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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 보고 계셔 (마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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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숨길 수 없는 시대입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우리의 사생활이 노출되고 있습니다. 저마다 휴대폰을 들고 다니니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위치 추적을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인터넷 뱅킹에 구멍이 뚫려 해킹을 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또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요즘에는 거리에도 이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행적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이 빌딩에도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도 있고, 옥상에도 있습니다. 카메라가 있는 줄 모르는 어느 여성분이 혼자 타고 올라가는 모습이 찍혔습니다. 혼자 거울을 보면서 미용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를 들여다보고, 코털을 정리합니다. 여러분도 조심하십시오. 누군가 보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예배당까지 카메라가 들어왔습니다. 강단 앞에서 회중석을 비췹니다. 그러면 누가 예배 시간에 졸고 있는지 다 찍힙니다. 교회까지 와서도 감시를 당해야 된다니 얼마나 서글픈 이야기입니까? 우리 멋진교회는 회중석을 비취는 카메라는 설치하지 않겠습니다.

1984 년 조지 오엘이 빅브라더라는 미래소설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예언한 빅브라더가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보통신부의 보고에 의하면 국가 기관에 의해 국민 300 명당 1 명 꼴로 이메일이 조회를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정말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전부는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그런 감시를 당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행동을 다 보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21 장에 보면 책과 책들이 펴져 있는 것이 나옵니다. 책은 구원받을 백성들의 명단이 적힌 책입니다. 책들은 우리의 모든 행적이 기록된 책입니다. 요한이 그 당시에 봤으니 책들이지, 요즘 봤다면 녹화된 비디오 테입이나 디브디 타이틀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음성이 들리지 않은 것은 큰 복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눈에 보이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화장실에도 못갑니다. 코도 마음대로 못 후빌 것입니다. 샤워도 맘대로 못합니다. 모든 행동이 감시를 받는다면 이 세상에 죄를 지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 때문에 꼼짝 못하고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 귀에 들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모든 일이 헝클어집니다.

축구경기도 하나마나입니다. “하나님 오늘 게임 이길까요, 질까요?” 기도했는데, “진다” 응답이 즉각 들렸습니다. 그러면 게임을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하나님 로토 당첨 번호는 몇 번입니까?” 저마다 응답이 들린다면 1 등 당첨자는 수두룩할 것입니다.

장사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 물건 살까요?” “저 장사꾼이 곱절은 남기는구나.” 그러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늘과 하나님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돌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때나 나타나거나 나서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마음대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다 보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우릴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시간에 이어 은밀한 영성, 두 번째 기도에 대해서입니다. 크리스천의 은밀한 영성 두 번째는 골방기도입니다.

기도할 때는 골방에서 문을 닫고 은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문을 닫아걸어 잠거도 그 안에서 하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것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은밀히 할 영성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으로 알려지면 그 공력이 사라집니다.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상’이란 당시 상거래 용어입니다. 물건을 샀을 때 받는 영수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이미 영수증이 나갑니다. 기도할 내용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할 때 벌써 하나님은 영수증을 발행하십니다. 이 영수증은 기도의 응답과 직결됩니다.

그런데 사람을 의식해서 하는 기도는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수증을 두 번 받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기도 두 가지를 지적하십니다. 하나는 외식하는 기도요, 다른 하나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외식하는 기도는 주로 경건한 유대인들이 저지르는 잘못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 가운데 가장 경건한 이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하는 장소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을 택했습니다.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회당은 본래 종교 집회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회당은 지금의 교회와 같습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기도하는 모습도 경건의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의를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맞춰서 거리에 나갔습니다. 집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거리나 회당에서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는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훌륭한 성인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들을 칭찬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예수님은 이들의 기도를 외식하는 자의 기도로 비난하셨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기도의 예로 드셨습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 어는 장소보다도 기도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교회는 다른 곳보다 하나님께 집중하기가 좋습니다. 조용한 시간을 택해서 홀로 기도한다면 하나님을 경험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기도의 골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동기가 하나님을 만나기보다는 자기 기도의 의를 보이려는 속셈이 감춰져 있다면 주님을 그 모습을 가려내실 것입니다.

두 번째 지적하신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중언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부언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중언부언은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은 모두 이기적입니다. 어떤 소원을 들어준다 해도 그냥 들어주는 법이 없습니다. 응답을 받으려면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성을 기울이는 방법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같은 기도문을 수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불교에는 염주라는 것이 있습니다. 108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들었습니다. 이 염주는 염불의 횟수나 절한 횟수를 세기 위한 것입니다. 20 만 번 염불을 하면 죽더라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100 만 번 염불을 하면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열반에 이른다고 합니다.

천주교에는 묵주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도 같은 기도문을 반복하면서 공력을 쌓는데 쓰입니다.

또 원시종교 같은 무속이나 천도교에서는 주문을 외우도록 합니다. 주문은 단지 외우는 소리에 주력하면서 귀신을 불러들이는데 쓰입니다. 일본어인 ‘남녀호렝게교’를 반복해서 주문하면 성불한다고 믿는 것도 그런 종류입니다. 이런 주문들은 하는 사람도 뜻을 모릅니다. 이런 쓸데없는 말을 반복해서 외우는 것이 중언부언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 매일 물을 떠놓고 비니까 소원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성을 드리는 것은 도교에서 온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에 공력을 들이는 까닭은 섬기는 신이 비인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격이 있으십니다.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말씀드리면 싫어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한 번만 말씀드려도 다 알아들으십니다. 기도를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무슨 간구를 할지 아십니다. 그래서 합당한 기도면 지체하지 않고 바로 응답하십니다.

오늘 본문 8 절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방인들의 기도는 대부분 소원성취입니다. 신을 위해서 무얼 하지는 게 아닙니다. 신을 이용해서 자기 욕구를 채우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과 그들의 신은 서로 이기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바르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 기도하는 법은 인격이신 하나님에 대한 예의를 배우는 것입니다. 기도하려면 우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받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기도를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기도를 통해 인격적으로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서로 사랑의 친밀한 관계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의 목적을 우선 포기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주님은 그런 것을 기도하지 않아도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골방이 필요합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골방은 주님과 단 둘이 교제하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골방은 문을 닫기 때문에 우선 사람에게 보이려는 외식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골방기도는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에 깊은 기도가 가능합니다. 즉 중언부언을 피할 수 있습니다.

골방은 하나님과 내가 일 대 일로 만나는 곳입니다. 나와 개인적으로 만나 교제해 주시는 방입니다.

이방인들의 기도는 기도한 횟수를 세어야 합니다. 기도에 공을 들인 시간을 따져야합니다. 저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이십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전도서 5:2 말씀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잘못된 기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정해놓고 채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40 일이나 100 일이나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한다고 더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40 일 금식기도도 자칫하면 공력으로 변질됩니다. 어떤 커다란 기도제목이기에 그런 작정기도를 할까요? 커다란 기도라 그만한 공력을 들여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잘못 안 것입니다. 그런 공력 사상은 기독교가 아니라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40 일을 금식하려고 했지만 기도 중에 응답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도 40 일 작정을 했으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으로 알고 끝까지 채워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작정한 날들을 채워야 응답하시는 비인격적인 분으로 매도하는 것입니다. 또는 자기 노력으로 공력을 쌓아 기도 응답을 이끌어내려는 잘못된 신앙관입니다.

기도도 지나치면 안 됩니다. 어떤 분은 하루에 4 시간씩 기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매일 철야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 정도면 생활의 균형이 깨집니다. 철야를 하면 낮에 잠을 자야 합니다. 잠도 안자고 기도만 하는 사람은 대부분 귀신들린 자입니다. 또 그렇게 오래 기도만 한다면 다른 식구에게 생활비를 의지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무리하게 종교생활을 하도록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어쩌다 기도에 깊이 빠져서 그렇게 오래하고 많이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일도 안 하고 그렇게 기도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 하루의 대부분을 하나님을 잊고 삽니다. 하나님을 잊고 산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영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골방기도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생각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바로 골방기도입니다. 하루 시간을 정해놓고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디서든지 잠간이라고 하나님과 일 대 일로 대화하듯이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도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골방은 기도의 겉을 보자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속을 보자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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