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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힘들 때 필요한 3가지 음성 (삼상 23: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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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

요새 심리학에서는 인격 장애자라는 말이 종종 쓰입니다. 인격 장애자란 정신병자는 아니지만 정신과 인격 관리를 잘 못해서 큰 문제점을 노출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외형적으로는 아무 장애가 없습니다. 지식도 있고, 명예도 있고, 지위도 있고, 기술도 있고, 돈도 있고, 건강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과 공동체성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병은 가장 치료하기 힘든 난치병입니다. 왜냐하면 대개 교만 때문에 생기고, 교만하여 스스로 병을 잘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인격 장애자입니까? 사실 모든 사람이 인격 장애자입니다. 태초에 아담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을 잃어버리면서부터 모든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다 인격 장애자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경중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는 공통적인 증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못한 것과 내가 진 것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하고, 실패와 잘못에 대해 지나치게 비참하게 생각하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실패의 여유’가 없습니다. 사람이 성공만을 생각하면 아주 비참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공하지 못했을 때 얼마나 스트레스가 됩니까?

실패의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문제에 인생의 전부를 거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깨지면 인생이 다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그처럼 하나의 문제를 극대화하여 그 문제에 자신의 전 인생의 성패를 걸면 그 인생은 행복할 틈이 없습니다.

입시철이 되면 가끔 입시에 떨어져 자살하는 학생이 생깁니다. 입시가 자신의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입시도 중요하고, 사업도 중요하고, 우정과 사랑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중한 내 생명입니다. 한번의 실패에 온 생명을 다 걸고, “사느냐 죽느냐?” 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길이 아니면 얼마든지 저 길이 있습니다. 때로 주님께서는 시련을 통해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실패를 대할 때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정과 사업과 인간관계에서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실패할 수 있지만, 실망에서는 안 됩니다. 실패했는데 어떻게 실망이 안 됩니까? 충분히 가능합니다. 평소에 관심의 세계를 넓히고, 최선이 안 되면 차선, 차선도 안 되면 차차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삶의 여유를 기르면 됩니다.

가끔 남편에 대해 실망을 잘하는 사람은 왜 그렇습니까? 평소에 관심의 세계가 남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좋은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큰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관심의 세계가 남편 하나뿐이면 남편의 얼굴을 조금만 찌푸려도 인생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롭게 관심의 영역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똑같습니다. 친구관계에서도 어떤 친구만이 내 인생의 전부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친구 아니면 다른 친구도 얼마든지 있고, 새로 또 친구를 사귀면 됩니다. 한쪽 세계만 보면 길이 막힐 때 길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것처럼 절망적이지만, 보는 세계만 넓히면 무수한 길이 보이게 됩니다.

가끔 보면 기독교인 중에서도 주기적인 실망감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만사형통’을 기독교의 진리로 생각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어려움이 있어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만사형통’만을 배운 사람은 일이 잘못될 때마다 그 잘못에 몰입하며, 결국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불공평하세요! 왜 저의 기도는 안 들어주시고, 축복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죄책감에 빠집니다. “내가 죄가 많아서 그렇구나!” 그렇게 죄를 인정하고 눈물로 회개하면 좋지만 그렇게 자책하면서 절망에 빠지면 더욱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만사형통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만사형통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자세도 틀린 것입니다. 만사형통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망조입니다. 항상 잘 되면 망하지 않는 영혼은 없습니다. 그리고 만사형통이란 이 땅에서는 있지도 않습니다. 그처럼 있지도 않은 것을 찾으니 어디서 찾습니까?

성공이란 많은 실패도 겪은 끝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의 여유’를 길러야 합니다. 결국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어떤 시련 중에서도 내일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잠언 24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의인도 넘어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의인은 다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 힘들 때 필요한 3가지 주님의 음성 >

오늘 본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끊임없이 도피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어느 날, 그가 일곱 번째 도피처인 십 황무지 수풀에 있었습니다. 그때 사울의 아들이자 친구인 요나단이 수풀로 다윗을 찾아와 그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어려운 도피생활에서 요나단의 위로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그때 요나단은 다윗에게 세 가지 영적 선물을 주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했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로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둘째, 안전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했습니다. 본문 17절 말씀 전반부를 보십시오.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셋째, 내일의 산 소망을 가지게 했습니다. 본문 17절 말씀 후반부에서 요나단은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라고 말하면서 다윗의 마음에 소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준 이 세 가지 영적 선물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런 영적인 음성을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살이가 힘들 때 가장 필요한 음성이 바로 이 음성입니다. 어떤 음성입니까?

1.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대충 의지하지 말고 힘 있게 의지해야 합니다. 그 믿음은 또 다른 믿음을 낳습니다. 그런 믿음의 파급효과를 계속 경험하다 보면 보편적으로 믿음이 체질화된 사람이 됩니다. 그런 믿음이 몸에 배여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행복의 요건인지 모릅니다. 믿음이 있는 곳은 천국이 되고, 믿음이 없는 곳은 지옥이 됩니다.

정신질환 중에 의부증과 의처증이 있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배우자를 놓고 불륜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데, 그 의심하는 정도가 거의 신앙 수준입니다. 이 병은 치료가 아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환자가 자신의 병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배우자를 의심하는 것 외에는 다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병은 배우자에게는 아주 골치 아픈 병의 정도를 넘어 골 때리는 병입니다.

통계적으로 100명에 2-3명이 그런 증상을 보이는데 주로 35세에서 55세 사이에 발생합니다. 성격적으로는 까다롭고, 곰곰이 생각하고, 지나치게 기억력이 좋고, 남의 행동에 대해서 예민하고, 실수나 잘못을 잘 잊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들 중에 많습니다.

여자의 경우, 샘이 많고 독점적인 사람 중에 많고, 심리적으로는 배우자에 대한 열등감에서 나타납니다. 특히 억압적이거나 편집증적인 부모와 형사처럼 뒤에서 자녀들의 허물을 캐고 다니는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믿음을 배우지 못한 사람 중에 많이 생깁니다. 그처럼 믿지 못하면 세상은 지옥이 되고, 믿으면 천국이 됩니다.

사실 믿지 못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부부관계에서나 친구관계에서 한번 믿고 나면 그렇게 마음이 편해집니다. 남편을 전적으로 믿는 아내는 남편이 늦게 올수록 사랑의 수은주가 올라가면서 진심으로 남편을 위하는 걱정을 하다가 남편이 들어오면 얼굴이 환해집니다.

반면에 믿지 못하는 아내는 엉뚱한 상상을 하며 의심의 수은주가 올라갑니다. “어디로 샜나? 누구를 만나 무슨 수작을 하나?” 오만가지 추측을 하고, 그 추측한 대로 믿습니다. 원래 몽상가는 사실보다 꿈을 더 확실한 것으로 믿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내 육감은 못 속여!”라고 하면서 자기 육감을 지나치게 믿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들어오면 아예 외면하거나 짜증부터 냅니다. 얼마나 피곤하고 고통스런 삶입니까?

사회도 믿음이 없으면 지옥이 됩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가해자는 한명도 없고 모두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며 데모하면, 이제는 고용주들도 폐업을 하며 데모합니다. 자세히 보면 돈보다는 불신이 데모의 더 큰 이유입니다.

왜 그렇게 서로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까? 사실 모든 불신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데서 나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기적적인 일들을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믿음의 기초를 형성하겠습니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려면 두 가지 사실을 꼭 알아야 합니다. 첫째, 먼저 자신이 인격 장애가 있는 무능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낮은 심령의 골짜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물이 고이는 것처럼, 자신이 무능한 존재임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려면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가능성이 있는 무한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질그릇처럼 별 볼일 없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 속에는 무한한 보화가 있습니다. 질그릇 속에 보화를 가진 것이 금 그릇 속에 돌을 가진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금 그릇이 아니라도 우리 안에 성령님을 보시고 살면 우리는 어떤 존재보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행복의 근원은 주님을 힘 있게 의지하고 사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마음속에 모시면 잘나게 생각했던 자신은 죽고 완고한 마음은 사라집니다. 그러면 마치 음침한 밤이 지나 유쾌한 아침이 찾아오는 것처럼 우리 앞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수많은 축복의 길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2. 안전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

본문 말씀의 다음 부분을 보면 다윗은 도피 행로 중에서 가장 큰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즉 십 거민들의 고자질로 사울의 손에 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위급한 순간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급히 오라!”는 전갈을 받고 다윗 쫓기를 그치고 블레셋을 치러 갔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셀라 하마느곳이라고 불렀습니다(28절).

하나님은 위기의 순간에 우리를 지켜주시는 ‘셀라 하마느곳’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는 항상 위로 향한 직통 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동서남북 ‘사방’만을 바라보지만 성도들에게는 방향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입니다. 성도의 삶은 ‘사방 플러스 원’의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3차원의 세계에 살지만 성도들은 사차원의 세계에 삽니다.

“명품 플러스 원!”의 삶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그 ‘플러스 원’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일마다 때마다 ‘플러스 원’이 더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이 지나면서 ‘플러스 원’의 삶과 보통 삶은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어떤 상황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위로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극복한다’는 말을 overcome이라고 합니다. over는 ‘어떤 것 위에 처음부터 끝까지 걸쳐서’라는 뜻이고, come은 ‘온다’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 위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내려와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있으면 우리는 어떤 상황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필리핀에서 목회하는 한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느 날, 그분이 교회건축을 하다가 재정이 부족해서 건축을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니까 철근이 녹이 슬고 교회 건물은 흉한 몰골이 되었고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고 비웃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전화를 해서 욕을 하며 따졌습니다. “아니, 그 짓다가 만 건물 때문에 도시 미관이 얼마나 망가지는지 아세요?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둘 거요?” 그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교회 건축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재정이 없어서 공사가 중단되었지만 곧 반드시 짓게 될 것입니다. 잠깐만 참아주세요.”

그 사람이 다시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내가 매일 그 앞길을 지나가는데 당신 교회 모습만 보면 기분이 나쁩니다. 내일 좀 만납시다!” 그리고 다음 날 그 사람을 만났더니 그 사람이 갑자기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엄청난 재정을 수표로 적어 주어 교회 건축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고 최선을 다해 헌신하며 살면 아무리 힘든 상황 중에서도 길을 열어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3. 내일의 산 소망을 가지라

아무리 봐도 우리는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내일은 우리도 다윗보다 더 복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넘치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 소망이 있다면 무슨 어려움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의 성공에 IQ(Intelligence Quotient,지능지수)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요새는 EQ(Emotion Quotient,감성지수)가 더 중요한 성공의 요소라고 합니다. 그러데 어떤 분은 가장 중요한 성공의 요소를 OQ(Overcoming Quotient, 극복지수)라고 합니다. 즉 어려운 일들을 잘 극복하는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대인들은 옛날 사람들보다 훨씬 잘 삽니다. 그런데도 절망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상대적 박탈감이 문제입니다. 살다 보면 상대적 박탈감은 있지만 그 상대적 박탈감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바보처럼 항상 남만 탓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증폭시킬 뿐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어려울 때 주위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이런 소리를 너무나 많이 듣습니다. “형제도 소용없어! 친구도 소용없어! 자식도 소용없어! 교회도 소용없어!” 그러면서 아주 굉장한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다음과 같이 열변을 토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람은 믿을 것이 못돼!”

무엇이 문제입니까? 나를 실망시킨 그가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남을 소용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자신이 문제입니다. 소용이란 말이 무엇입니까? 적절할 때에 이용한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적절할 때에 이용해 먹는 것이 형제입니까? 적절할 때에 이용해 먹으려고 친구를 사귀었고, 적절할 때에 이용해 먹으려고 교회를 다녔습니까? 그리고 적절할 때에 이용해 먹으려고 자식을 키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형제도 소용없어! 친구도 소용없어! 교회도 소용없어! 자식도 소용없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그런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 자체가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우리는 친구에게 소용 있는 친구가 될지언정 그 친구를 소용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소용 있는 아름다운 성도가 될지언정 교회를 소용의 대상으로 삼는 아름답지 못한 성도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사람이나 세상을 믿고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는 “누구는 소용없어!”라는 말을 최대한 피해야 합니다. 그 말은 자기 자신의 수치를 보여주는 부끄러운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형제가 나를 외면해도 나는 형제가 좋다고 말해야 합니다. 자기 입으로 형제를 불신하는 말을 해야 하는 자기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남편이 부끄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어도 깊은 기도제목을 나누어야 하는 목회자 외에 일반 성도들 앞에서는 “나는 남편이 정말 좋아요!” 라고 말해야 합니다. 자기 남편을 깎아내리면서 아내가 올라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같이 깎이는 것입니다.

친구가 나를 외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친구를 원망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그 친구를 배반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차피 친구를 믿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다 버려도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믿고 전진하는 담대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부부가 20년 살다가 헤어졌습니다. 그 동안 서로 끈끈한 사랑을 나누면서 잘 살던 사람이었는데 잠시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남편과 헤어진 후 만나는 사람마다 말했습니다. “정말 남자는 믿을게 못돼! 그 원수 놈!” 그렇게 말하면 마음이 풀립니까? 더 비참하게 됩니다.

이왕 헤어졌으면 새롭게 내일을 향해 달려야지 과거를 한탄하면서 더 비참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20년 동안 살면서 좋았던 시절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원수는 아닙니다. 지금 현재까지 수십 년 사랑하며 살았는데 지금에 와서 원수를 만든다면 내 생애 거의 전체가 원수와 산 것이 됩니다. 그러면 누구보다도 자신이 비참해집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원수로 만들면 만들수록 결국 자신이 비참하게 됩니다. 그 비참함을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그러므로 용서해야 합니다. 원수 같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원수를 용서하면 우리의 삶에 새로운 비약이 생기고 놀랍고 새로운 새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 행복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

우리가 이제까지 세상을 살면서 새삼 발견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한 가지 허물만 나오면 그걸로 완전히 그 사람을 매장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아흔 아홉 가지의 착한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때문에 그 사람을 완전히 매장시키는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참 무섭습니다. 아흔 아홉 가지의 장점이 있어도 한 가지가 잘못되면 그걸로 끝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흔 아홉 가지의 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한 가지 장점을 보시고 아흔 아홉 가지의 실수를 덮어 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를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한 가지 실수가 있어도 아흔 아홉 가지의 장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나는 누구로부터 버림을 당할지라도 먼저 버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직장이 나를 버려도 수십 년 몸담은 그 직장에 대하여 배신감을 느끼지 마십시오. 내가 거기 몸담은 수십 년의 생애를 소중히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신한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고 더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더 나은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행복의 원인은 사람에게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행복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적으로 무엇을 잃어버려도 너무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그 상황을 극복해서 성공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무엇인가 일이 안 풀리고 큰 고통을 당하면 마음은 힘들고 상실감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감사하게도 나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또한 그 믿음을 가진 내 소중한 생명은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더 중요한 것은 남아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는 “내일의 희망이 없다!”고 탄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도 자기의 미래를 절망해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생이란 항상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낙심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일이 잘 될 수 있고, 어떤 때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일이 더 실망스럽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모든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고, 어떤 경우에도 안전을 확신하고, 내일의 산 소망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어려움이 있어도 어려움 후에는 더 큰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항상 주님 중심적으로 더욱 충성하며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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