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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은 열정을 회복해야 할 때 (사 40: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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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칭 아저씨와 아줌마 세대를 가리켜서 중년이라고 합니다. 어느 글에 보니까 아가씨와 아줌마의 차이를 아주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 "언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 찜찜하면 아가씨이고 기분이 좋으면 아줌마라고 합니다.
· 여름에 운전할 때 썬글라스 끼고 팔목을 드러내놓고 운전을 하면 아가씨이고, 차양 달린 모자를 쓰고 목장갑 끼고 운전하면 아줌마라고 합니다.
· 화장실에서 나올 때에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흔들고 나오면 아가씨이고, 치마 끌어올리면서 나오면 아줌마라고 합니다.
· 버스나 전철에서 빈자리가 생겼을 때에 좌우를 살피고 조심스레 앉으면 아가씨이고, 핸드백을 집어던지면서 몸을 날리면 아줌마라고 합니다.

중년기를 연구한 어느 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년이 되어서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영적으로 아무런 위기 없이 보낸 사람을 열 사람만 찾아 낼 수 있다면, 그 사람 이야기 하나로 책은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당당한 아저씨와 아줌마의 중년 세대에 영적, 심리적, 육체적, 사회적으로 위기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년의 시기에 겪는 가장 심각한 위기는 서서히 삶의 열정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에 꾸었던 꿈도 희미해져갑니다. 젊었을 때에 품었던 열정도 식어져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정입니다. 일에도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도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이 식어져 버리면 일에 대한 의욕도 없습니다. 사랑도 식어집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열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에 열정이 불타 오르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예배 드리는 여러분의 마음에 성령의 불이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은 죄악이 관영한 흑암의 시대입니다. 지금은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을 좇는 유혹의 시대입니다. 때문에 지금 이 시대를 능력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마음에 성령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열정이 불타올라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불이 꺼지면 우리 인생은 불 꺼진 제철소 용광로처럼 딱딱하게 멈춰버리고 말 것입니다. 마음속에 열정이 식으면 우리의 심령은 굳어진 용광로처럼 아주 차갑게 굳어지고 말 것입니다. 마음의 굳어짐은 바로 우리 인생의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의 굳어짐을 면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성령의 불로 심령을 뜨겁게 불태우십시오. 오늘 여러분이 주 앞에서 참으로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신다면 심령을 성령의 불로 태우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복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심령에 성령으로 충만하십시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그 삶에 열정이 넘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성령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면 식었던 열정이 다시 회복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나마 남아 있던 열정도 식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마음이 완전히 굳어집니다.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마음 밭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찬송을 불러도 마음에 감동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답답하기만 합니다. 마음에는 고집만 완악해 질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불로 여러분의 심령에 감동을 회복하십시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받으십시오. 받아서 복된 인생을 사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으로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지금 몇 주간에 걸쳐서 계속해서 성령 받으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철학적인 종교 놀이에 머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도 세상 놀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렇습니다. 포기하십시오. 버리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섬기십시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갈급함을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나의 맘의 갈급함 채우네
오직 주께만 더 가까이 가기를 원하네
주님만 내 갈급함 채우네 주만 내게 새생명주네
주만 기쁨 내맘에 주시네. 나의 기도 응답하시네."

사랑하는 여러분, 내게 새생명을 주시는 주님만 의지하십시오.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갈증,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을 주의 성령으로 채움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주 안에서 우리의 열정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 앞에서 예배 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심령이 성령의 능력으로 열정을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믿음에 열정이 사라진다면 믿지 않는 것보다 못할 때가 많습니다. 헌신에 열정이 사라진다면 불신자보다 못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의 헌신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업적을 남긴 사람들, 이 시대를 변화시킨 사람들, 인류에게 희망을 준 사람들,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사람들은 모두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도 열정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인생 여정에서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을 잘 믿어서 복된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자녀들에게 믿음의 가문을 이어주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신앙생활에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정열소진(情熱燒盡)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욕에 불타 충실감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일을 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마치 정열이 소진된 것처럼 의욕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삶에 열정이 없습니다. 이것은 공부를 하거나 직장에서 일을 하는데도 정열소진 증후군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 생활을 하거나, 사업을 하는데도 정열소진 증후군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데도 정열소진 증후군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요한계시록 3장 14절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의미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서 미지근한 곳에는 부패하기가 가장 쉽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부부간에도 사랑이 미지근하면 바람을 피우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언제나 미지근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도 "네가 미지근하여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므로 내가 너를 내 입에서 뱉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안에서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준 일에 열정을 가지십시오.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간곡히 부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에 성령께서 주시는 열정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그래서 삶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비전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일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헌신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인류가 누리고 있는 역사적인 산물들은 모두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작품들입니다.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문화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열정을 가진 사람을 들어서 축복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열정을 품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마음에 성령께서 주시는 열정으로 가득찬 한 사람이 사회와 나라를 구했던 일들은 역사 속에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무식한 사람이라고 사회에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디엘 무디의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미국 사회에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하며 바쁠 때는 더 많이 기도하던 마르틴 루터의 열정이 독일과 유럽의 교회를 영적인 어두움에서 깨어나게 했습니다. 웨슬리는 육십 년 동안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기도했고,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한 편의 설교를 하고 한 사발의 피를 토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시대는 열정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열정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을 품으십시오. 생명에 대한 열정을 품으십시오. 한 영혼의 구원에 대한 열정을 품으십시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열정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열정은 항상 비전과 맞물려 있습니다. 열정과 비전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전은 우리가 장래에 이루기를 원하는 소망에 대한 그림입니다. 그리고 이 비전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비전이 분명해지면 꺼지지 않는 불길이 마음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점차 그 불길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여 어떤 장애물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전이 희미해지면 열정도 식어집니다. 마음에 열심도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앞에서 비전을 다시 붙잡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열정을 품으십시오.

마지막 때에 우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청년들은 환상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비들은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어떻게요? 성령이 임하시면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다시금 열정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여러분이 열정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제가 고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교회에 가면 자주 듣던 말이 있습니다. "불 받아라! 성령의 불을 받아라!" 오랜만에 저도 이 말씀을 외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불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이 마지막 시대에 쓰임 받는 하나님의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시편을 보면, 거기에는 우리들보다 몇 십 배 더 답답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들보다 몇 십 배 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답답한 문제 상황에서 탄식하고, 한숨쉬고, 신음하는 소리를 토해 놓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마음만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그 모진 어려움들을 딛고 우뚝 일어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답답하십니까? 힘들고 어렵습니까? 억울하십니까? 그럴수록 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뜨거운 믿음의 사람으로 일어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나는 선지자도 답답함과 어려움 가운데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젊은이들은 모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렇게 고통의 시간들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벌써 한 세대가 지나고, 또 한 세대 오건만 고난의 시간은 끝이 없습니다. 1년, 2년 10년, 20년, 기다림의 시간들이 지나가면서 이제는 깊은 패배 의식이 그들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좌절과 절망 가운데 서 있습니다. 몸부림치며 민족의 해방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끝났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기도도 나오지 않습니다. 27절 말씀은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안 된다, 이제는 끝났다, 하나님은 내 사정은 몰라주신다, 이렇게 원통한 일이 쌓여 가는데도 하나님도 알아주시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은 깊은 실망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며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있었고,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 사명을 감당했던 선지자도 깊은 실망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이대로 이 민족의 역사는 접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모든 희망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이사야 40장부터 66장까지 성서신학자들은 제2이사야라고 분류합니다. 이 부분은 포로기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부분의 첫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깊은 실망과 좌절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종에게 말씀합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내 백성을 위로하라." 6절의 말씀입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9절입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말고 소리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넘어져 있는 하나님의 종에게 계속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이르러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들려주시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서려 있습니다. 자녀가 아파서 울고 있으면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깝고 찢어지는 듯 합니까? 쓰러져 있는 하나님의 종, 실망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말씀마다에 서려 있습니다. 희망도 없고, 그래서 삶의 열정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라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가 어찌하여"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고 싶어서 안타까워하시는 음성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기를 원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너희가 내 마음을 아느냐? 안타까움에 찬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그러나 힘들어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문제의 해법을 먼저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나중에 그 말씀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해방을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부터 말씀합니다. 그들은 문제를 먼저 보고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먼저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먼저 알아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를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십시오. 삶의 형편이 힘들고 어렵습니까? 환경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본문 28절을 다같이 힘차게 읽겠습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어떻게 소개되고 있습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금도 세밀하게 돌보고 계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날마다 힘을 더해 주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약한 자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방전된 밧데리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땅 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약한 자에게 계속해서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걸어갈 수 있게 하십니다. 상한 날개를 치유해 주십니다. 지쳐서 쓰러지지 않도록 날마다 새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확인시켜 주신 다음에 요청하는 것이 있습니다. 네가 일어서기를 원하느냐? 너희들이 다시 시작하기를 원하느냐? 너희들의 열망이, 비전이 회복되기를 원하느냐? "여호와를 앙망하라." 다시 일어서기를 원하느냐? 여호와를 앙망하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호와를 앙망하십시오. 여기에서 '앙망'한다는 말은 NIV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KJV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야웨 하나님을 믿고 바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앙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보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복음의 열정이 회복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다보면 비전의 열정이 회복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다 보면 삶의 열정도 회복되지 않겠습니까?

앙망하라는 말씀 속에는 "내가 너를 돕기 위해 다 준비되었다. 너는 나를 바라보아라"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다리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슴의 심볼을 가슴에 달고 다녔습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하나님에게 늘 목마른 사슴입니다. 내 주님의 은혜의 강가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그 뜻을 담고 있습니다. 목마른 사슴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선지자는 비록 현실의 환경이 어려워도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삶을 온전히 살고 있습니다. 기운찬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환경이 어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으나 찬송합니다. 수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그는 신뢰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뒤통수를 치는 그들의 음해 앞에서 몸이 떨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히브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하늘을 날개짓해 가는 독수리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바람이 거셉니다. 그러나 더욱 힘있게 날개짓해 가는 독수리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태양 빛이 이글댑니다. 그러나 더운 열기를 뚫고 창공을 향해 치솟고 있는 독수리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참새는 제 날개로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바람의 힘을 이용하여 납니다. 바람이 불면 참새는 나가떨어집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수록 독수리는 더 힘차게 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이렇게 창공을 나는 독수리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바람을 타는 사람입니다.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파도를 타는 사람입니다. 그는 환경에 지배받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의 눈은 성령으로 불타고 있고, 그의 가슴은 하나님 나라로 인해 뜨겁습니다. 그의 심장에는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강한 용사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냥 예배에 나와서 앉아 있다가 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생이 하나님 앞에서 기운찬 영혼의 소유자들로, 비상하는 독수리처럼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열정적인 삶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결심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27절에 보면 우리가 열정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비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벗어버려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패배주의입니다. 불신앙입니다. 부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사주팔자를 따지는 운명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는 결단코 창공을 나는 독수리와 같은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위대한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장 첫 부분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가 열정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불신앙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열정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단순히 벗어버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덧입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풀어버려야 할 것, 벗어버려야 할 것도 있지만 반드시 덧입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28절 말씀은 덧입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덧입어야 할 것은 바로 믿음의 옷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옷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답답해도, 아무리 어려워도 믿음의 옷을 벗지 마십시오. 오늘 선지자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그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절대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의지하면 비록 지금은 상황이 어려워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나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찬송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울 때에 믿음의 옷을 입으십시오.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있을 때에 찬송의 옷을 입으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는 다시금 신앙 생활에서 열정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초점 맞추기입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사람은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사람은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십시오. 여호와를 앙망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치유하셔서 날게 하십니다. 일어서게 하십니다. 회복시켜주십니다. 부흥을 일으켜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상한 날개로는 날 수가 없습니다. 이 시간 성령님께서 나를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나의 상한 날개가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라 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상한 심령이 치유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상한 가정이 치유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상한 인생이 치유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상한 몸이 치유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고통스럽고 눈물로 얼룩진 문제들이 성령께서 치유하셔서 우리 모두가 독수리 같이 열정을 품고 날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 전혀 없을 때에
조용히 다가와 손잡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나의 실망하며 내 자신 연약해 고통 속에 눈물 흘릴 때에
못자국 난 그 손길 눈물 닦아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열정의 불을 끄지는 마십시오. 그 불이 다시 일어날 불씨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불씨가 있어야 거기에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불씨를 쓰십니다.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에서 삶의 열정이 없이 산다는 것처럼 비극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안에서 삶의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믿음의 열정을 다시 회복하십시오. 복음의 열정을 다시 회복하십시오. 헌신의 열정을 다시 회복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에 열정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정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사명에 대한 열정이 뜨거워지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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