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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친밀함과 경외심 (마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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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서 일반적으로 ‘주기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는 누가복음 11장보다 훨씬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어 기독교 예배의 공식 기도문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태는 정교한 문학적 구조를 통해서 ‘기도’가 하나님 백성의 경건생활에 있어서 중심적인 것임을 표현했습니다. 주기도를 산상보훈의 중심에 위치시켰고, 경건행위인 구제와 기도와 금식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분량도 다른 경건 행위에 대한 가르침보다 몇 배의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백성의 삶에 있어서 핵심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도’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르게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우리가 행하는 다른 어느 것도 기도보다는 쉽다”고 했습니다. 신실하게 기도하는 것이 신실하게 설교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도 바르게 기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6:5-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외식하는 기도를 지적하시면서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방인들의 중언부언 기도를 지적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구하기 전에 먼저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기도를 고쳐 주신 것입니다.

기도는 기독교인의 경건생활에 있어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알고 ‘바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도는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 때문에 오늘날 잘못된 기도들이 만연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매우 간략하지만 기독교 사상과 신학의 결정체입니다. 이 기도가 몇 개의 간구로 구성되었는지에 대해서 학자들 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6개라 하고, 어떤 이는 7개, 어떤 이는 4개라고 합니다. 그러나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는 점에서는 의견을 같이합니다. 오늘은 그 첫 부분의 일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름으로 시작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설교가 끝나면 ‘카디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을 3인칭으로 표현해서-그의 나라와 그의 뜻-친근감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3인칭으로만 불렸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아람어 단어 ‘아바’는 우리말로 ‘아빠’로 옮기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잘 전달됩니다. 유대문헌을 보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바’로 부른 예가 거의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죄인들에게서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실 때 ‘아바’라는 매우 친밀한 단어를 사용하셨고, 그 표현을 이제 제자들도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빠라고 부르셨던 그 분을 우리도 역시 아빠라고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이가 저를 보고 처음으로 ‘아빠’라고 불렀던 그 날의 감격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고단한 일과 후에도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아빠’라는 그 한마디의 부름에 모든 피로를 잊어버립니다. 그 뒤에는 무슨 말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해도, ‘아빠’라는 그 한 마디의 부름을 통해 이미 충만한 교제의 기쁨을 누립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빠!’하며 안겨드는 아이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때로 다쳐서 눈물을 흘리며 ‘아빠’라고 할 때 가슴매이는 아픔을 함께 느낍니다. ‘아빠’라는 한 마디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때때로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 때문에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어도 기도하기가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 표현하기 어려운 그 심정을 한 마디로 담아내는 말이 ‘아버지’ 혹은 ‘아빠’입니다. 많은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나에게 많은 고민과 고독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이미 산적한 문제들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아빠’라는 부름 속에는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상속자’라는 개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 분이 나의 의지처가 되시며 피난처가 되신다는 고백, 나의 인도자이며 후원자가 되신다는 고백, 그리고 이제 순종하겠다는 고백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당신님의 아빠를 우리의 아빠로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아빠’라는 부름 속에 복음이 담겨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고 부를 때, 그 분은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기도하는 것은 미신이며 우상숭배와 같습니다.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분명한 정체성 가운데서 ‘아빠’를 부르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빠”가 ‘친근감’을 표현했다면 “하늘에 계신”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표현합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한계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자녀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기 어렵습니다. 한계를 가진 인간이 한계를 가진 다른 인간을 돕는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충분히 보호해주지도 못하고 충분히 인도해주지도 못합니다. 충분히 위로해 주지도 못하고 충분히 공급해 주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분은 충분히 위로하고, 충분히 보호하고, 충분히 공급하고, 충분히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주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친근함과 동시에 경외감을 가질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다시 언급한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윤리적인 개념보다 ‘구별되어 있다’는 물리적인 개념이 강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은 어떤 피조물과도 구별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고 그 분 앞에 경외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친근하게만 생각하다보면 ‘경외심’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경외심을 잃어버리면 ‘친밀감’도 상실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친밀함은 그 분을 경외하는 자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하나님은 당신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친밀하게 임재하시며 당신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약속의 말씀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리면 그분이 지으신 모든 것들에 대한 존중감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곳에서는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도 소중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 주 MBC 100분 토론에서 ‘인간배아 복제와 생명 윤리’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수정란을 생명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복제의 경제적 가치와 국가적 위상을 높이는 측면으로 접근하여 복제를 찬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비록 ‘수정란’에 불과하나 엄연한 생명이라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복제를 반대합니다. 난치병 치료를 위한 연구가 발전해야 한다는 점은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한 생명을 강제적으로 희생시켜 다른 생명을 치료하는 방식을 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하는 공산주의는 인간을 물질로 보기 때문에 인권탄압이 심합니다. ‘하나님을 없다’하는 진화론은 인간을 대기가스나 동물의 연장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래서 유물사관이나 진화론적 사고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경제적 효용성을 가지고 따지는 경향이 있고, 파리 목숨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만물에 대해서도 쉽사리 훼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고 인권이 유린되고 있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상실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없을 때,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숙고하기보다도 자기 영광을 추구하며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종교도 자기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아무리 기도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욕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고 난 후에는 반드시 ‘나는 그 이름을 거룩하게 여깁니다’라는 신앙고백이나 ‘그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라는 소망을 표현했습니다. 말하자면 9절은 본격적인 간구를 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대상이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고 그 앞에 서 있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한 후에 경외심을 가지고 간구할 준비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또한 기도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과 관계되어 있음을 망각하지 않도록 되새기고 있는 셈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기도하면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도 자신의 문제와 고민들을 집중합니다. 자기 아픔과 자기 슬픔과 자기 필요들을 줄줄 나열하고 난 뒤에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으면 자리를 털고 일어섭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전혀 없습니다. 그 분 앞에서의 경외심도 없습니다. 당연히 응답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기도의 일 단계는 먼저 입을 다무는 것입니다. 전도서 5:2절을 보십시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만약 기도를 시작하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그 분은 하늘에 계시며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면 그 기도는 이미 응답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이처럼 자기 자신과 문제를 잊고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 앞에 자신의 전 존재를 두는데서 시작합니다.

기도할 때에 먼저 하나님의 존전에서 입을 다물고 그 분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과 나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그러므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고 기도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분을 경외하는 가운데 친근한 교제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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