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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손으로 지은 방주 (창 6:1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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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레저용 보트가 뒤집혀서 일가족 7명이 안타깝게 죽고 말았다. 입파도라는 섬에서 가족들이 야유회를 하고 육지로 돌아오는 중에 사고를 당했다. 섬에서 육지까지는 불과 20분 밖에 되지 않는데 그 배가 뒤집어져서 일어난 사고이다. 배를 타면 무서운 생각이 든다. 왜냐면 배는 우리의 생명과 직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배를 타는 어부들이 많았고, 뱃사람들이 종교심이 강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바다가 무섭고, 배에 조금만 사고가 나면 목숨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큰 배를 지으라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하는 일을 보고서 한탄하셨다. 죄악을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일이 항상 악하였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시면서 마음에 근심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이었다. 인간이 잘못해서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까지도 피해를 보게 되었다.

노아에게 배를 지으라. 정확한 규격까지 말씀하신다. 방주의 길이는 137m(300규빗), 폭 23m(50규빗), 높이 14m(30규빗)의 1만5천t급 정도의 큰 배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가르쳐주신 치수는 가장 안정감있는 선박 치수의 비율이라고 한다. 길이, 넓이, 높이의 비율이 300:50:30은 가장 안정감있는 선박의 치수이다. 이 치수는 조선공학의 기본이라고 한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방주를 짓는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이제는 온 식구들이 방주로 들어가라. 그리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 방주로 들어갔다. 드디어 하늘이 열려 사십일 동안 땅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방주에 들어간 가족들과 짐승은 살았다.

오늘날 교회를 설명할 때에 노아의 방주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성도들이 힘을 모아서 이렇게 귀한 성전을 지었는데 이 성전은 바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방주이다. 그러면 우리의 손으로 지은 방주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먼저, 배는 철저히 물 가운데 있어야 한다. 배를 생각해 보라. 배가 물을 떠날 수 없다. 하기야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배는 물 가운데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시대의 흐름을 읽고 세상을 향하여 열려진 교회가 되어야 한다. 지역을 향하여 열려진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 교회 때문에 동네에 작은 공원이 생긴 것 같다. 분수대 옆에 낮에는 젊은 애기 엄마들이 유모차를 끌고 나와서 쉬고 간다. 오후에는 동네 어르신 분들이 장기판을 갖고 나와서 장기를 두신다. 학교에서 집에 가는 도중에 학생들이 등나무 밑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간다. 이런 모습을 볼 때에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나는 지역 주민들에게 열려진 마음으로 잘 섬기고 싶다. 지역 주민을 위해서 서비스를 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보면서 “베다니교회, 우리하고 가까운 교회이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지역 주민에게 열린 마음으로 잘 섬겨야 한다.
배는 물 가운데 있어야 한다. 물을 떠난 방주는 있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셨다. 예수님이 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신령한 은혜를 체험했다. 너무 좋아서 우리가 밑으로 내려가지 말고 이곳에 초막을 짓고서 살자고 베드로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하면서 고백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기에 머물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변화산신드롬. 변화산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배타적이고, 다른 사람들과 잘 섞이지 않는 모습이다. 교회는 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배가 물을 떠나서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손으로 지은 방주도 마찬가지이다. 이 방주는 세상 가운데 떠 있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이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가 무엇이고, 이 시대에 필요한 선교적인 전략이 무엇인지 안테나를 높이 세워야 한다. 레너드 스윗 박사가 서구교회는 거의 죽어간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변화되는 세대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방주는 물을 떠날 수 없고, 물 가운데 있지만 분명한 점은 방주는 물과 구별된 점이 있어야 한다. 물 안에 있으면서도 물과 구별된 점이 없다면 그것은 방주가 아니다. 그렇다면 구별되는 점이 무엇인가? 본문의 말씀을 보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나 ....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리라. 새가 종류대로, 가축이 종류대로 방주로 들어가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리라.”

방주가 물 가운데 있지만 구별되는 점은 “방주로 들어가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리라.” 방주의 구별은 생명에 있다. 배가 물 가운데 있어야 되지만 배가 물과 구분이 되는 점은 “생명을 보존하리라.” 배가 뒤집어 지면 생명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배가 순항하면 생명을 보존한다.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곳이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지만 구별된 점은 생명에 있다.

지난 주 중에 온양온천에서 회의가 있어서 기차타고 다녀왔다. 기차를 기다리는데 어느 할머니가 역 주변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한 봉지 만큼 풀을 뜯고, 기차가 도착하자 급히 타는 바람에 지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여객전무를 불러서 온양온천 역 주변에 혹시 지갑이 떨어진 것이 없는지 찾아 달라고 애원한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말하자 이 할머니는 몹시 실망하고 불안해 했다. 풀 한 봉지 때문에 지갑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등포 역에 거의 도착할 때에 “아니 여기있네”하면서 그렇게 기뻐하고 있다. 깊이 넣어 둔 것을 몰랐다. 승객이 모두 알아듣게 소리를 지르며 여기에 있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풀 한 봉지 때문에 지갑을 잃어버릴 수 있다. 풀 한 봉지 때문에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 가장 소중한 생명을 잃어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우리의 손으로 지은 방주가 왜 이렇게 소중한가? 여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배는 물 가운데 있지만 물과 구별된다. 그것은 바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에 있다.

두루미 한 마리가 먹이인 달팽이를 찾아 냇가를 거닐고 있는데 아름다운 백조 한 마리가 근처에 날아와 앉았다. 백조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두루미가 "너는 누구냐?"하고 물었다. "나는 백조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너는 어디서 왔느냐?"라고 두루미가 또 물었다. 백조는 "천국에서 왔다"고 하면서 천국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했다. 그러자 두루미가 가로막으며 "그런데 천국에도 달팽이가 있니?"하고 물었니다. "아냐, 미안하지만 없어"라고 백조가 대답한다. "그렇다면 난 천국에 가고 싶지 않아. 난 달팽이를 좋아하는걸!"하고 두루미는 잘라서 말했다.

세상에 좋은 것을 따라가느라고 가장 소중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교회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세상 가운데 있으면서 세상에 구별된 메시지를 전한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생명을 보존하리라.” 요즈음에 황우석 박사의 연구 결과로 온 세상이 떠들썩하다. 왜 그런가? 그 연구 결과로 생명을 좀더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손으로 지은 이 방주는 세상 가운데 있지만 분명히 구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너의 생명을 보존하리라.”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우리의 생명이 보존되는가? 줄기세포가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본문 말씀을 보라.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리라.” 생명을 보존케 하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이다.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께서 맺으신 약속의 징표이었다. 우리 손으로 지은 이 방주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의 징표이다.

요한1서 2:25의 말씀을 보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께서 맺으신 약속이었다. 방주 안에 들어가면 생명을 보존하리라. 방주는 하나님 약속이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지 확인하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그러니 얼마나 소중한가?

운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봤다. 뉴질랜드나 태국 같은 나라에 가면 차가 왼쪽으로 가는데 우리나라는 오른쪽으로 간다. 그것은 서로의 약속이다. 내가 만일 중앙선을 넘어서 반대 차선으로 달려간다면 나는 오래 못 산다. 교통사고가 난다. 몇 일 전에 오토바이가 신호를 무시하고 좌회전하다가 바로 앞에서 사고가 나는 것을 목격했다. 하다못해 우리끼리 정해 놓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중앙선을 넘어가면 생명에 지장이 있다. 신호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맺으신 그 약속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 이 약속이 얼마나 소중한가? 교회는 바로 이 약속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다시 확인하여 생명을 살리는 사명이 있다. 그러니 우리 손으로 지은 방주가 얼마나 소중한가? 브라질 상파울로 시립 묘지의 비석에 모두 똑같은 표시가 있다. 태어난 날에는 별, 죽은 날에는 십자가를 하였다. 관리인에게 물으니 관리인의 대답이 "사람들이 이 세상에 출생할 때는 저마다 스타(별)인 것처럼 태어나지만, 갈 땐 저 길 밖에 더 있겠어요?" 예수께서 우리와 맺은 영생의 약속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 손으로 지은 이 방주를 보라. 이 방주는 물을 떠날 수 없다. 이 교회는 세상 한 가운데 있어야 한다. 세상을 향하여 열려진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지역을 향하여 열린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너의 생명을 보존하리라.” 생명에 있다. 우리 손으로 지은 이 방주를 통해서 예수께서 우리와 맺은 그 약속을 온 세상에 전하고, 그 약속을 다시 확인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한다.
(곽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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