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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세대 중의 한 가족 (마 12:3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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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학생 시절에 영어 단어를 배우면서 조금은 생소한 느낌을 주는 개념들을 몇 개 배우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동시대(同時代)의(contemporary)'라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그 때까지 ‘동시대’라는 말을 몰랐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제 기억에도 그 ‘동시대’라는 우리나라말이 좀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으로 보아, 그것이 그때까지만 해도 제게 그리 익숙한 개념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시대의’의 혹은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쓰는 이 단어와 그 개념은 문명의 발달이 가속화되면서부터 우리가 점점 더 많이 쓰게 된 단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옛날 중세기 같이 거의 1천년 내내 문명, 과학, 사회 전반에 걸쳐 그리 뚜렷한 변화가 없었던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동시대’라는 말이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동시대 사람이나 그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나 생활방식은 물론 사고방식도 그리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동시대’에 산다는 말은 단순히 같은 시간대에 산다는 뜻 정도가 아니라, 그 이전 시대 사람들은 전혀 모르던 문화, 사회, 생활, 관습, 사고방식의 배경을 공유하면서 모든 면에서 서로 잘 통하고 살아 갈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동시대에 속한 사람들만 서로 이해하고 통할 수 있다는 이 현상은 날이 갈수록 더욱 첨예화되어서 요즘에 와서는 아예 ‘세대차’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즉 같은 시대에 산다고 다 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세대가 다르면 공감대가 형성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세대차라는 것도 이전에는 10년 간격이 정설이었던 같은데 이제는 “요사이에는 어린 애들 사이에서도 세대차를 느낀다.”고 말할 정도로 그 세대차를 구분 짓는 햇수의 단위가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대차’란 말은 쓰지 않으셨지만 ‘동시대 사람’이란 개념은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듯이 “이 세대가 이러이러하다, 이 세대가 이러이러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자주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 세대 (this generation)’란 말씀의 의미는 물론 우리가 10년 씩 나누어서 부르는 ‘세대’가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동시대의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한 말씀임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동시대의 사람’을 어떻게 보셨으며 또한 어떻게 나누셨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세대차’란 개념으로 ‘동시대 사람’들을 세분하고 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대에 속한 사람’과 ‘그 세대 중에서도 한 특별한 가족에 속한 사람’으로 구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분은 같은 시대에 같은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나누는 방법 중에 더할 나위 없이 가장 엄격하고도 단호한 구분이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이 세상의 ‘동시대에 속한 사람’과 비록 그 동시대 가운데 살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정의하신 ‘한 가족에 속한 사람’과의 차이는, 우리가 오늘날 ‘세대차’란 개념으로 나누는 것과는 비교도 못될 엄청나고도 결정적인 차이인 것을 주님께서는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의 달 오월을 맞이하여 주일마다 여러 종류의 가족관계들을 되새겨 보았지만, 오늘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영적 가족’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 주일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에 속한 사람’과 ‘한 특별한 가족에 속한 사람’을 어떻게 나누셨습니까?

  1.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지 아니하고 악하고 음란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 세대에 속한 자’입니다.

  본문 38절로 40절의 말씀에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기를 원하나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견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하고 정중한 태도로 예수님을 “랍비” 즉 ‘선생님’이라고, 그들로서는 최고의 예우에 해당되는 존칭으로 부르면서 접근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예의와 정중함 뒤에 깔려 있는 것은 실로 고질적인 불신앙과 악한 교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사실’에 대한 어떤 증거를 요청했다는 뜻이 아니라 ‘무언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어떤 신비한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는 말입니다.
  즉 지금 당장 하늘에서 무슨 불덩어리가 떨어지게 한다든지 혹은 갑자기 벼락을 내리게 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기적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 정도는 보여 줄 있어야 예수님의 신분과 능력을 인정해 줄 수 있겠다는 것이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앞의 22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는 놀라운 표적을 조금 전에 이미 보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그 기적은 그저 귀신놀음에 불과하다고 일소에 붙여버리고, 이제 자기네들의 구미에 맞는 또 다른 기적을 뻔뻔스럽게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과 육이 근본적으로 변화 받고 새로 거듭나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들은 아예 무시하면서, 그 무슨 센세이셔널한 기적이 동반되어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다고 요구하는 바리새인들의 자세는 바로 오늘날 세대의 불신자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꼭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런 요구에 응해 주실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기적 행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이 바리새인들의 요청은 ‘표적을 보여 주시면 믿겠다.’는 말이 아니라, ‘표적이 없으니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교만의 도전인 것을 잘 아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 주님께서는 그 요구를 받자마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당장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음란’이란 말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나 배교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구약 선지서에서 자주 쓰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같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교만하는 세대에게 보일 표적이 있다면 그것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 비유하는 바는 요나 선지자가 삼일 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 나온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삼일 동안 무덤에 계시다가 부활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신 사건만이 모든 세대의 모든 인류들에게 보여 주실 수 있는 최대의 표적이며 또한 필요충분한 증거가 될 것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십자가 사건을 보고도, 죄인을 위해 흘리신 그 피를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최고로 ‘악하고 음란한’ 불신앙이요 배교요 교만인 것입니다.

  41절과 4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처럼 위대한 ‘십자가 표적’을 끝까지 거부하는 불신앙의 세대를 가리켜 이어서 경고하시기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왕”이 그 불신 세대를 정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은 무슨 표적 없이 그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된 지혜의 말만 듣고도 회개하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무지 하나님 믿지 못할 것 같았던 니느웨 사람들, 요나 스스로도 결코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 백성들이 단 하루 동안의 전도만 듣고 한 명도 빠짐없이 다 회개했습니다.
  남방 여왕, 즉 스바 여왕은 하나님 말씀 들을 가망성조차 없어 보였던 먼 아프리카 지방 사람이었는데, 제 발로 찾아 와서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만 듣고도 즉시 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이 세대의 사람”들을 비교해 본다면 어떠합니까?
  이 세대의 사람들은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님, “요나보다 크신” 예수님을 통해 직접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보다 전도 더 잘한 사람, 예수님보다 더 지혜롭게 가르친 사람은 문자 그대로 전무후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의 말씀 듣고도 무슨 표적이 없니 어쩌고 하면서 믿지 못한다면, 그 예수님보다 훨씬 못한 요나나 솔로몬의 말을 듣고도 회개하고 하나님 믿은 사람들 앞에서 심판날 큰 창피와 함께 정죄당할 것은 너무나도 당연지사가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불신앙의 악한 세대에 속하여 살던 자들은 이처럼 심판 때에 가서는 무서운 지옥에서 영원한 ‘동시대 사람’으로 살게 될 뿐인 것입니다.

  본문 43절부터 45절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속한 자들에 대하여 계속 정죄하시기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란 문자적으로는 ‘더러운 영’이란 뜻인데 일반적으로 ‘귀신’을 뜻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 속에서 살고 있던 귀신이 밖으로 나가서 “물 없는 곳” 즉 당시 유대사회에서 귀신이 일반적으로 거하는 장소라고 여겨지고 있던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그 귀신이 마땅한 거처를 찾지 못하고 다시 원래의 집 그 어떤 사람의 마음속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와보니 웬걸 그 집이 깨끗하게 소제되고 수리되어 귀신이 살기에 아주 좋게 되어 있었던 까닭에 다시 나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귀신이 어떻게 들어가고 나가고 했는지가 아니라, 예수님의 결론이 분명히 가르쳐 주시는 것처럼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며,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마땅히 채워야 할 것을 채워 넣지 않은 심령은 언제든지 악한 영이 쉽게 노릴 수 있는 좋은 사냥감과도 같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사역 초창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듣고 감동받기도 했으며 병 고침을 받는 축복도 누렸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 심령에서 악령이 떠난 듯이 보였지만, 그 좋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완전한 중생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바로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끝까지 그저 공짜 떡이나 먹여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끝내는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하고 오히려 배신하는 무리들이 되어 갔던 것입니다.
  불신 세대에 속한 자들은 이처럼 꼭 같은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에 그 생각하고 말하는 것까지도 서로 잘 통하는 ‘같은 세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세대에도 바로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절대다수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세대에 살았지만, 아무 증거 없는 것 같아도 그토록 단순하고도 진실하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는데, 이 배우고 세련되었다는 현세대의 사람들은 이것저것 따져들면서 얼마나 교만하게 자기 불신앙을 합리화시키려 합니까?
  우리의 부모님들은 오천년을 이어 내려온 불신앙의 세대에 태어나셨으면서도 외국 선교사들이 ‘예수 천당’하고 외치는 한 마디에 아주 간단하고도 뜨겁게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도 다니고 학교에 가도 기독교 동아리가 있고 어디를 이사 가도 교회 십자가가 지척에 있는 이런 좋은 시대에서 자라나고 있는 젊은이들이 왜 이렇게도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게을리하고 있는 것입니까?

  일단 같은 피가 통하지 않으면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피 흘려 주신 것을 믿지 않으면 내내 이 불신 세대, 영적 마피아와 같은 이 ‘악한 패밀리’와 같이 세상에서 살다가 같이 결국 지옥 영벌 받을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짜 같은 가족이라면 마음이 맞고 뜻이 통해야 마땅합니다.
  성령이 거하는 성전의 마음을 가지기 못하고 마귀가 살기 좋게 되어 있는 마음, 하나님을 거역하는 ‘음란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결국 그 나중의 영적 형편이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하게 부패해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의인의 회중에서 철저하게 솎아내어서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 버리고야마실 그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먼저 그 십자가 사랑의 보혈로써 같은 핏줄을 나누고 또한 부단한 예배생활, 말씀생활, 기도생활을 통하여 성령충만한 심령을 함께 지키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신앙생활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새 가족에 속한 자’입니다.

  본문 46절 이하 50절은 비록 몸은 이 세대에 속하여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불신세상과는 완전한 딴 살림을 차리고 사는 한 특별한 가족을 예수님께서 친히 소개해 주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 계신 집 밖에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보아서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 사역 초창기에는 아직 완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같은 곳에 보면 예수님의 친속들이 예수님께서 귀신들렸다는 소문을 듣고 붙잡아 집으로 데려가려고 찾아왔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예수님 부활 승천 이후에는 그들도 다 신자가 되고 야고보 같은 이는 초대 교회의 지도자까지 되었지만, 아직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여튼 그 모친과 형제들이 모처럼 멀리까지 찾아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그 가족들을 맞이하러 나가기는커녕 집안으로 모셔 들이라는 말씀조차 하지 않으시고,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냐”하시면서 전혀 엉뚱하게도 당신의 제자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시면서 “나의 모친과 형제와 자매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이다”라고 폭탄과 같은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사실 인간윤리를 따져 보자면 이보다도 더 부모에게 불효하고 형제에게 매정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엄연한 당신의 핏줄을 제쳐놓고서, 아니 아예 외면까지 하시면서, 성(姓)도 족보도 전혀 다른 사람들을 가리켜서 당신의 진짜 모친이요 형제요 자매라고 공언하고 계시니, 세상에 이런 아들, 이런 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실로 중요하고도 특별한 한 새 가족, 실로 혈연보다도 더 가까운 ‘한 ’새 가족‘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같은 핏줄을 나눈 육신의 가족도 참으로 끈끈한 것이지만, 꼭 같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사는 신앙생활로 맺어진 이 새 혈통 관계는 세상의 가족보다도 훨씬 더 가깝고 훨씬 더 진하고 훨씬 더 강하고 뜨거운 ‘영적 가족’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아비나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고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바로 주님 자신께서도 그 말씀대로 사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벗어나서 바로 이 영원한 ‘새 가족’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지연(地緣)도 때로는 좋은 것입니다.
  혈연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장 가까운 관계일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 맺어지는 새로운 관계, 이 영의 핏줄을 나눔으로써 이루어지는 가족의 관계야말로 금세에서뿐 아니라 내세에까지 영원히 이어지는 관계입니다.

  이 가족에 속하기 위해서는 일단 “하늘의 아버지”가 같아야 합니다.
  단순히 같은 지구상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해동포’라고 일컫는 것은 이 영적 가족의 구성에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말입니다.
  신은 달라도 아무 종교나 가지면 다 같은 형제요 자매라는 말도 어처구니없는 헛소리입니다.
  아버지가 엄연히 다른데 어떻게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까?
  하늘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양자(養子)된 자들만 생명책 호적에 정확하게 올려놓으셨는데, 다른 신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는 종교인들이 기독교인들과 형제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족보법을 따른 소리입니까?
  한쪽은 천당에서 영원히 같이 살 가족이고 다른 한쪽은 지옥에서 영원히 동거할 가족인데, 현주소가 다르고 돌아갈 본적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형제자매가 된다는 말입니까?

  또한 이런 영적 가족관계는 단순히 교회의 등록교인이 된다고만 해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매주일 만나서 인사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즐기기만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목사와 안면이 익숙해지고 아무리 교회 출석만은 계속하더라도, 만일 그 사람이 끝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따라 참된 신앙생활하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지 못하면, 그는 예수님의 구분에 따르면 아직도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이지 ‘이 가족’에 속한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목사도 어떤 교인과 더 가까워지겠습니까?
  그것은 목사에게 인사 잘하고 선물 자주 갖다 주는 교인이 아니라 오직 신앙생활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잘 하는 교인입니다.
  그런 교인은 목사에게도 실제로 자신의 친가족보다도 훨씬 더 가깝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목사조차 그러하다면 예수님이야 오죽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심령에 “내가 이제는 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생을 살아야지.”라는 서원이 생기고, 여러분의 손발이 하나님께서 원하실 여러 가지 교회의 봉사를 열심히 섬기는 일에 바삐 움직이고 있습니까?
  그런 성도는 바로 그 마음과 몸의 체험이 하나로 묶어주는 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끈끈한 형제자매, 하나님의 집에 든든히 동거하는 진짜 새 가족이 이미 되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불신세대와 완연하게 구별되는 예수님의 새 가족, 하나님의 백성, 천국시민이 되기 위하여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믿고 살아가는” 이 신앙생활에 모두가 하나가 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동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때로는 인종으로, 때로는 나라도, 때로는 세대차로 구분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불신앙의 세대에 속한 사람들’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가족에 속한 사람들’로 실로 칼같이 갈라놓으셨습니다.

  구세대에 속해서 신세대에 끼어들지 못한다고 해서 무슨 큰일 나겠습니까?
  젊은 애들이 채팅하고 있는 대화방에 들어갔다가 따돌림을 당하고 슬그머니 쫓겨나는 창피를 당한다 해서 인생이 끝나기라도 하겠습니까?
  또 구세대에 태어나지 아니하고 신세대를 마음껏 즐기면서 살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청년들과 청소년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세대만이 서로 통하는 인터넷 까페를 만들고 무슨 동호회를 만들면서 재미있게 산다고 해서 여러분의 삶의 질이 구세대 어른들보다 월등할 것 같습니까?
  어차피 칠팔 십 인생 살다가 죽으면 다 끝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너는 내 가족이 아니다’라고 차별하시는 그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면, 실로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핏줄은 이 세상에 잠시 살고 있는 동안뿐입니다.
  죽은 후에 천당에서나 지옥에서는 그 가족 관계는 더 이상 존속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이 땅에서 가지게 되는 관계들 중에서 죽은 후에도 연속되는 유일한 두 관계들은 바로 이 ‘불신 세대’에 속한 관계와 이 ‘신앙 가족’에 속한 관계들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신앙의 ‘새 가족’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하지만, 그 피보다 더 진하게 맺어진 관계가 바로 같은 예수 십자가의 피를 나눈 가족입니다.
  매일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나누는 한 가족처럼 늘 교회중심으로 살면서 한 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떡을 함께 먹고 있는 가족입니다.
  같이 웃고 같이 우는 형제자매들처럼 한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고 그 마음과 뜻이 늘 서로 통하는 가족입니다.
  합명회사를 세우고 함께 땀 흘리고 함께 벌고 함께 나누는 대가족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사업에 늘 힘과 정성과 땀을 모아 신앙의 공동체를 같이 발전시켜 가고 있는 가족이 바로 교회의 성도인 것입니다.

  한 핏줄을 나누고 한 지붕 밑에 사는 가족은 결국 그 미래도 공유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신 세상에 속한 자들은 함께 지옥에서 영생하게 되고 신앙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교회생활하는 자들은 또한 천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비록 현실적으로는 ‘이 세대의 사람’들 중에 섞여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세대와는 금세와 내세를 통하여 확연히 구별되어 있는 아주 특수한 패밀리(family)인 것입니다.
  결국 영벌의 저주를 공유하게 될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빠지지 아니하고 금세에서 예수 사랑을 나누는 행복한 가족이 되고 내세에서 천국 영생을 함께 누리는 영원한 가족이 될 수 있도록, 늘 십자가의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 성도,’ 어디서나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같은 유일한 하늘의 아버지로 모신 자녀’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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