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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홍해 앞의 이스라엘 (출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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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겪은 일은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의 구원에 유익을 주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으로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11절에 보면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의 스토리는 우리의 거울이 됩니다. 거울을 보고 ‘내 얼굴에 티가 묻었구나. 내 눈에 들보가 들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우리 스스로를 고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430년 동안 애굽생활을 한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애굽생활을 좋게 시작을 했습니다. 애굽생활을 시작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요셉을 통해서 시작할 때는 좋았으나 그 결국은 비참한 노예생활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만 세상즐거움은 처음에는 좋은 것 같지만 결국에는 사람을 노예처럼 얽어매는 낚시 바늘과 같은 것입니다. 처음에 좋게 시작해도 나중에는 노예생활로 끝납니다. 굵은 낚시 바늘에 걸린 한 마리 물고기처럼, 그물에 걸린 한 마리 새처럼 이스라엘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바로왕의 압제에서 해방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완성까지 이루신 하나님의 주도적인 구원역사에 의해서 위대한 출애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입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못된 신학은 이스라엘이 스스로의 힘으로 애굽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그 능력으로 출애굽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바로왕은 열 가지 재앙을 당하고 드디어 마지막에 장자가 죽는 대 재앙을 당한 후에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을 죽여서 그 피를 문인방과 문설주에 두루 발랐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이스라엘 백성을 지나가면서 유월절을 경험했습니다. 결국, 어린양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영적으로 해방되고 육적으로 해방되고 거기다가 은금패물까지 두둑하게 챙겨서 나오는 물질적인 축복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 성도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첫 번째 경험입니다. 처음 예수 믿고 성령을 받으면 누구나 마음에 큰 기쁨을 얻습니
다. 구름 한점을 봐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나뭇잎 하나를 보아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이 감사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너무나 가까이 계시고 기도해도 응답이 속히 옵니다. 처음 예수 믿어 첫 사랑을 누릴 때에는 얼마나 많은 감사와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아 이제는 벽돌을 만들지 않아도 되겠구나. 채찍에 맞지 않아도 되겠구나. 이제는 바로왕의 명령을 듣지 않아도 되겠구나. 이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길 수 있겠구나!’ 얼마나 기쁘고 감격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누구나 우리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영적인 첫사랑의 시기가 영원하지는 않다고 하는 점입니다. 곧 이어 하나님의 훈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첫 사랑은 어느 정도 후면 지나가고 그 다음에는 중년기의 사랑, 노년기의 사랑으로 바뀝니다. 매일 첫사랑일 수 있겠습니까? 첫 사랑의 시기는 끝나는 것이고 곧 이어 훈련에 들어갑니다. 첫 번째 훈련은 홍해훈련이고 두 번째 훈련은 광야훈련입니다. 이 두 가지 훈련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으로 입성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의 홍해훈련의 과정과 목적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1. 쉬운 길로 인도하지 않은 이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때에는 쉬운 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쉬운 길로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7절에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당시에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가까운 길이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북쪽으로는 블레셋 땅을 통과해서 가는 가까운 길, 그 가운데로는 술 광야를 통해서 가는 길, 제일 먼 길이 아카바만을 통해서 가는 소위 “King's highway”라고 하는 왕의대로가 있었습니다. 이 세 길은 모두 가까운 길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주일 내지는 열흘 만에 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쉬운 길을 모두 피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17절 후반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가나안으로 가는 가까운 길에는 모두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전쟁은 불가피하게 됩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그 적들과 전쟁을 하면 전쟁의 두려움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애굽으로 돌이키게 될까봐 하나님은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홍해를 건너서, 시내산을 거쳐서, 가데스 바네아를 거쳐서 40년간 방황하는 광야 길을 차라기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구원받은 백성들이 뒤돌아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예수 믿는 백성들이 나가야 될 인생방향은 앞으로 전진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5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라” 우리는 무한전진 무한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후퇴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전진입니다. 창세기 19장 26절에 보니까 롯의 아내도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신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은 특별히 동성연애의 죄악 아닙니까? 소돔(sodom)에다가 y를 붙이면 동성연애(sodomy)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미워해서 유황불비를 내리십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 롯과 그 가정을 건져주시는데 하나님이 “시간이 바쁘니까 뒤돌아보지 마라 소돔 고모라에 뭐 돌아볼 것이 있느냐 그대로 전진하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소돔 고모라에 다이아를 놓고 나왔는지 금반지를 놓고 나왔는지 은행 통장을 놓고 왔는지 모르지만 소돔 고모라성을 뒤돌아보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버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도 옛날 죄악생활을 좋아하고 옛날 죄악생활 그 때가 좋았다는 그런 소리하면 그 사람은 소금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금기둥이 되는 것 보다 홍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홍해 안에 들어가다 보면 수영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하다보면 파도에 밀려 갈 수도 있는 것이고 큰 물고기가 잡아서 홍해 저쪽에서 토해놓을지 알게 무엇입니까? 살아나갈 가능성이 그래도 홍해에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기둥이 되면 옴짝도 못하고 달싹도 못하고 그것은 아무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막아놓으신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뒤돌아가는 길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길은 하나님이 막아놓으신 것입니다. 예수 믿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길이 없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여 년 전에 많이 불렀던 복음성가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도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그런 찬송을 많이 부르셨지요? 우리는 뒤돌아서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무한전진 앞으로 가야 합니다. 앞에 홍해가 있는데 어떻게 갑니까? 그래도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진입니다. 본문 14장 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참 어려운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에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이 동네 주소 복잡하지만 다시말해 이 장소는 홍해 앞입니다. 이스라엘 백
성들 앞에는 홍해가 있다는 말입니다.

2. 홍해 앞의 3大 어려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홍해 앞에서 출애굽 이후에 첫 번째 어려움을 맞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구원의 첫사랑의 감격을 누리지만 그 감격과 첫 사랑은 이제 곧 지나가게 되는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훈련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훈련이 올 때에 훈련 받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어렵습니다.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첫 번째 어려움은 앞에 홍해가 놓여있다는 어려움입니다. 홍해라고 하는 것은 원수마귀가 갖다놓은 곳이 아닙니다. 홍해라고 하는 곳은 당시에 만드신 것도 아니고 창세때부터 존재하던 곳이고 이미 존재하던 곳입니다. 이미 존재하던 곳이 예수 믿고 나면 어려움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직장생활 하기도 합니다. 술장사도 하고 색시장사도 할 수도 있습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말처럼 구원받기 전에는 정승같이 쓰기 위해서 개같이 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나면 “아이고 내가 그런 장사해서 되겠는가? 내가 색시장사해도 되겠는가?” 하면서 그것이 마음에 홍해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뚫고 가야합니다. 때로는 오손도손 잘 지내던 남편이 예수 믿고 나니까 갑자가 홍해가 됩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 나가도 살살 나가라, 주일 낮에만 나가지 저녁은 왜 나가느냐? 새벽까지 기어나가느냐?” 하면서 가지마라고 합니다. 때로는 또 뭐라고도 합니까? “목사가 그렇게 좋으냐 그럼 목사하고 살아라” 왜 목사하고 삽니까? “교회 나가도 좋은데 십일조는 절대 안되느니라. 교회 나가도 제사상만큼은 더 잘 차려야 되느니라” 이것이 바로 홍해가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남편이 예수 믿으려고 하면 아내가 홍해노릇을 합니다. 아내가 우상숭배 해가지고 남편이 교회 나가는 것을 딴죽 걸고 못나가게 합니다. 때로는 직장 상사가 홍해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술 잘먹고 노래도 잘 하더니 예수 믿더니 어째서 먹지 않느냐?” 또 때로는 시머어니가 홍해가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며늘애야 니가 교회 나가려면 며느리 사표 내라.” 이러면서 시어머니가 홍해노릇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두신 것이 아닙니다. 원래 있던 것인데 예수 믿고 나니까 그것이 어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건너기 힘든 홍해입니까? 그러나 어려움은 앞에 있는 홍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쫒아오고 있습니다. 바로왕이 열 가지 재앙으로 얻어터지고 마지막 장자까지 죽는 고통을 당하고 나서 할 수 없이 놓기는 놓았지만 남자만 60만, 여자까지 포함해 200만의 노동력을 놓쳤으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장관들을 동원해서 특별병거 600승과 애굽의 모든 군대가 쫒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만히 보니까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쫒아오는데 병거소리가 납니다. 덜커덩 와르릉 쿵쾅 병거소리가 막 나고 쫒아오는데 아 얼마나 괴롭고 두렵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믿고 참 구원받게 되면 처음에는 자기가 성인군자가 된 줄 압니다. 자기가 성자의 반열에 올라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2년지나 3년지나 5년 지나 10년 지나면 자기 속에 죄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이 죄성이 예전보다 더 강한 강도로 공격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 탐욕 없어진 줄 알았더니 남이 가진 것 더 갖고 싶고 욕심이 더 생기고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으로 가득찬 줄 알았더니 미운놈 더 미워지고 거기다가 예전에는 술한잔 먹고 풀 수도 있었는데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과도 한번 원수지면 영원토록 틀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바로왕의 군대 이 마귀의 세력, 더러운 귀신들의 세력이 우리를 쫒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하늘의 하나님과 천사는 기뻐하지만 원수 마귀와 귀신들은 그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쫓아와서 전에는 채찍으로 때렸지만 이제는 병거를 몰고 와서 우리의 죄성을 더 드러내고 우리로 하여금 더 죄악에 빠트리고 죽이고 멸망시키고자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믿음으로 나가자 해서 나가면 되는 것인데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고 원망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 번째 어려움입니다. 14장 10절 11절을 읽어봅니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본 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얼마나 원망을 합니까? 모세가 출애굽의 기수가 되어서 나가자고 할 때에는 우리모세! 우리모세! 하더니 이제는 홍해 앞에서 좀 어려움을 당하니까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와서 수장시키려고 하느냐 하면서 모세를 향해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성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영적인 테스트에서 받은 영적인 실력, 영적인 점수가 참으로 형편없습니다. 이것은 60점미만, F학점입니다. 영적인 실력은 속일 수도 없는 것이고 하루아침에 길러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실력을 길러 주시고자 영적인 훈련을 가하십니다. 그 훈련 제 1호가 바로 홍해훈련이었습니다. 군대에서 훈련병만 훈련 받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병이 훈련을 받을 때는 반드시 교관이 있고 조교도 있고 위생병도 있어 훈련이 필요한 모든 여건이 갖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실 때 너 혼자 훈련 받아라 그런 것 아니라 훈련에 필요한 모든 도움을 다 보내시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려움이 세 가지이면 도움도 세 가지 주시고 어려움이 억만 가지이면 도움도 억만 가지를 주십니다. 우리가 인생 살다가 겪는 어려움은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3. 하나님의 세 가지 도우심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도움은 첫째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도움입니다. 13장 21-22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추어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나가서 길도 모르는데 어디로 갑니까? 구름기둥 불기둥이 앞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쫒아올 때에 두려워하는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앞에 있던 구름기둥 불기둥이 뒤로 옮겨 가는 것이 아닙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애굽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 사이에 거하면서 애굽 군대에는 어둠을 내리고 이스라엘에는 광명을 내리셨습니다. 14장 19-20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기둥도 그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편이 이편
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바로의 군대가 금방 덮칠 것 같았는데 바로의 군대는 접근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함께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바로 성령의 임재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성령이 우리와 동행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반드시 성령체험을 갖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믿으면서 성령체험 한번 없는 사람은 머리신앙만 되고 가슴신앙은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어도 뜨겁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습니다. 성경 공부만 하고 거기서 끝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공부야 누구는 못합니까? 공부한 것으로만 끝나면 소용없는 짓입니다. 거기에 성령의 체험이 가미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체험이 없는 분은 어떻게 예수 믿으면 그렇게 믿습니까? 그런 분은 새벽에 나오셔서 ‘주여 나도 성령체험 갖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다는데 그것이 오늘날 성령
이라고 하는데 나에게도 구름기둥 불기둥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기도해서 성령체험을 꼭 얻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려워도 성령님이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 위기 중에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서 인도하셨습니다. 모세는 바로 신약시대의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인도자 되시고, 우리의 구주 되시고,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의 선생님도 되시고, 형님도 되시고, 친구도 되시고, 상담자도 되시고, 공급자도 되십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육신을 입으셨고 피곤도 하고 매도 맞고 모욕도 당해보셨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몸으로 당하는 고난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치 아니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우리의 연약함을 스스로 몸으로 체험하셔서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있어도 성령님이 함께 계시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이 위기에 위대한 승리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14장 13절로부터 보시겠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찌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애굽사람을 너희가 오늘 보겠지만 내일은 그들을 못 볼 것이다. 그들의 살아있는 모습은 못 볼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너희를 위해 싸우는 것을 한번 구경이나 해라” 얼마나 위대한 위로의 말씀이요 격려의 말씀이요 위대한 승리의 말씀입니까? 우리는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처럼 때론 영적인 홍해훈련을 당해서 절망하고 좌절할 때가 있을지 모릅니다만 그러나 예수님이 함께 계시고 성령님이 함께 계시고 위대한 승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려우면 도움 받을 하나님이 있지 않습니까? 의지할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시기 때문에 우리 삶의 과정 속에 아무리 어려운 광야훈련과 홍해훈련이 있다고 해도 좌절할 필요가 없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재벌가의 아들이 군대가서 훈련을 받을 때에 훈련 받다가 힘들어 죽겠다며 자살해서 죽는다면 우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이고 온실에서 자라가지고 그것도 못 견디고 자살해 죽어? 조금만 견디면 재벌 후계자가 될 것인데…….”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제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만유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재벌보다도 더 위대한 상속권을 가지고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쨌든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만유를 상속할 수 있는 상속권이 있다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 살면서 잠시 훈련받을 때 어렵다고 낙담 좌절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홍해훈련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홍해훈련은 우선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려고 홍해훈련을 이끄신 것입니다. 14장 17절에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라” 홍해훈련의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쫒아오는 애굽 군대를 홍해에 몰살시키시고 영광을 받으신 것이 첫 번째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를 위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은 그 해석을 내려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1-2절에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고 침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에서 침례를 주시기 위해서 그 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홍해훈련은 그러므로 침례훈련인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아무리 봐도 세례가 침례보다 옳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장로교의 태두인 존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침례가 원형이고 세례는 약식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장로교의 헌법에도 침례가 원형이고 세례는 약식이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물 속에 들어가서 푹 잠겨서 예수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고 물 속에서 일으킴을 받아서 예수의 새 생명을 가지고, 부활의 새 생명을 가지고, 의에 대하여 새 생명으로 사는 이 복음을 세례가 상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침례만이 상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례 받은 사람은 천국을 못가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지 침례교가 장로교보다 침례의 측면에 있어서는 조금 더 성경의 원래의 뜻에 충실하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결론
홍해훈련은 바로 침례훈련입니다. 침례란 물 속에 들어가서 죄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물속에 나올 때에는 의에 대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와 합하여 물 속에서 죽고 그리고 예수와 합하여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 침례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죄에 대해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의에 대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로 이끄신 목적은 첫째 죄에 대해서 죽으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부를 때에는 어떻게 대답하라고요? “나는 죽었다.” 라고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죄가 부를 때 “네” 하고 끌려가지 말라는 것입니
다. 처음엔 재미있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낚시 바늘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침례훈련은 첫째로 죄에 대해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가 부르면 의에 대해서는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써 주시옵소서.” 하고 헌신하라는 부르심인 것입니다. 여러분 삶에 어려움 있으십니까? 홍해 앞에 있는 것 같은 어려움이 있으십니까? 그것은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라는 부르심입니다. 99% 헌신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100% 헌신해서 살라고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 부르심 앞에 진실하게 응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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