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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탐식과 영성 (창 25: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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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인도의 성자인 간디 선생님에게 왔습니다.  이 아이가 사탕을 평소에 너무 많이 먹어  어머니가 절제 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존경하는 간디 선생님이 한마디만 해주면 사탕을 먹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탁을 합니다.

“선생님! 이 아이가 사탕을 너무 먹어서 병에 걸릴까 두렵고 걱정이 됩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한 마디 충고를 해주시면 제 아이가 사탕을 먹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간디 선생님이 가만히 생각하더니 한 달 후에 오면 안 되겠냐고 합니다.  왜 그럴까 의아 해 하면서도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 하며 한 달을 더 기다렸습니다.

한 달 후에 찾아 갔을 때 간디선생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한 달 후에 오면 안 되겠냐고 말합니다. 마음에 의문이 들었지만 ‘그래도 저 대가가 무언가 기간을 정할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그러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약 세 달 정도 걸려서 갔더니 간디선생님이 이 아이에게 ‘사탕을 너무 먹으면 건강이 해롭고 또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면 자녀로서 도리가 아니다’라고 그렇게 이야기 하면서 사탕을 절제하도록 했습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이 아이는 간디선생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그의 말을 받아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어머니에게 의문점이 남아 있었습니다.‘왜 그 쉬운 얘기를 세 번이나 3개월 동안 기다리게 했을까’“간디 선생님! 그 별로 어려운 얘기도 아닌데 금방 해 주시면 되는데 왜 3개월 동안 미루었다가 이렇게 해 주십니까” 그랬더니 간디선생이 하는 말이 “저도 사실 사탕을 너무 좋아 하거든요. 제가  절제하고 난 다음에 이야기를 해야지, 그러지 않고는 저는 이야기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제가 3개월 만에 겨우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어서 그에게 자신 있게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이 탐식과 영성이라는 이 설교제목이 무려 3주간에 걸쳐  예고가 나갔지만 이제야 이 설교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제가 이 설교를 할 자격 있는 사람의 모습을 갖추어서 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살을 빼려고 노력했지만 쉽게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미루었다가는  탐식의 죄보다는 게으름과 거짓말의 죄가 더 크게 제게 다가올 것 같아서 이제는 해야 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탐식이 중세에는 전해 내려오는 죄목 중에 들어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고 놀람이었습니다. 뜻밖에 많은 생각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라고 하는 것은 먹는 음식에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성도님들이 목사를 대접한다고 할 때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음식을 통해서 사랑을 함께 받습니다. 또 제가 때로는 대접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나누기도 합니다.

저는 음식이란 먹기 위한것 뿐만 아니라 사랑을 나누고 관계를 좋게 하는 그런 축복의 통로와 도구가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이전에 섬겼던 교회 중에 산동네에 심방 다닐때에 일입니다. 성도님들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들을 부끄러워 하면서 내 놓으셨습니다. 그 음식들은 고구마 삶은 것, 라면, 보리밥 등 소박한 것이었지만 그음식에는 목사를 향한 섬김과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때론  심방 스케줄을 잘 못 짜기라도 하면 점심을 세 번 먹을 때가 있었습니다. 배불러도 맛있게 먹을 때 그분들이 저를 쳐다보며 신뢰감을 느끼며 사랑을 나누곤 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신뢰와 영적인 신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좋은 기억들을 그 심방들을 통해서 가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먹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니까 제게는 굉장한 충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 말씀을 돌아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세 가지 욕구가 있는데, 하나가 성욕이 있고, 또 하나는 물욕이 있고, 그 다음 식욕이라고 합니다. 성욕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또 여러 가지 절차와 결과가 복잡합니다. 물욕은  물질이 없으면 그것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비난받지 않으면서도 쉽게 즐거움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식욕입니다. 음식을 먹고자 하는 욕구 입니다.  먹는 것은 도덕적, 윤리적 혹은 영적인 비난 없이 채울 수 있습니다. 특히 제게 좀 그것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회라 하지 않고, 먹회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잘 먹어야 목회도 잘한다 라고  농담삼아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담임목사는 큰 교회에서는 상징적인 위치이기 때문에 모든 원망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어도 쉽게 원망을 듣습니다. 분명히 이 방향으로, 이 방법으로 해야 하는 것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사람들을 설득하고 기다리면서, 때로는 원치 않는 갈등을 빚게 되면서 거기에서 오는 모든 스트레스를 안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안고 집에 밤늦게 돌아갈 때면 쌓인 스트레스를 음식을 통해서  풀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밤늦게 집사람에게 라면을 끓여 달라고 했더니 걱정스러운듯 ‘지금 먹으면 살찌고 건강에 좋지 않다’고 말을 해줍니다.  그 말을 듣자 고함을 치면서 화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래 이 세상에는 내가 마음 편하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단 말이야’ 아내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라면을 끓여 왔습니다. 정신없이 먹고 나서 제 방에서 울어버린 적도 있습니다. 그 후론 제가 라면 먹고 싶을 때 한 번 씩 고함을 질러서 먹곤 했는데, 이제는 집사람도 지혜가 생겨서 고함을 질러도 라면을 안 끓여 줍니다. 먹고 싶으면 직접 끓여 먹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이 절제를 합니다. 

먹는 것으로 제가 가진 모든 문제를 풀려고 하는 그 습관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가지고 온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인데 ‘이것이 어떻게 죄가 되는가?. 성경이 주는 교훈을 따라가면서 오늘 음식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내가 혹시 탐식의 죄를 범하고 있지 않는가?’를 생각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탐식의 죄가 뚱뚱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생각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야윈 분들은 오늘 설교는 ‘나와는 상관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오늘 나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으로 듣고 우리가 함께 왜 탐식이 죄인지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탐식은 우리가 먹는 음식과 우리 삶이 하나님 선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음식을 통해서 우리가 생존하기 때문에 이것이 ‘죄’일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힘을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동물적인 욕구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동물계 중에도 유일하게 문화적인 존재인 인간에게는 문화와 사회적 인습을 따라서 먹는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할 음식, 그리고 먹는 방식과 자세를 함께 비중을 두고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광야생활을 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지 못할 음식을 구별해서 율법으로 내려주셔서 반드시 지키시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들 광야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매일매일 공급해주셔서  그 음식을 통해 생존하도록 하셨습니다. 매일매일 너희들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하루 세끼 먹는 그 양식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잊지 않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명기 8:3 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매일매일 우리 삶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의도와 뜻이 바로 이 음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생명의 주관자이기 때문에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는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의 삶 자체가 선물이라는 것을 고백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 음식 속에는 친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존만을 위해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화해하거나 사랑을 나눌 때에 이 음식을 통해서 그 사랑과 의미를 표현하게 됩니다. 다윗이 자기친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데려다 왕의 식탁에서 같이 먹게 한 것은 인간적인 동정이 아니라 절친했던 요나단과의 영원한 우정 혹은 기억과 교제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이나 고대지방의 식사는 바로 화친과 교제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음식을 나눔 속에는 영적인 언약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의미와 수단으로써 보여주셨습니다. 구약에서 공동식사는 계약체결의 한 의식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사회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종교적인 차원까지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기 24:9-11에 보면 이스라엘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하여 모세를 중재자로 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에 그들은 음식을 먹고 마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분명히 지키신 하나님이시며 오늘 내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식 자체만 탐하게 되면 그것을 잊어버리고, 음식을 먹는 그 순간적인 유혹 앞에 넘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에서가 들에 나가서 사냥하고 돌아옵니다. 심히 피곤하였습니다. 에서가 오래 동안 굶주렸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허기졌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쑤어 놓은 팥죽을 볼 때 그의 욕심이 그를 자극했습니다. 30절 말씀 보면, 에서는 야곱에게 ‘나로 먹게 하라’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을 피부에 와 닿도록 번역한다면 ‘나로 하여금 그 죽을 꿀꺽 꿀꺽 그냥 거침없이 먹도록 만들라’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에서는 지금 먹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냥 먹고 싶은 마음 밖에는 없습니다. 유혹이 갖는 순간성 앞에 그는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내어주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볼 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였다고 합니다.  먹는 것 앞에 하나님이 주신 의미와 계명을 잊어버리고 오직 그것에만 몰두하게 될 때에 인류의 최초의 타락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실 때에 사단이 찾아와서 제일 먼저 유혹한 것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굶어서 배고픈 사람에게 먹고 싶은 것을 먹어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대화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엇이 문제입니까 ? 내가 먹고 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을 기억할 때에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먹고 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살며, 오늘 내가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의미가 이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음식을 아무 생각 없이 드시지 말고 잠시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상담훈련할 때 ‘음식알아차리기’라고 말합니다. 모든 음식에는 색깔이 있고 향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양이 있고 우리에게 오기까지 조리과정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어떻게 모양을 이루고 조화를 이루는지, 색깔은 얼마나 다양하고 아름다운지를 조금만 살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음식이 입안에 들어가서 주는 감촉을 느껴보십시오. 그럴 때에 그 속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에게 오기까지 수고한 손길에 대한 마음이 다가옵니다. 음식에 대한 의미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음식이 나를 건강하게 하는구나. 하나님께서 오늘도 내 삶 속에 이 음식을 통해서 나와 맺은 언약을 잊지 않을 것이며 공급하시는 하나님임을 생각 하게 합니다. 이 의미를 간직하고 살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우리가 함께 묵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탐식이 되지 않습니다. 

무심코 숟가락 젓가락부터 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음식을 대할 수 있다면 그곳에 바로 오병이어의 풍성한 기적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소찬이지만 가족 안에서 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게 할 것입니다. 잃어버린 감사를 다시 찾게 됩니다. 하루 하루, 한끼 한끼 우리에게 주신 삶을 감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저절로 꼭꼭 씹어 먹게 되면서 좋은 음식습관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영적인 의미를 잃어버리고, 또 우리에게 음식이 오기까지, 그 과정에 대한 의미를 잃어버리는 그런 우리의 음식문화는 바로 ‘탐식’이라는 것을 성경은 오늘 예리하게 우리에게 지적해 줍니다.
 
제 어린 딸아이가 집사람과  놀이공원을 다녀와서 하는 말이 저랑 함께 가지 못해서 슬펐다고 합니다. 즐겁게 보낸 것만을 말하지 않고 온가족이 함께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딸아이를 볼 때 제 마음이 뭉클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즐겁게 먹기를 원하시지만 그 음식의 의미와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기쁠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기억할 때 저들은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속에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식사기도를 습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감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선물과 은혜임을 망각할 때 죄가 됩니다. 

두 번째 , 탐식은 하나님 성전인 우리 몸과 마음을 파괴 합니다.

탐식은 자신을 파멸시키는 죄악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신체를 파괴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6:19절에‘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육체는 질그릇과 같지만 보배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곳입니다. 몇 세기전 교황 그레고리 1세는 탐식의 죄악된 모습을 급하게 먹는 것, 사치스럽게 먹는 것, 너무 많이 먹는 것, 탐욕스럽게 먹는 것, 그리고 까다롭게 먹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럴 때에 탐식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우리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립니다. 탐식은 무엇보다도 육체를 파괴하기 때문에 죄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탐식을 할 때 영양이 과잉되어 비만과 더불어 고혈압, 당뇨병, 뇌졸중, 심근경색증. 고지혈증, 만성신부전등 생명과 건강을 단축시키는 수많은 병을 유발하는 조건을 갖추게 됩니다.

탐식이 갖고 있는 또 하나는 마음의 질병을 만들어 냅니다. 음식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풀려고 합니다. 요즘 구직자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보면 남자들은 술 마시는 것이고, 여자들은  밥을 먹는다고 합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음식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서 사라집니다.  그래서 eating disorder, 즉 섭생장애라고 하는 정신적인 질환이 우리들 육체에 찾아오면서, 조절능력을 상실하며 중독증세를 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도 이 병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모든 고통과 어려움이나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해결함으로써 현실에 직면하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포기하고 중독이라는 마음의 병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탐식은 우리의 영혼을 메마르게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에서가 팥죽 한 그릇을 탐식한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12:16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망령된 자를 공동번역에서는 ‘불경스러운자’라고 번역했습니다. KJV는 profane 이라고 번역했는데 이 뜻은 ‘세속적인, 신성모독한’ 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에서의 행동이 얼마나 그에게 영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주었는가를 12:17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아는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 뜻은 하나님 성전을 파괴하되 축복의 기업으로 받으려고 다시 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쳐도 돌이킬 수 없고 회복할 수 없는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음식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호식품으로 생각하며 먹는 술과 담배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 성전인 우리를 스스로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부터 탐식이라는 것이 얼마큼 주의 성전인 우리 몸을 상하게 하는지를 기억하면서  몸을 건강하게 돌아보는 방법에 대한 지혜를 함께 찾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탐식은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을 망각하게 합니다.

본문 34절 보면,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여기에서 경홀히 여겼다는 것은 이 일에 별다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만 하면 더 이상 자신의 사명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남다른 지혜와 명예를 주셨다면  ‘하나님께 올려드릴 내 삶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배가 부르면 안합니다. 그래서 사명을 잊게 합니다.

제라스 리드라는 분은  사람은 배부르고 너무 취하면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고향을 잊고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이제 곧 그분을 다시 뵐 것임을 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음식과 술과 안락에 너무 깊이 잠겨 살아서 우리는 영원한 정착지를 바라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 무질서한 식욕이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켜 우리가 뭔가 좋은 것을 찾았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라고 말하며 ‘술은 누구나 자신감과 좋은 기분을 만든다 는 그릇된 생각을 심어준다‘고 했습니다.

잠언 23:20-21 보니까,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 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헤어진 옷을 입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3:19을 보니까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神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이 말씀은 배가 자기를 주장하고 그의 신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되면 그것을 위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우상숭배의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 우리에게 주어진 본질적인 사명을 잊어버리고 잘못된 것에 도취되고 만족하고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다. 개인 만족에 따라 누리고 즐길 줄은 알면서도 우리 삶을 통해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망각하여 자기의 삶을 헛된 것에 쏟아 붓는다는 것입니다.  에서의 경우를 우리가 한 번 보십시오. 장자의 명분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무시했던 것을 회개하고 돌이켰지만 그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남은 20년이 어떤 세월이었습니까? 야곱을 죽이기 위해서 군사를 모으고 훈련하는 모습, 그것이 살아 있는 것 같지만, 그 인생은 이미 죽어버린 인생입니다. 인생을 낭비한 것입니다. 여러분!  꿈이 없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치 못하며  오늘 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

목적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을 살아가면서 내 삶의 목적이 무언가를 생각 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두 가지 큰 목적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에게 주신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아 그들을 사랑하라는 목적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들을 구체적으로 돌아보는 것이 어떤 겁니까? 그들이 굶주릴 때, 배고플 때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생각 하며 한 달에 하루식사분 정도는  돈으로 계산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자는 취지로 이삭 줍기 헌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 구별돼서 온전히 들어온 명목대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는 한 끼 씩 금식하면서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돌아보기도 하고 또 그 물질을 드리면서 어려운 이웃 힘든 이웃들을 돌아보는 그 여유와 넉넉함 그 속에서 우리가 탐식을 피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오히려 넉넉함과 풍성함의 복을 주시게 된다는 겁니다.

또 하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을 기르고 양육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교회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교인 전체 과반수 이상 거의 6~70%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바램과 기대가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서, 더 좋은 환경에서 마음껏 주님의 일꾼으로 훈련하여 돈에 비교할 수 없는 유명한 지도자로, 헌신자로 세워나가는 기회를 우리 교회는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교회 앞 주유소 땅에  교육관을 지을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었지만  자기 앞만 바라보는 좁은 안목의 저희들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제 그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본당도 한 100억 정도 들었는데, 우리 교인수가 2500여명 될 때, IMF 시기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기도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물질로 지어지는 건물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세대를 아름답게 양육하는 그 일을 위해서 믿음의 아름다운 모습을 세워 나가는 것을 저들이 보게 하실 겁니다. 이를 통해서 앞으로의 미래 세대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가 고백하며 이 나라를 책임질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을 통해서 일어나는 귀한 비전을 바라보고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나간다면, 주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주신 이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해 기도와 물질과 마음을 모아야 할 숙제가 우리 앞에 남아있습니다. 젊은이들을 위한 새로운 생명을 위한 일들을 믿음으로 지을 수 있는 그 일에 참여케 하심을 감사합니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는 지금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 한분 때문에 한국이 먹고 살 수 있는 많은 돈과 기술을 보유하게 될지 모릅니다. 이러한 영적지도자들이 우리 동안교회를 통해서 아름답게 훈련받고 섬길 수 있는, 그리고 세계의 연결망을 가지고 뻗어나가는 귀한 역할을 감당할 기회를 갖게 되길 바랍니다.

탐식 즉 자신에게만 머물러있는 사람은 이 비전을 공유할 수 없습니다. 현실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처럼 우리의 어려운 현실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바라보며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외치며 나아갈 때 주님 앞에 우리 각자와 교회는 아름다운 헌신과 사랑과 섬김의 열매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염려합니다. 그러나 함께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며 마음을 모읍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어떤 변명으로도 회피하지 마십시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가꾸어지고 아름답게 세워지기를 기대하며 보내신 저 미래의 저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음식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있음을 날마다 끼마다 고백하십시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결단하며, 여기에 물질과 나의 모든 것도 함께 걸 수 있는 신앙의 결단들이 우리들 속에 이루어 질 때 진정한 신앙의 믿음의 역사가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포함해서 영적으로 굶주리고 고통 받는 저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미래를 열어갈 이 아름다운 어린이로부터 청년들을 위한 헌신과 사랑의 사명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겐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믿음 그리고, 주님을 사랑했던 그 사랑, 그리고 신앙고백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여러분 마음속에 음식을 먹을 때마다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그래서 음식을 놓고 화해가 이루어지고 기쁨이 이루어지는 우리 성도들의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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