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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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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를 믿고 거듭난 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마음에 한없는 기쁨과 감사의 심정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왠지 모를 마음에 한 가지 고민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새로운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 우리는 온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습관 심지어는 삶의 성품과 성향까지 달라지고 발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전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의 모습에 대하여 실망될 때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평가하는 것에 마음상하고 마음에 심히 낙심이 될 때 우리는 더욱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기대 수준은 향상되지만 현실 속에 나 자신을 보면 실망하고 심지어는 실망조차 안 하고 당연한 그 수준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보고 마음에 심히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우리가 삶을 살아오면서 많은 세월을 살아온 분들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오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사람이라면 모두가 사람은 변화되기 어렵다는 것을 많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참 변화되기 어려운 사람들, 그 변화되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변화를 기대하기 보다는 오히려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내 자신에게도 ‘그저 나는 생긴 대로 사는 것이야’라고 포기하고 마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나 자신이나 상대에 대한 변화를 기대하다가는 오히려 상처가 더 크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마음을 접고 마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를 고치신다는 소망 이것이 없다라면 우리는 그 지긋지긋한 변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하여 무슨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대하다가도 그저 부딪기는 여러 사람을 볼 때 그 사람과 어떻게 해서든지 끝까지 가야한다면 부딪치는 과정 가운데 서로를 타협하고 또 서로를 알고 소화해 가면서 어려움을 겪고 살아가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냥 슬쩍 피해버리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딪치지 않고 좋게 대해주고 피해가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관계는 또한 한번 깨지면 쉽게 복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깨진다고 생각하지 않고 끝까지 그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수없이 용서받고 살아가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그런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이해라는 것은 내가 상대방을 이해해 줄때 가능한 것이지 상대방이 나를 이해하기를 요구하는 순간 그것은 우리들에게 이해라는 단어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나를 좀 이해해주세요” 하는 말은 상대방에게 마치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들려져 전혀 납득이 안 되고 우리에게 이해의 부산물은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다만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때 이해라는 말이 사용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정말 내 자신이 변화되는 수밖에 없고 내 자신이 새로워지는 수밖에 없는데 나는 왜 이렇게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냥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오히려 때로 생각해보면 마음의 기대수준은 높아지는데 내 모습은 그대로 머물러 있으니 더 낙후된 듯한 모습 속에 우리는 마음에 많이 실망하게 되고 때로는 그저 우리 자신에 대하여 그렇게 살고 만다는 실망을 가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과연 주님께서 우리의 생활이나 혹은 삶의 태도에 있어서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생활태도에 있어서 ‘이제는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입으라’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은 간단히 두 가지로 우리들에게 요약됨을 봅니다. 하나는 ‘너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 그리고 ‘너희는 새사람을 입으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가슴 아프게 들리는 이유는 오늘 성경말씀을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활에 변화가 없고 진보가 없는 답답한 성도들을 향하여 하는 소리며 그것은 바로 우리를 향하여 나 자신을 향하여 주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마음에 답답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깨닫고 마음에 각오하고 또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주님 앞에 새로운 소망을 입은 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오늘의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먼저 성경을 보게 되면 ‘너희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옛사람의 모습대로 살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의 옛사람을 모습은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을 보니 17절 ‘그 마음에 허망한 것으로 행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에 살고 새로운 꿈에 살고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고 새로운 생각 속에 새로운 행동과 새로운 습관 속에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중에 아직도 그 마음에 허망한 것으로 생각하는 아직까지도 헛된 것으로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헛된 욕심 내 이기적인 생각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아니함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함 내 마음에 탐심을 채우려고 함 이와 같은 헛된 허망한 것들, 허망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벗어나려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생각임을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생각에 인간의 욕심 내 마음의 정서적 만족 그리고 내 마음속에 어떤 감정적인 충족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허망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짐으로 생명에서 떠나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18절을 보니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리고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졌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생명 속에 살고 있으면 생명의 능력이 우리들에게 공급되어 우리들에게 힘으로 활기 있게 우리들에게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총명의 눈이 어두워지고 내 마음이 굳어지고 무지해지니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지 못합니다. 마침내 감각이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함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고 1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감각이 없어지고 무뎌집니다. 나중에는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살지 말아야 되는지 구별이 없어지고 내가 예수를 믿고 있는데 이제는 양심의 가책조차 없이 이전에 내가 하던 일을 그렇게 쉽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방탕에 방임해 버리게 됩니다. 방탕하게 살고 하나님이 뜻과 상관없이 죄악의 욕심대로 인간의 성정대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것을 거부할 힘조차 없고 마음에 느낌조차 없이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욕심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그 가운데 편하게 머물고 있는 것입니까? 유혹의 욕심을 따라 움직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의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언제나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찾아 해매며 우리를 올무에 씌우려고 합니다. 여러분 사단이 꼬이지만 않았으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홀리지만 않았으면 우리는 지금도 평안한 은혜 속에서 고통과 죄악과 외로움 없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이 우리를 그냥두지 않아요.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가서 마음을 꼬이고 마음을 유혹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도전하게하고 결과적으로 낙원에서 추방당하는 죄악을 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사람에게 사단은 즉시 찾아와 그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전투적인 자세로 세상과 싸워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전투적인 자세로 사단과 싸워 하나님의 법을 이루는 삶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 사도 바울도 자신의 내면세계에 영적인 전투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가면 결국 우리는 썩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아닌 사단의 유혹은 결국 우리를 부패하게 하고 냄새나게 하고 멸망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힘을 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과거의 옛사람을 깨뜨리기 위해서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나도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이와 같은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와 은총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새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요. 새사람이 되었으면 이전과 뭔가 달라야 합니다. 이전의 삶이 불편해야 합니다. 이전의 삶을 불편하지 않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뭔가 우스꽝스런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꼭 1년 전인 것 같습니다. 다음 주일에 제자훈련 수학여행을 떠나니까요. 작년에 제자훈련 수학여행 때의 일이니까 꼭 1년 전인 것 같습니다. 수학여행을 가는데, 올해는 남자성도님들이 열분 가시고 여자성도님들이 오십분 정도 가시는데 작년에는 교역자를 제외하고 남자성도님들이 일곱 분 가셨습니다. 작년에는 가까운 일본으로 역시 2박 3일 동안 역시 수학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때가 여름이라서 제가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나이보다 두세 살 정도 적은 남자집사님 한분이 저를 유심히 보시더니 ‘목사님 체형에 변화가 오는 때가 왔군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심히 보는데 어디를 보느냐 하면 제 배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난 다음부터 온몸에 처신이 불편해지는데 배에 힘을 주고 다니게 되더라고요. 티셔츠를 입으면 배가 좀 나오잖아요. 그래서 제가 충격을 받았는데 또 뭐라고 하시냐면 ‘목사님 체형의 변화가 올 때에는 조심하셔야 됩니다.’ 그러면서 ‘운동을 하셔야 됩니다’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체형의 변화 체형의 변화’라는 얘기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여름에 수학여행을 갔다 와서 그때부터 체중을 10㎏를 줄였습니다. 10㎏를 줄였는데 문제가 그 다음에 생기더라고요. 10㎏를 줄이니까 어떤 문제가 생기냐면 옷이 맞는 게 없어요. 제가 입고 있는 모든 사이즈에서 티셔츠부터 안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어려운 것은 아무래도 목사는 공적인 장소에 다니기 때문에 거의 양복을 입고 다니는데 양복이 맞지를 않는 것입니다. 제가 허리가 9㎝가 줄었거든요. 9㎝가 줄고 나니까 양복을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 겹쳐지고 겹쳐져도 흘러내려서 제대로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먹 두 개를 넣어도 남더라고요. 그때 양복바지는 그렇다고 치고 또 윗도리도 굉장히 헐렁한 게 입기가 어려웠습니다. 겨울옷은 옷을 두껍게 입으면 되는데 여름옷은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전에 제가 늘였던 옷은 다시 줄여 왔습니다. 늘였다 다시 제가 줄여서 입고 왔습니다. 그런데 또 귀찮은 것은 사람이 바뀌니까 그전에 누리던 모든 삶이 다 불편해 지는 것입니다. 옷도 달라지고 모든 게 달라지고 불편해 지는 거예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무엇인가 달라지고 새 사람이 되었고, 무엇인가 예수 안에서 새로워졌다면 이전에 내가 살고 있던 모든 삶이 다 불편해야 합니다. 내가 이전에 어떻게 살았던 그 삶이 다 불편하게 느껴져야 내가 실제적으로 달라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전에 살던 삶이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아요. 불편 없이 대화하고 불편 없이 살던 대로 살고 불편 없이 그래도 누린 대로 누린다면 내가 변화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정말 새로운 사람을 입었고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면 이전에 내가 누리던 모든 것이 다 불편해서 그것을 고치거나 바꿔야만 내가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전에 내가 살던 방식으로 살면 안됩니다. 그것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즉 이 바지를 입는데 도저히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으면 바지가 그냥 붙어있지 못하고 너무나 불편해서 줄여올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글쎄 이런 말씀드리면 재미있으실 텐데요. 저는 목사니까 양복이 여러 벌 있습니다. 양복이 여러 벌 있는 그 중에서도 겨울 양복이 더 많습니다. 이제 여름 양복이 아무래도 기간도 짧고 하니까 여름 양복이 더 적습니다. 저는 겨울 양복을 입는데 아무리 더워도 입을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겨울 양복을 입습니다. 다른 분들이 왜 이렇게 겨울 양복을 입느냐고 여름 양복을 입으라고 해도 저는 잘 안 입습니다. 왜냐하면 여름 양복이 겨울 양복에 비해서 몇 가지 안 되니까 여름 양복은 조금 짧게 입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겨울 양복을 오래 입습니다. 그런데 겨울 양복을 입으면 도무지 더워서 안 되겠다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여름 양복으로 갈아입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여기 겨울 양복 입고 계신 분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날씨가 더워지면 뭔가 바뀌면 겨울 양복을 입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겨울 양복을 벗고 여름 양복을 입으면 왜 이렇게 가볍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게 편안합니다. 여러분 조금만 가을 돼보세요. 여름 양복 벗고 겨울 양복 입으면 무겁게 느껴지지 않고 그것이 푸근하게 느껴집니다. 느낌이 그렇게 다른 것입니다. 그 푸근하게 느껴지던 겨울 양복이 무겁고 여름 양복이 가벼워지더니 그 가벼운 여름 양복이 정말 우리들에게 서늘해지고 겨울 양복이 푸근해 지는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절이 바뀌면 우리는 거기 그냥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가 바뀌면 우리는 다른 것도 바꿔야 합니다. 제가 이번에 여름 양복을 다시 1년 만에 입으면서 도저히 입을 수가 없어서 제가 4벌을 구입한데 가서 고쳐왔습니다. 그랬더니 윗도리 뜯어서 다 고쳐 새 옷을 만들더라고요. 고쳐준다고 해서 갔는데 너무 너무 미안해서 제가 할 수없이 한 벌을 샀습니다. 4벌을 고치는데 그래도 한 벌은 사야지 그냥 고쳐준다고 하는데 그냥은 못 오겠어서 한 벌을 구입 했습니다.

우리가 바뀌면 이전에 살던 대로 못삽니다. 더워지면 여름 양복 입어야지 겨울 양복 그대로 입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사람이 되었는데 이전에 누리던 삶이 불편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전에 누리던 삶이 불편해서 우리는 못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면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야 돼요. 여름이 오면 여름 양복 입어야 하고, 겨울이 되면 겨울 양복을 입어야 합니다. 겨울에 여름옷 입을 수 없고 여름에 겨울옷 입을 수 없는데 우리는 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내가 누리던 게 마냥 재미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미있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불편해서 도저히 할 수 없어서 고치든지 버리든지 새것으로 구입하든지 해야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과거에 누리던 것이 정말 싫습니까? 과거에 누리던 것이 정말 불편해요? 도무지 그렇게 살지 못해서 내가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래야 우리가 새로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은총의 백성이에요. 우리는 값싼 복음이라고 얘기하지요. 내가 값없이 받은 복음 내가 값없이 받은 구원의 은혜, 값싼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그것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정말 값싼 복음을 소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 구원의 감격이 흐르고 그것이 나아가서 나를 기쁘게 하고 내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내가 살고 있는 주변 사회와 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값싼 복음으로 전락되지 않으며 우리는 복음이 고귀한 것 되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런 변화 없이 그저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내가 구원을 받았고 다른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우리는 내 자신 하나를 위해 산다면 우리는 값싼 구원을 얻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 된 성품에 따라 결국 욕심이 우리를 좌우하게 되고 그 욕심이 우리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욕심이 무엇입니까? 그릇된 욕구와 소망 그리고 집착이에요.

그릇된 소망과 욕구가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게 욕심이고 그릇된 것에 집착하는 것이 우리의 욕심입니다. 왜 벗어나야 될 것을 벗어나지 않고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방탕에 우리를 방임하며 과거에 가졌던 우리의 죄악의 욕심에 우리의 마음대로 일어나는 육신의 성정 속에 우리를 방치하게 되는 것입니까? 옛사람대로 살면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빛과 의로움과 은혜의 기쁨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빛을 상실하게 됩니다. 의로움을 상실하고 은혜를 상실하고 기쁨을 상실하게 됩니다. 다른 이들을 어렵게 만들고 주의 성도를 어렵게 만들고 나아가는 불신 세상의 사람들까지도 어렵게 만들고 하나님의 빛을 가려 복음의 방해가 될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까지 가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불편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날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아침 해가 뜨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삶이 또 하루 새로워져야 합니다. 한 달이 감과 같이 또 한달 새로워져야 합니다. 여러분 늘 말씀드렸지요. 지난달과 이달이 달라야 합니다. 작년과 올해가 달라야 합니다. 무엇인가 우리의 삶 속에 새로운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것을 누릴 수 있는 은혜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작년과 같이 비슷하게 살았는데 불편함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발전한 게 없는 것입니다. 몇 년 지나도 내 삶이 비슷하고 불편함이 없다고 하면 우리는 뭔가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나는 달라졌는데 내가 하는 행동은 똑같은 것입니다. 큰 옷 입고 있든지 아니면 꼭 끼는 옷을 입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왜 새 것이 되어 이전의 더러운 모든 습관들을 우리는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적어도 우리는 목욕 한번 해도 우리는 새로운 속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목욕 한번 해도 우리는 새로운 것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귀한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내가 이제 과거의 사람들이 싫어지는 것입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은혜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 말씀합니다. ‘너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안타까운 것은 이 말씀이 불신자를 향한 말이 아니라 기존의 성도들을 향하여 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성도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오직 너희들은 그리스도를 이 같이 배우지 아니 하였느냐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데 너는 과거의 옛사람처럼 살아가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배우지 않았고 이제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네가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니 너희는 이렇게 있을 수 없고 새사람을 입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새사람을 입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바른 배움과 가르침을 받는 가운데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배운바 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인생들을 보면 어떤 잘못된 부분을 공격하거나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은 불쌍해서 연약해서 알지 못하고 끌려 다니고 알아도 힘이 없어서 우리는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누추하게 행동하고 마음먹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는 그것이 자기 수준이 되어서 그 모양을 벗지 못하고 가엾이 살아가게 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의 방법은 정말 자아를 부인하고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을 따르는 것밖에 없지만,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한 마디 말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정직하게 사세요. 그 정직하게 산다는 한 가지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얼마나 많은 수련을 쌓아야 합니까? 믿음대로 사세요. 믿음대로 살아야 한다는 그 한마디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옵니다.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십계명을 지켜라.’ ‘다 지켰습니다.’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이 청년은 재물이 많아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청년에게 재물이 많은 것을 주님이 아셨어요. 그가 재능이 많았거나 지식이 많았거나 그가 주변에 인간관계가 훌륭하다면 주님을 그것조차 요구하셨을지 모릅니다. 근심하며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소망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으려고 밤에 찾아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직접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의 떡을 먹고 능력의 역사를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기 전까지는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배운 대로 산다는 것은 실천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늘 우리는 선언적 삶이 아니라 실천적 삶을 살려고 하는데 정말 그 실천적 삶이 우리들에게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새 사람을 입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결국 우리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배운바 대로 못 삽니까? 절실히 느끼지 못하고 대강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의지가 악하거나 혹은 약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악한 마음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성의 본질입니다. 남을 상하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그래야 내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아요. 그러나 시간 지나면 결국 그것이 내 마음을 더욱더 상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날마다 우리는 벗어버린 옛 사람의 모습을 다시 뒤집어서 쓰지 말아야 합니다. 한번 벗어난 것을 우리는 다시 뒤집어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새 사람이 됩니까?
오늘 성경에 기록된 대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버려야 합니다. 이전의 나의 삶을 절연하고 정산해야 합니다.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으로 지음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새롭게 돼야 합니다. 마음이 새로워야 말이 새로워지고 말이 새로워져야 우리 행동이 새로워지고 행동이 새로워져야 우리의 습관이 새롭고 결국 우리 인생이 새로워지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새로움을 입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새로운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의 겸손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의 간구들이 우리 가슴을 채워 마침내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가슴이 시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로워야 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거룩함을 사모하는 삶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쉽지 않으나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기도 합니다. 결국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은 우리의 성령충만하며 애절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 삶의 근본을 벗어나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의 성향이 바뀌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의 성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한 곳에서 그 사람이 그러하면 다른 곳에서도 다 마찬가지에요. 교회에서의 모습, 가정에서의 모습, 직장에서의 모습, 혹은 학교에서의 모습, 아니면 모든 인간관계의 모습, 사실 보면 거의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는 이렇고 저기서는 다른 거 아니에요. 처음에는 은폐할 수 있지만 시간 지나면 달라집니다. 여러분 우리 헌법 보면 장로를 선출할 때 무흠 5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5년 동안은 지켜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1년, 2년 정도는 자기를 다 드러내지 않고 은폐할 수 있지만 5년 정도 시간이 흘러가면 결국 자신의 모습을 다 드러내게 된다는 뜻 아닙니까? 그러니 사람 잠깐 보고 판단하지 말고 오래보고 판단하라는 말 아닙니까? 결국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근본적인 성향을 고쳐야 합니다. 잠시 우리의 표피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향을 고쳐야 합니다. 한곳에서 불평하는 사람은 다른 곳에 가서도 역시 마찬가지에요. 만족하지 못해요. 성향이 그렇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 환경을 바꾼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끊임없이 내 자신이 변화되어 내 성향자체가 바뀌어야 만족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내 자신을 내려놔야 합니다. 내 자신의 부인은 무너짐이 아니라 새로운 건축입니다. 더욱이 자신을 움직일 수 있는 절대적인 감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만한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해요. 우리 스스로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부여잡고 ‘나는 절대 변하지 않아.’ 하고 우리 스스로에게 기회를 봉쇄해 두면 안됩니다. 내 스스로에게 기회를 부여해야 합니다. 빠른 판단, 그리고 빠른 단언을 내리지 말고 하나님이 언제든지 나를 바꾸어 볼 수 있고 하나님이 언제든지 나는 마음이 새로워 질 수 있다는, 마음이 달라질 수 있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새로움과 발전을 추구하매 두려움을 버려야 합니다. 안주에 대한 욕구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합성되어 우리는 언제든지 새로운 발전을 추구하려는데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내 생각 바꾸면 나는 무너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에요. 내 생각 바꾸면 나는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 바꾸면 새로운 은혜의 세계가 열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정말 상대안함이 최고의 방법이라는 불쌍한 결론을 가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 사람하고는 가급적 부딪치지 말고 상대하지 말고 가야지, 부딪쳐봐야 좋은 것 없으니까 상대하지 말고 좋게 지나가야지.’ 얼마나 불쌍한 결론입니까. 우리는 정말 얼마나 불쌍한 상태입니까? 우리는 사람의 마음에 기대를 가질 수 있을 정도의 소망을 가진 삶이 우리들에게 있어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마음의 소욕을 이길 수 있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다른 길이 있겠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절실함과 겸손함 그리고 내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아직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대접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구원은 임하였으나 능력은 발휘하지 못하는 영원한 유아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성숙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일을 하지 않는 것보다 미성숙한 상태에서 일을 하다 보니 더 많은 어려움만 끼치고 문제가 생깁니다. 가만히 있으면 피해나 주지 않는데 오히려 더 나서고 자신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더 큰 어려움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 자신의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더 훌륭해 보이지 않고 자신이 더 높게 평가되거나 내가 남을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하면 내가 더 많이 수고하는 것 같아 보이면 내 마음에 평안이 없어지고 내가 우월의식을 느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나는 저 낮은 곳으로 불평 속에 추락하게 될 뿐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내 자신의 믿음을 더 갈고 닦아 시간을 가져 주님 앞에 새로운 마음으로 헌신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단 평강의 주님입니다. 주님의 인도함을 받으면 우리 마음에 찾아오는 첫 번째 정서가 평안함입니다. 내 마음이 불편한 것은 일단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힘들어도 평안해 지고 정말 고통가운데에도 내 마음속에는 평안과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백성들이 왜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은 즐거움을 가졌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인 평안과 성령의 지배 속에 오는 내적인 기쁨 때문입니다.

절실과 겸손과 자신의 비움 없이는 결코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없는 것을 봅니다. 정말 우리가 불쌍해 질 때를 생각해서 기회 있을 때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나 자신의 죄악의 성품을 능가할 지혜가 필요합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을 입으면서 우리는 늘 비교해야 합니다. 내가 과연 이와 같은 지금의 옛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살 때 그 결과가 무엇인가를 항상 비교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잘못 행하는 그 결과가 무엇인가를 눈앞에 선명히 보게 되면 우리는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생각할 때마다 생각하는 것을 늘 마음에 보게 됩니다. 저는 이상해요. 토요일은 꿈을 꿔도 꼭 설교하는 꿈만 꾸는 것 같아요. 토요일은 늘 꿈을 꿔도 꼭 설교하는 꿈 밖에 안 꾸는 것 같아요. 우리 마음에 생각하면 꿈속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어떤 모습으로 평가를 받고 어떤 모습으로 대가를 받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 우리 삶을 마음대로 내지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내 마음에 있는 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죠. 내 마음에 속 시원히 해버리면 내 마음에 속 시원히 할 말 다 해버리면 내가 참았던 것 정말 참을 수가 없어서 한마디 해버리면 내 속이 시원해지죠. 그런데 속 시원함은 잠깐이고 그 다음에는 더 큰 고통이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내가 행복해져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줘야 그 사람이 내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행복은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만히 있어 보세요. 나는 가만히 있어서 조용한데 내 주변 사람이 떠드는데 어떻게 조용한 세상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내 주변에 있는 사람 마음이 평안하고 기뻐서 그들이 조용해져야 내가 내적인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다른 이들에게 도움과 기쁨과 은혜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인가 반복되는 어려움이 있으면 이제는 제발 고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 이렇게 어려움이 계속 올까를 생각하며 그 가운데 원리를 발견하고 원칙을 뽑아내어 그것을 수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새사람이 되면 우리는 달라집니다. 우리는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서 3일 3야를 고통하고 나와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주시고 기회 주실 때 기쁨 속에 우리 마음을 돌이켜 주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수가성 여인, 물 기르러 왔다가 그는 물동이를 내려두고 동네에 가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 앞으로 왔습니다.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물 기르러 왔는데 그것은 상관없고 이제는 사람을 데려와 예수님께 인도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이 뭔가 달라진 것입니다.

제가 오늘 시간이 되어서 이 말씀드리고 마쳐야 될 것 같습니다. 지난 주간에 화요일 제자훈련 저녁반 마치고 11시에 출발해서 금요일 밤 12시경 왔으니까 꼭 만 3일정도 걸려서 지리산에 성도님들 한 20분 정도하고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산이 굉장히 커서 종주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던 것 같습니다. 전에도 다녀온 적이 있는데 저는 산에 다녀오면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아요. 마음도 맑아지고 생각도 정돈이 되고 하는 것 같아서 하루 종일 걷는 것이지만 매우 마음이 기쁘고 기쁩니다. 늘 같은 곳이지만 날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새로운 것이 보이잖아요. 이번에 가다보니까 특별히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늘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었는데 가다보면 낮은 지대든지 특별히 좀 높은 지대일수록 그 나무 중에 죽은 나무들이 있습니다. 큰 나무인데 벼락을 맞았건 말라죽었건 또 나무가 죽어서 썩기도 하고 하얗게 말라있기도 하고 가지는 대부분 떨어져 나가고 삐죽삐죽한 모습이 좀 남아 있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참 신기하더라고요. 그 죽어서 도대체 몇 십 년이 되었는지 몇 백 년이 되었는지 모를 나무이지만 이미 죽어 있는 나무인데 주변에 새파란 나무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한곳에 우뚝 서서 그 곳의 전체 경치와 배경 구도를 새롭게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내려다보면 평범한 능선이고 평범한 구도의 광경인데 그 가운데 나무가 한그루 우뚝 서 있고 삐쭉하니 죽어서 서 있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구도가 되고 또 새로운 정물의 아름다움이 묘사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야, 죽은 나무 한 그루가 전체 배경과 구도를 바꾸는 구나.’ 제가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대부분 죽은 나무들이 서 있는 이와 같은 새로운 구도가 형성된 그런 모습들이더라고요. 그저 평범한 구도인데 그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죽어있는 나무 한 그루로 전체 구도가 새로워지고 새로운 아름다움이 있더라고요. 여러분 한번 가보세요.

이러저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진정한 깨달음을 주는 것은 많은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어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러저러한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말 많이 해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이 표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그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있어도 그 주변 배경을 바꾸고 주변의 모습을 바꾸고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이와 같은 나무도 있고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점점 나이 들어 기능이 떨어지고 점점 나이 들어 모든 이러저런 능력이 떨어질지는 몰라도 그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있어 줌으로만 인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과거의 모습들을 생각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을 주는 이와 같은 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살아있지 못하고 생명을 잃어버린 죽은 상태에서도 정말 사람들에게 그 모습 생각하면 그 자리에 우뚝하니 있었던 그 모습 생각하면 마음에 용기를 주고 소망을 주고 삶의 힘을 주고 깨달음을 주고 마음에 새로운 생각을 주는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호흡하는 동안 삶은 아닙니다. 비록 이 세상의 호흡이 끝났다 할지라도 사람에게 무엇인가 감동을 주고 그 감동이 가슴에 남아있고 세대를 통해서 전달되고 무엇인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주고 마음속에 용기와 소망을 줄 수 있다면 그 생명을 영원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많이 표현하고 나 자신을 드러내고 설명해야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합니다. 정말 사람의 삶은 한계가 있습니다. 몇 십 년 살다보면 백수 누리지 못하고 세상 떠나죠. 그 사람이 그린 그림, 음악, 조각, 건축, 문학, 모든 것들 수백 년을 지나오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서 영향을 끼치고 감동을 주고 생명력 있게 살아 움직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의 모습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삶의 모든 이력과 발자취가 정말 사람에게 남아 영향을 끼치고 도움을 준다면 우리의 생명은 수십 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정말 거룩한 신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성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거룩한 성자입니까? 그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기만 해도 다른 사람이 지나가다 보면 느낌없이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떤 때에 우리 자신을 보고 영감을 얻고 마음의 기쁨과 소망을 가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저희 교회 연세 드신 분들을 보고 특별히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계셔도 우리 모든 성도들이 그냥 보기만 해도 마음에 감동이 될 수 있는 주의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회사에 나가셔도 직장에 나가시건 그냥 그 자리에서 자기 하는 일 우뚝하니 아무 말 없이 하고 있기만 해도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어느 날 문득 새로운 마음의 깨달음과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런 모습이 있다면 우리야 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주의 성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저희 교회 교역자들 부임하시면 처음에 꼭 부탁드립니다. 저희 교회에서 사역하시고 주의 종으로 일하실 때 절대 자기 자신을 표현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비난을 받고 어려움을 겪고 사람들한테 꾸중을 듣고 이러저러한 많은 얘기를 들을 때 절대 자기를 표현하려고 들지 마십시오. 우리들에게 필요한 얘기는 딱 세 마디 밖에 없습니다. 그 세 마디 외에 더 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누추해 지는 것입니다. 그 세 마디가 뭐죠? 첫째는, 한번 따라서 합시다. ‘감사합니다.’ 두 번째는 ‘죄송합니다.’ 세 번째는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자 한번 따라서 합시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 말 외에 아무 말이 필요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말 외에 몇 마디 더 붙여 봤자 누추한 자기변명에 불과하고 그 자기 변명을 듣고 감동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바뀌는 것은 변명을 듣고 이해가 돼서 감동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 때문에 감동을 받고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설명할 필요 있어도 그 설명을 가슴에 품고 ‘감사합니다. 또, 죄송합니다.’ ‘내가 이러한 일에는 후회는 없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정말 잘 해보겠습니다.’ 하는 이와 같은 겸손한 마음이 우리의 삶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어디 가서든 그 자리에 우둑하니 서 있어도 다른 이들에게 소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삶의 의미를 깨닫고 마음속에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귀한 주의 성도들 되어 새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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