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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욘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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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나드 A. 풜스 (Maynard A. Force)는 요나서 강해에서 “요나서가 3장만으로 끝난다면 그 끝이 너무나도 아름다웠을 것이라”했습니다. 불순종했던 요나 선지자가 순종의 선지자가 되었지만, 그러나 본문 4:1절은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라고 했습니다. 이는 독선적인 분노요, 터무니없는 항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단호하게 반문하십니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과연 이 반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1. 네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성내는 것이 합당하냐란 뜻입니다.

  1) 요나 선지자는 능력 있는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가 하룻길을 가며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외쳤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입장에서 이 일은 너무나도 기뻐하며 감사하여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크게 실망하여 하나님 앞에 항의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루 속히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무너지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 반대로 나타났습니다.

  2) 여기서 우리는 되지 못한 선지자의 비뚤어진 양심과 이중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을 불순종하여 도망치면서도 자신을 버젓이 “나는 히브리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소개한 것입니다(1:9). 둘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만을 품고 항의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셋째, 자신이 도망쳤던 불순종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교만이며 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런 착각에 있는 것입니다. 요나의 분노와 그 격정은 곧 지옥의 숨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반문하신 것입니다.

  3) 선지자가 왜 이처럼 분노하고 있습니까?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버리지 않고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불순종하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생각했습니다. 이 요나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유치한 신앙에 사로잡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가당치도 않는 화를 내며, 스스로 의로운 채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는 다면 비록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뜻대로 된 줄 믿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로 믿고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의 삶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회개한 자를 구원했다고 성내는 것이 합당하냐란 뜻입니다.

  1) 본문 2절 중반 이후를 보면,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라 했습니다. 그가 격분한 이유는 왜 니느웨 백성들에게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느냐는 불만이었습니다. 이는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선의를 비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꼭 같은 죄인인 주제에 독선주의에 사로잡혀 회개하는 니느웨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비난의 화살을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2) 인생은 모두 다 동일한 죄인입니다. 돌맹이도, 큰 바위도 물속에 집어던지면 다 가라앉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 세상에는 너무 악해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도 없고, 너무 선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 없는 의인도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 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은 멸망 받는 것이 마땅하고, 우리는 예외라는 생각은 거만하고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 하나님의 큰 구원이 니느웨 백성들에게 임했을 때, 그토록 싫어하며 분노에 떨었습니다.

  3)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 아직도 인간적인 선입견과 독선주의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완고한 고집 속에 함부로 남을 정죄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까지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퍼커슨은 “하나님의 선의를 비이성적으로 거부하며 분노에 떠는 것은 유치한 영적 질병”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너무나도 유치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단 한 사람의 죄인도 구원받기를 원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원수를 사랑한다고 성내는 것이 합당하냐란 뜻입니다.

  1) 본문 2절 중반에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역대 이스라엘 성도들의 공통적인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 결코 다른 민족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국이 망하지 않는 것을 보며 슬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참 선지자가 가져야 할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선민을 괴롭히는 모든 존재는 마땅히 멸망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2)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복음의 능력도 믿었지만, 가장 중요한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사랑해 주셨습니다(롬 5:8). 또한 다윗은 시편 35:12절이하에서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 왔도다.”라 했습니다. 여기서 산울림의 법칙을 봅니다. 아무리 악할지라도 그를 위해 기도하며, 복을 빌 때 그가 그 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면 그 모든 축복이 내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3)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성숙해 지려면 사랑이 첨가되어야 합니다. 결국 사랑이 없는 믿음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멀리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의 옛 죄악이 다 씻음 받은 감격과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함께 사랑의 부음을 받아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원수까지 사랑하시어 이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남은 생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종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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