 풍요와 환락의 도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풍요와 환락의 도시 소돔성을 찾아갔던 것과 비슷한 이유가 아니었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잠자면 도덕적으로도 해이해 집니다. 그리고 타락하게 됩니다.

요나가 이렇게 영적으로 잠자는 가운데 방치되었다면 과연 어떻게 됐겠습니까? 아마 롯과 비슷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까 상상이 됩니다. 롯은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고 소돔성에 갔지만 전쟁을 만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때도 영적으로 깨어나지 못하고 거기서 우물거리다 결국은 유황불 심판을 맞아 겨우 몸만 빠져나오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영적으로 잠자면 망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흥합니다. 이것이 성경적 원리입니다.

[2] 잠자는 요나를 깨우시는 하나님 : 환란의 광풍

다행히 하나님은 잠자는 요나를 방치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를 흔들이 깨우셨습니다. 한참 항해하는데 갑자기 대풍이 불어닥쳤습니다.(4절) 난파지경이 되자 선장과 선원들이 각자 자기 신을 부르며 난리입니다.(5절)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요나는 계속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때 요나에게 다가간 선장이 그를 흔들어 깨웁니다. 6절.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희한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불신자인 선장이 선지자인 요나를 흔들어 깨우더니 뭐라고 말합니까? 기도하라고 말했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완전히 거꾸로 된 겁니다. 기도해 줘야 할 선지자가 불신자로부터 기도하라는 충고를 듣다니! 큰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성도가 깨어 있지 못하면 환란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불신자들로부터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란과 수치를 통해 잠자는 성도를 깨웁니다. 그러다 보면 믿는 자들 때문에 애매하게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경우가 생깁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살펴보죠. 그가 그랄 땅에 갔을 때 사람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거짓말을 합니다. 사라가 얼마나 대단한 미인인지 모르지만 잘못하면 자기 목숨이 위험할까봐 누이라고 속입니다. 맘을 놓은 그랄 왕 아비메렉이 사라를 데려갑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호되게 책망을 합니다. 만일 사라가 이방 왕에게 몸을 더럽히면 하나님의 언약의 씨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급하게 비상섭리로 기적을 베푸신 겁니다. 꿈에 나타나서 아비멜렉을 야단치고 사라를 돌려 보내게 합니다. 아브라함의 잘못으로 엉뚱하게 아비멜렉이 큰일 날 뻔 한 겁니다. 아브라함이 영적으로 깨어 있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영적으로 담대하여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고, 거짓말을 하는 대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승리했을 겁니다.

여러분, 믿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깨어 잠자면 이런 일이 생기기 쉽습니다. 자기도 실수해서 어려움을 당하고, 애매하게 주변 사람들까지 못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돌려보내며 점잖게 책망하는 아비멜렉의 모습을 보십시오. 창20:9~10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하나님이 두려워 완곡하게 말해서 그렇지 얼마나 창피합니까? 완전히 훈계하는 게 아닙니까? 하나님의 족장이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이방의 왕인 불신자에게 훈계와 책망을 받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예수님의 말 그대로입니다.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요즘 몇몇 대형 교회의 분란과 부정적인 일들도 인해 매스컴에서 교회가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도하기 힘든 시대에 전도의 문이 막히고 있습니다. 한 교회의 잘못으로 기독교회 전체가 욕을 당합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의 잘못으로 예수님이 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 한 사람이 영적으로 잠자다 그가 속한 가정과 공동체 함께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잠자면 나라가 시끄러워집니다. 이것은 영적인 원리입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돌이 떨어진데서부터 파문이 일어 호수 전체로 퍼져나갑니다. 마치 그것과 꼭같은 현상이 영적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영적으로 바로 서 있으면 그 긍정적인 영향이 주위로 퍼져나갑니다. 반면에 내가 영적으로 바로 서지 못하면 부정적인 영향이 주위로 퍼져나갑니다. 잠자는 요나 한 사람 때문에 배에 탄 사람들이 고생을 했습니다. 반대로 요셉 한 사람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고, 감옥의 죄수들이 복을 받고, 애굽 국민이, 주위 나라들이, 이스라엘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혹시 고난이 오면 하나님께서 잠자는 나를 깨우시는 것은 아닌가 한번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혹시라도 영적으로 잠을 자는 가운데 어려운 일을 당했다면 회개하고 돌이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으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3] 잠에서 깨어난 요나 : 회복과 승리

하나님이 대풍으로 요나를 흔들어 깨우신 후 요나는 이제 영적으로 각성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7절 보면 배에 탄 사람들이 재앙의 원인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제비를 뽑는데 요나가 딱 걸렸습니다. 다행히 요나는 이런 과정을 통해 영적으로 깨어납니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난 그에게 새로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① 회개 :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죄에 대해 아주 민감해집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미 지은 죄에 대해서는 속히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9절~10절 보면, 요나는 이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과 더불어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고백합니다. 그 회개의 증거로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을 보입니다. 1:12절.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생 사람을 바다에 던질 수 있겠습니까? 선원들이 주저합니다. 그러나 계속 풍랑이 거세지자 별수없이 요나를 던집니다.(1:15절)

요나는 회개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바다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십니다.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해 두셨던 것입니다.(1:17절)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3일 가까이 머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질식해 죽거나 소화되어 죽거나 끝장이 날 것 같은데, 놀랍게도 생생하게 날아났습니다. 2:10절 보니까.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서 육지로 다시 돌려보냅니다.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일이 꼬이고 얽힌다 해도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를 보십시오. 아버지를 배반하고 갔었지만,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오니까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단번에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② 기도의 회복 : 영적으로 잠자면 기도의 문이 막힙니다. 반대로 영적으로 깨어나면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요나가 영적으로 잠자고 있을 때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더욱더 깊은 잠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악순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의 잠을 깨워주시니까 기도의 문이 다시 열렸습니다. 2:1절~2절.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 ”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물고기 뱃속에서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숨이 답답하고, 어두컴컴하고 ...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난 요나에게 물고기 뱃속은 기도원과 같았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요나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잠들어버립니다. 그들이 잠을 잔 것은 육신적인 차원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잠이 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문에 꽉 막혀버렸고, 그 결과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26:40~41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 ”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승리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③ 사명의 회복 : 요나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니까 자기 생각과 다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헌신짝처럼 버렸던 니느웨 말씀 전파의 사명을 이제는 감당합니다.
3:1절~4절.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 ” 요나가 원수 나라 앗수르의 수도 한 가운데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것입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사악한 도성 니느웨 사람들이 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왕도 회개합니다. 욘3:5~6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의 계획을 철회하셨습니다.
욘3: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물론 아직 미성숙한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 성을 용서해 주시는 것을 싫어했지만, 어쨌든 하나님은 요나를 사용해서 니느웨 성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면 이처럼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를 들어 사용하여 당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성도 여러분! 육신의 잠은 너무 소중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잠은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우리는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2003년엔가 우리나라 남극기지인 세종기지에서 조난사고가 있었습니다. 고무보트가 전복되어 연구원들이 물에 빠진 것입니다. 간신히 헤엄쳐 나왔지만 사방이 얼음 투성이입니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텨야 되는데, 잠이 쏟아집니다. 하지만 잠이 들면 큰일납니다. 동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얼음으로 얼굴을 비비는데 그래도 잠이 옵니다. 나중에는 서로 뺨을 때리면서 잠을 쫓았다는 신문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졸면 죽는다!” “자면 죽는다!” 영적으로 잠을 자면 하나님의 은혜가 소멸되고 모든 삶이 흔들리게 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은혜가 넘치고 형통하게 됩니다. 설사 고난이 오더라도 넉넉히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은 영적으로 늘 깨어 기도하고 말씀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도 살고, 내 가정도 이웃도 살리고, 이 나라 이 민족도 살리는 축복의 역사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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