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롬 13:1-14)

  • 잡초 잡초
  • 611
  • 0

첨부 1


지난번 함께 살펴 본 로마서 12장은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에 대한 말씀이었고
오늘 함께 살펴 볼 로마서 13장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에 대한 말씀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에 대한 원리를 13장에서는 총 5가지로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원리 그 첫째는
그리스도인은 사회에서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屈服)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금방 듣기에는 듣기에 좀 거북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위에 있는 권세라는 말도 듣기에 거북하고
특히 굴복(屈服)하라는 말씀은 듣기에 더욱 거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록 이 말이 듣기엔 거북할지 모르지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개인이 모여 이루어진 사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움직이려면 반드시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또 그 질서가 바르게 잘 시행되게 하려면 권세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권세에 반드시 굴복(屈服)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屈服)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이 말씀의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속에서 살아 갈 때
그 사회를 움직이는 권세에 대하여 가져야 할 기본적인 정신과 자세에 대한 말씀이라고
성경 주석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屈服)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이유는 많지 않습니다. 1절에서 말씀하는 이유는
권세란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고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이기 때문에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 4절에서 말씀하는 이유는 그가 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굴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칼이란 공권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많은 정치가들이나 많은 독재가들이 오용하기도 했던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말씀을 오용(誤用)하여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같은 것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이란 왕의 권력이란 신(神)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이론으로 
중세기로 들어오면서 영국의 제임스1세, 프랑스의 루이14세 등이 주창한 이론입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은 역사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권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권세란 힘이나 영향력을 말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권세란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服從)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번역 말씀을 보면 위에 있는 권세란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위에 있는 권세란 문장을 K.J.V. 성경에서는 the higher powers 라고 번역하고 있고
N.I.V. 성경에서는 the governing authorities 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 이 위에 있는 권세란 정부나 국가를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사회를 움직이고 다스리는 이 정부나 국가라는 것은
악을 벌하고 선을 장려하기 위하여 세워진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하는 기관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에 보면 맨 처음 세속 정부나 세속 국가가 세워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흔쾌(欣快)하지는 않으셨지만 사무엘을 통하여 허락은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정부이고 국가이기 때문에
1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정부나 국가 혹은 관원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하면
4절에서는 하나님의 사자로 6절에서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또 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이 두 구절을 보면 비록 그 권세나 그 조직이 세상의 권세요 세상의 조직이지만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 속에서 된 것이요
또 그 권세도 스스로 권세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권세를 가지게 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께 경배하지도 않는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이지만
선을 장려하고 선한 사람에게는 상을 내리고
악을 억제하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는
그래서 그 사회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유지해 나아가는 기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그 어느 정부나 그 어느 국가도 하나님 마음에 꼭 맞게 100% 잘하는
정부나 국가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죄인들이 모여 일하는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소한도 이 사회를 혼돈과 혼란 상태로 이끌고 가려고 하는 정부나 국가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정치가 서툴거나 때로 야망(野望)이나 흑심(黑心)을 품고 정치한다 할찌라도
그들은 칼이라는 공권력을 가지고 도둑을 잡고 살인자를 잡는 이런 정치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자 혹은 하나님의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악은 벌하고 선은 장려하는 방향으로 일하는
이런 의미의 심부름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을 표준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통치자는 여러분 각자에게 유익을 주려고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각자가 나쁜 일을 저지를 때에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는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나쁜 일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비록 하나님 마음에는 흡족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심부름꾼 역할을 감당하는
이 세상 정부의 다스림에 대하여 거역하며 그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1-2절 말씀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屈服)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심판을 자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하나님께로서 난 그 권세를 거스렸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좀 다니신 분들은 이 말씀을 읽었거나 들었으리라 생각됩니다마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빌라도에게 심문 받는 장면에서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요한복음 19:1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넘겨준 자의 죄는 더욱 크니라(요한복음 19:11) 

무슨 말씀입니까?

그 권세가 어떠한 권세이든, 비록 예수님 자기 자신을 잡아 해치려는 권세라 할찌라도
그 권세가 위에서 준 권세,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권세라면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세에 예수님은 굴복(屈服)하셨고 그래서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억울하고, 어떻게 보면 모순되며, 정의가 불의에 삼킨바 되는 순간이지만
그 권세가 위로부터 난 권세이며 하나님이 정하신 권세라면 그 권세에 굴복(屈服)해야지
그 권세에 거스리는 행동을 하게되면 결국 심판만 자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정부, 하나님을 대항하는 정부, 신앙생활을 전혀 못하게 하는
김정일 혹은 나치 같은 정부에도 굴복(屈服)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그 권세에 불복종(不服從)하거나 그 명령에 불순종(不順從)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악법도 법이니 불복종하거나 불순종하는 것에 대한 댓가 즉 벌은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그 정부에 비록 불복종이나 불순종은 하였지만
벌을 받음으로써 불법한 자가 아니라 적법한 자 즉 준법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로마 황제들이 하나님을 경배하지 말고 로마 황제를 경배하라 강요했을 때
우리들이 역사를 통해 아는 바와 같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 명령에 불복종하고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순교(殉敎)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순교를 당함으로 비록 그 악한 정부를 거스리는 행동을 했지만
벌을 받고 순교함으로서 불법한 자들이 아니라 법을 지키는 준법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는 이 1-2절 말씀에서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라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다양한 각도로 살펴보았는데 중요한 것은
이 역사의 흐름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떠난 적이 없고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屈服)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
불복(不服)하며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음,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원리 그 둘째는
그리스도인은 사회에서 선과 양심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5절 말씀입니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속한 세상이나 살아가는 삶의 현실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증인인 것을 나타내며 사는가?

악을 행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 그리스도의 증인임을 증거하며 살고
자기 양심까지 속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베드로전서 3:13-17)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1:18-19)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며 살고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은 기초적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며 살고 양심을 따라 살기에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屈服)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부나 관원들은 선을 장려하고 악을 억제하는 일에 힘쓰고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양심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일에 힘쓰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선을 위하여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屈服)하며 살아야 할 것이고
양심을 위하여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屈服)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위에 있는 권세라고 어쩔 수 없이 굴복(屈服)하거나
벌벌 떨면서 굴복(屈服)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屈服)하라는 것이며
양심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屈服)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선을 행하며 살고 양심을 따라 살아간다면
정부나 관원들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원리 그 셋째는
그리스도인은 사회에서 국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6-7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정부를 향하여 세금을 잘 내야 하고 바르게 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정부가 조직되고 움직이려면 재정이 필요합니다.
그 재정은 세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정하신바 된 정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가진 정부가
악을 억제하고 선을 장려하며
사람들은 적어도 양심을 따라 살아가도록 잘 지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금을 잘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당시 이스라엘 나라는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로마 총독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일본에 36년 동안 지배당하면서 일본이 한국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총독이 우리나라를 다스리던 형태와 꼭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 나라의 독립을 바라면서 독립운동을 펴던 사람들은
로마에 세금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대부분의 국민들도 세금을 거둬 로마에 바치는 세리들을 로마의 앞잡이로 생각하거나
매국노로 생각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어느 날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마태복음 22:17)

이 질문은 순수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물어본 질문이었으며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태복음 22:21)

예수님도 비록 나라 뺏긴 설움 속에 살기는 하였지만
로마 황제에게 바쳐야 할 세금은 빼먹지 말고 로마 황제에게 바쳐서
정부를 향한 국민의 의무를 저버리지 말라고 가르쳐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원리 그 넷째는
그리스도인은 사회에서 사랑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8-10절 말씀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리스도인이 사회에서 살아 갈 때 사랑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기초적인 것으로서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은 말씀이지만
이 말씀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9절에 있는 “다 들었느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사랑의 원리를 따라 살면
모든 계명을 다 이룬 것이라든지 아니면 모든 계명을 대체하는 의미를 가졌다는게 아니라
사랑의 원리를 따라 사는 삶이 율법을 다 이루는 의미를 가졌다는 것이고
그래서 사랑을 따라 살면 모든 계명을 바르게 다 지킬 수 있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원리 그 다섯째는
그리스도인은 사회에서 낮에와 같이 단정하게 사는 삶을 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1-14절 말씀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단정한 삶을 살아야 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그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볼 줄 아는 통찰력을 가져야 하며
그래서 지금이 자도 될 때인지 깨어야만 할 때인지 아니면 깨어 기도해야 할 때인지
그 시기와 때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옷도 잘 입어야 하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옷인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며 이렇게 사는 원리가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원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