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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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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

감동적 실화묶음 “연탄재”에서 따온 글입니다. 영철이네 차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일곱 살 된 영철이는 아빠와 함께 타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다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몇 개월을 입원하고 퇴원한 그들은 둘 다 윌체어를 탔습니다. 5년쯤 흘렀습니다. 어느 날 아빠와 영철이는 각각 윌체어를 타고 시내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아이 하나가 차도에 뛰어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소리질렀지만, 누구보다 먼저 몸을 움직인 것은 영철이 아빠였습니다. 그는 윌체어에서 뛰어내려 차도로 뛰어들어가 아이를 끌어안고 인도로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영철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아빠가 정상인처럼, 아니 정상인보다 더 빨리 몸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란 것은, 아빠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윌체어에 앉더니 손으로 바퀴를 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 그날 저녁 영철이는 엄마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5년 전의 교통사고에서 영철이 아빠는 가벼운 찰과상 외에 다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곧 사춘기에 들어서는 영철이가 그 엄청난 현실을 극복하는 것을 돕기 위해, 아빠가 윌체어를 타고 지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져야 할 몫의 짐이 있습니다. 그건 회피할 수도 없습니다. 영철이 아빠라고 해도 할 수 없는 일, 즉 그 누구도 대신 져 줄 수 없는 자기만의 몫이 있습니다. 

그걸 감당할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만의 인생 짐을 능히 지고 일어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고 누구도 우리에게 그런 힘을 줄 수 없습니다.

좋은 친구는 누구입니까? 함께 길을 가는 사람이지 그 사람의 짐을 대신 져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친구의 한계”를 놓고 한탄하거나 인생의 허무함을 토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친구 사귀기를 거부하거나, 기왕의 친구들에게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좋은 의사는 환자가 스스로 져야 할 몫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이 고통은 약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인생의 일부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고통과 익숙해지십시오. 친구로 삼으십시오.”

좋은 교사는 학생에게 “너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생의 인성과 삶을 책임지지 않는 상업적 교사는 그런 허황된, 책임질 수 없는 약속을 합니다. 그것도 아주 쉽게. 그러나, 좋은 교사는 학생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합니다. 그리고 그 학생이 어느 정도에서 만족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처음 듣기에 따라서는 잔인하게 여겨질지라도.

물론, 사람에게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개발가능성이 대단히 큽니다. 그러나, 좋은 교사는 개발될 수 있는 잠재력과, 어떻게 바꿀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현실성이 전혀 없는 꿈의 차이를 분명히 아는 사람입니다. 

좋은 부모는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녀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자녀가 지고 가야 할 짐을 지고 갈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시간이 갈수록 자기가 자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점을 터득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녀를 맡깁니다.

이것 저것 다 해주는 부모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이해되지만, 정도를 넘으면 자녀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훈련의 기회를 빼앗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참고합시다. 약한 동물은 자식을 많이 낳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교육’을 베풀지 않습니다. 살아남는 것은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한 동물은 자식의 수가 적습니다. 특징은, 대단히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자식들이 자생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사람은 아무래도 강한 동물 쪽입니다. 

좋은 목회자는 각 사람이 가진 달란트를 바르게 이해합니다. 무리한 꿈을 심어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지고 가야 할 영적인 과제를 떠맡아 주겠다는 실천할 수 없는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믿음을 길러, 주님 맞이하는 등불에 기름을 채울 수 있도록 기도지원을 합니다. 생명의 물가로 인도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 물을 마시는 것은 성도의 책임입니다.

금문교회 10년을 돌아볼까요? 처음 9년 반은 셋방살이 했습니다. 지난 8개월 우리는 자체 성전에서 예배 드립니다. 지난 9년 반은 모두 불행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때 우리는 비가 새거나 페인트 칠하거나, 도둑이 들거나, 그런 문제를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편안했습니다. 지금은 신경 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지금은 차 타고 멀리서 바라만 봐도 기쁘지만, 이전에는 아기자기한 예배가 즐거웠습니다. 말하자면, 각각의 세월에 그만한 기쁨과 그만한 짐이 있었습니다.

그 9년 반 동안 우리는 세 개의 교회를 거쳤습니다. 버클리에서 2개월, SF 다운타운에서 1년 반, 그리고 SF 주립대 근처에서 7년 반이었습니다. 세 군데 교회 교인들과 목사님들은 모두 친절했습니다. 두고두고 기억될 만큼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가 져야 할 짐을 대신 져주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당신들 너무 고생이 많습니다. 이 건물 그냥 가지세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월세도 꼬박꼬박 받았습니다. 다만, 만날 때마다 웃으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내가 서부전선 철책선을 지키던 1982년, 민간인 통제선 안쪽에 있던 부대교회 정문 높은 곳에 붙어있던 말씀입니다. 젊고 패기가 넘치는 20대 초반의 군인들에게 이 말씀이 어떻게 다가갔을까요?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인간의 한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젊은이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일은 병들고 늙었을 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젊고 건강한 사람에게는 ‘수고하는 무거운 짐’이 없을까요?

이것 보세요. 바로 이런 점에서 인생은 누구에게나 평등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인생의 모든 시절마다 즐거움도 있었지만, 그만한 고통과 눈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수고하는 무거운 짐을 어떻게 해결해 주셨을까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짐을 져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짐을 스스로 지고 가야 할 필요가 사라졌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로마서).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로마서).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지은 죄를 값을 쳐서 우리에게 갚으신다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살아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짐 가운데 ‘죄의 짐’의 몫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 짐들 가운데 하나입니까? 죄의 짐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모든 다른 문제는 다 여기서 왔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문제는 문제도 아닙니다. 노련한 선장에게는 바람과 파도가 오히려 즐거운 일인 것처럼, 죄 문제를 해결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일상적인 문제는 극복해 나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담당해 주신 예수님의 음성을 오늘 우리가 듣습니다.

물론, “죄의 짐”만 담당해 주시고,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죄 문제를 담당해 주셨다는 말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담당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수고하는 짐은 다 ‘죄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역할 분담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친구, 부모, 교사, 의사, 목회자 모두는 떠맡을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한계를 인정한 가운데 최선을 다하는 삶에서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움 속에 성장하는 사람이 “성숙”한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 부모, 교사, 의사, 목회자 모두는 궁극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 드려야 합니다. 기도로써 친구, 자녀, 학생, 환자, 성도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간섭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12년을 혈루병으로 앓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족에게도, 이웃에게도, 의사에게도, 모든 사람에게도 버림받았습니다. 그 여자가 선택한 마지막 길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님께로 나아온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뵙고나서 그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일평생 앞을 보지 못하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속이며 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리장 삭캐오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의 삶이 변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만나서 모든 죄를 사함 받고, 고통의 모든 짐을 벗게 된 사람들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낭패와 실망을 경험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아니,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낭패와 실망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을 겪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진정한 위로를 얻습니다.

잭 캔필드와 빅터 한센 등이 지은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주고 싶은 이야기,” 그 첫 번 째 이야기(13-16 페이지)입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웃음”입니다. 어머니를 잃은 어떤 딸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암으로 잃고 장례식장에 앉아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너무 커서 숨을 쉴 수 조차 없었습니다. 언제나 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어머니는 학교에서 발표하는 연극을 보러 오시면 가장 크게 박수를 쳤고, 딸이 실연당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야기를 들어주며 우느라 휴지 한 통을 다 썼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오히려 딸을 위로했고, 딸이 대학에 가 있는 동안 격려와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다른 형제들은 아이를 낳거나 갓 결혼하거나 해서 아직 미혼인 이 딸이 간호를 맡았습니다. 부담이 아니라 명예로 여겼습니다.

장례식이 열리는 교회 의자에 앉아 “이제 난 어쩌면 좋아요, 주님?” 하면서 울었습니다. 어머니가 안 계신 삶은 공허 그 자체였습니다.

“바로 그때, 교회당 뒤쪽에서 문이 열렸다가 꽝 하고 닫히면서 카펫트 위로 빠르게 움직이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 청년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자리에 앉은 그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무릎 위에 공손히 올려놓았다. 눈가가 촉촉히 젖은 그는 훌쩍거리며 말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내게 변명할 필요가 없는데 그는 미안하다고 했다. 몇 사람의 추모사가 끝나자 그가 내 편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물었다. “왜 사람들이 메리를 마가렛이라고 그러죠?” “마가렛이 어머니 이름이니까 그렇죠. 우리 어머니 이름은 메리가 아니에요.” 이 청년이 왜 다른 자리에 앉지 하필이면 내 옆에 앉게 되었는지 의아해 하며 나지막히 대답했다. 청년이 계속 훌쩍거리면서 몸을 움직여대는 통에 그 청년에게 정신이 팔려 슬픔도 잊어버렸다. “이상하다. 마가렛이 아닌데.” 그가 계속 우겼다. 우리가 속삭여대자 사람들이 자꾸 우리 쪽을 보는 가운데 그가 내게 말했다. “고인의 이름은 메리예요. 메리 피터스.” 계속해서 우리 둘 사이에는 대화가 이어졌다. “여기는 메리 피터스 씨의 장례장이 아니에요.” “여기, 루터교회가 아닌가요?” “아뇨, 루터교 교회당은 길 건너예요. 장례식장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네요.”

한 청년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인해 나는 엄숙한 순간에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얼른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내 웃음소리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울음소리로 들렸기를 기도했다. 웃는 바람에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조문객들이 쳐다보았지만, 그 모습이 더 우스웠다. 내 옆에 앉은 당황한 청년을 흘깃 보았다. 그 역시 주위를 둘러보며 지금 일어나서 나가기엔 너무 늦었다고 판단했는지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어머니도 함께 웃고 계시겠구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마지막 기도에 “아멘” 소리가 나자마자 우리 둘은 쏜 살같이 문밖으로 나와 주차장으로 갔다. “아무래도 우리 두 사람이 오늘 이 마을의 화제거리가 되겠어요.” 미소 지으며 그가 말했다. 그는 자신을 릭이라고 소개했고, 이모의 장례식에는 어차피 못 가게 되었으니까 커피나 한 잔 같이 하자고 했다.

그날 오후부터 그 청년과 함께 한 내 인생의 긴 동반 여정이 시작되었다. 비록 장례식장은 잘못 찾았지만, 인생의 길은 바로 찾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난 지 일년 후, 우리는 그가 부목사로 있던 한 시골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 두 사람 다 결혼식장은 제대로 찾아서 제 시간에 도착했다.

내가 가장 슬펐을 때 하나님은 내게 웃음을 주셨다. 외로움 대신 사랑을 허락하셨다. 지난 유월, 우리는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 결혼 22주년을 보냈다.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물어볼 때면 남편은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돌아가신 장모님과 돌아가신 이모님이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맺어준 천생연분이지요.”

슬픔의 때, 하나님께서는 웃음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고난의 길목을 돌아서니, 거기 예수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 삶의 고난을 오히려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시편 Psalm 119:67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Before I was afflicted I went astray, but now I obey your word.

시편 Psalm 119:71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It was good for me to be afflicted so that I might learn your decrees.

이런 의미에서,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바른 길을 알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은 일종의 빨간 신호등입니다. 거기는 더 나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일종의 통증입니다. 거기가 아프니까 특별한 취급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유익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고난이 아예 없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은 고난을 통하여, 무엇이 내게 소중한지, 누가 나에게 정말로 귀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나간 2,000년의 역사는, 예수님께 나아와 죄 사함 받고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맥을 이어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은혜와 기쁨의 삶을 살아갑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동기가, 고통의 멍에를 벗기 위함일 때가 있습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님께 나아와 위로를 얻으려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 좋은 것처럼 보여서 지체하고 망설였다가, 끝내 예수님을 바로 만나고 나니, 지나간 삶이 다 낭패와 실망의 연속이었음을 깨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행복하고 잘 살아온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돌아보니, 후회되는 것도 많습니다. 참 행복을 이제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인생길은 무겁고 험난합니다. 그러나, 이 길에 기쁨과 웃음을 주신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한 자리에 모여 찬송하고 예배드립니다. 이런 기쁨은 우리 주 예수님의 선물입니다. 아멘.

기도
날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 오늘도 주님의 위로를 받아, 마음이 기쁘고 감사합니다. 크신 은총 속에 날마다 소망으로 나아가는 삶으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부르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애굽을 빠져나오는 이스라엘에게 풍성한 은총을 입게 하셔서, 빈손으로 나가지 않게 하신 하나님. 오늘 저희들이 세상의 삶에서 주님께 나아올 때, 주님께 드릴 것이 있게 하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날마다 감사하는 생활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가난한 이웃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나누게 하옵소서. 곤궁한 형제의 부탁을 거절하지 말고, 함께 짐을 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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