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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의 늪에서 해방되길 원합니다.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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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자기 생각이나 습관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벗어나 바른 생각을 가지고 좋은 습관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선생님이 초등학교 자연시간에 동물의 울음소리를 가르치고 있었답니다. "강아지는 어떻게 짖나요?"라고 말하자 아이들이 "멍멍멍!"했답니다. 고양이는 "야옹" 닭은 "꼬끼오" 아버지가 카바레를 운영하는 아이에게 "그럼 제비는 어떻게 울까요?"라고 물어 보니까 “사모님~. 사모님~.”하더라는 것입니다. 낱말 맡추기를 했답니다. 반대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쟁의 반대말은 아이들은 크게 "평화"라고 말했답니다. 남자는 "여자" 밤은 "낮" 이 때 중국집 아이에게 "보통의 반대말은?" 이라고 질문하니까 그 아이가 “곱빼기”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누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웃음이 보약이라고 합니다.

"내 몸 개혁 6개월 프로젝트"라는 책이 있습니다. 서울대 가정의학교실 유태우 주임교수께서 쓰신 책입니다. 울대학병원 건강증진센터에서의 임상경험을 토대로 완성한 책인데 그 책에 보면 대부분의 병은 스트레스가 일으킨다라고 써 놓고 있습니다. 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면서 저항력을 키우기 위해 "하루 열 번씩 크게 웃어라"라고 써놓고 있습니다. 고혈압ㆍ당뇨병ㆍ비만ㆍ심장병ㆍ암과 같은 주요 만성질환도 바로 이 저항력 약화가 큰 원인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저항력을 강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웃음치료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운동에도 권장량이 있듯이 웃음에도 권장량이 있는데 아주 큰 소리로 1회에 10초 이상 하루 10회 웃으라고 말합니다. 파안대소(破顔大笑)ㆍ박장대소(拍掌大笑)ㆍ포복절도(抱腹絶倒)ㆍ요절복통(腰折腹痛) 중에서 적어도 박장대소 이상의 큰 웃음이 필요하답니다. 그 효과는 들인 노력의 100배에 버금간답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매일 웃지 못하고 염려가 가득찬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염려라는 것이 유익이 없고 염려한다고 되는 것이 없는 줄 알면서도 염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교보생명에서 수도권 성인 남녀 9백 5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62%가 불안과 염려를 느끼고 살고 있는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염려하는 문제는 자신과 가족의 건강문제가 가장 컸으며 일상의 경제 생활, 불의의 사고, 노후문제 순이었습니다. 사람은 일평생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염려는 우리를 염려의 늪속에 빠져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잃게 하고 영적 건강도 상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의 늪에서 해방되길 원하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염려의 늪에서 해방될 수 있겠습니까?

1. 염려란 하나님을 불신하는 심각한 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1)염려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심각한 죄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병이든 치료하려면 먼저 자신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의사가 질병이 있다고 하는데 의사의 말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의사를 통하여 질병은 치유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학생이 선생님의 지시를 인정하지 않으면 공부를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의사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선생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염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염려란 하나님을 불신하는데서 오는 심각한 죄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왜 사람이 염려의 늪에 갇혀 있습니까? 왜 염려합니까?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주 문제로 늘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방인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재물을 좇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그래서 염려를 말씀하면서 예수님은 25절에서 그러므로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24절에서 사람은 재물 아니면 하나님 중에 한 주인을 섬기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의식주를 위해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을 말씀하시면서 염려하지 말라고 무려 7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염려하지 말라" 34절을 보십시오.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만큼 큰 죄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 16:16)"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 8:24)"
로마서에서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롬 14:23)" 살인죄 간음죄만 심각한 것이 아니라 염려하는 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죄는 반드시 그 죄에 대한 댓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염려는 우리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염려라는 말은 "메림나오"라는 말입니다. "분열하다. 찢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마음을 찢어 상하게 하는 염려의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염려하기 시작하면 '마음을 갈기갈기 찢겨놓는다'것입니다. 염려의 늪에 갇히게 되면 그 때부터 불안해집니다. 평안을 잃어 버립니다. 초조하게 합니다. 무기력하게 합니다. 우울증에 걸리게 합니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마음을 갖게 합니다. 좌절감에 사로잡히게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는 잘못된 자아상을 가지게 합니다. 마음만 병이 듭니까? 아닙니다. 마음의 병은 바로 육체의 병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하나님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라고 했습니다. 염려하게 되면 뼈를 마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노벨 의학상을 받은 알렌스 카렐 박사는 "근심과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일찍 죽는다."고 했습니다.

지난주 건강과 생명이라는 잡지를 보니까 스트레스에 대하여 특집으로 실렸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많은 질병을 일으키는 지 잘 나와 있었습니다. 비타민 C로 유명하신 이왕재 교수께서 '스트레스의 의학적 분석'이라는 글을 실어 놓았습니다. 그 글을 보니 스트레스는 '코티졸이라과 아드레날린'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하여 교감신경을 자극하여 혈관을 좁히고 호흡을 빠르게 하고 침을 마르게 하고 땀을 분비케 하고 소화 기관의 속도를 느리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혈압도 걸리고 당뇨병도 걸리고 암도 걸린다고 합니다. 사람은 몸은 계속해서 백만개의 정상 세포중 한 개의 종양세포가 생긴답니다. 그런데 면역기관이 잘 되어 있으면 종양세포가 일정 수준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억제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제어기능을 상실하여 암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아드레날린을 분비하여 면역체계를 억제해 버린답니다. 그래서 아주 커다란 스트레스 후에 암이 발병하여 사망하는 예를 많이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니다.
염려는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강한 스트레를 줍니다. 그래서 몸을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염려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염려는 사탄이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는 정신적 독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근심과 걱정이 아니요, 평안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 심령속에 끊임없이 근심의 독약을 뿌려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무력화시켜 버립니다. 예수님은 왜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다고 합니까?“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 13:22) 두려워 하여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사명자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마25:25) 자신의 사명을 땅에 묻어두고 살게 합니다.

2)염려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의식주로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음식과 의복보다 중요한 것은 목숨입니다. 의식주에 대한 염려로 마음을 상하게 하고 육신을 병들게 하고 영혼을 병들게 해서는 안됩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생명을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애완견을 기르는 사람이 입을 것 먹을 것 주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공중의 새도 들의 백합화도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라고 했습니다. 병든 자 앞에서 염려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하셨습니다.

12해를 혈루증을 앓면서 염려의 늪에서 살아온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옷자락을 만졌을 때 예수님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5:34)"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염려가 있을 때“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1-6)라고 고백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라고 했습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아들 딸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 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성도의 삶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인데 염려는 이것들을 다 빼앗아 가버립니다. 낙심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힘을 빼어 버립니다. 소망을 잃어 버리게 하고 우울증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신앙 생활의 즐거움을 거두어 가버립니다. 이 때 우리는 염려의 늪에 갇혀 있을 것이 아니라 염려라는 것이 심각한 죄라를 사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고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2. 모든 염려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가 죄라는 사실을 알고 적극적으로 "염려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한다고 염려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없습니다. 염려함으로 결국 내가 손해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 인생은 그 염려의 늪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대부분 중독성이 있어 마치 알코 중독자가 그 알콜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는 것로 해결할 수 있는 염려가 얼마나 됩니까? 알면 알수록 더 염려의 늪에 갇히게 되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의 이성이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같지만 막상 심각한 문제를 만나면 이성의 통제 능력은 미미할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날 보면 시골에 다방이 있었습니다. 시골서 젊을 때 다방을 많이 드나든 할아버지가 며느리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기 시작을 했답니다. 5월이 되어 효도관광을 자녀들과 함께 교회에서 시켜 주었는데 제주도에 가게 되었답니다. 할아버지는 처음 비행기를 타본 것입니다. 스튜어디스가 음료를 주어었는데 할머니가 할아버지 건강을 생각해서 커피를 사양했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왜 나만 빼고 커피돌려! 내 것도 가져와" 라고 말하며 커피 두잔을 시키더라는 것입니다. 잠시 후 스튜어디스가 커피 두 잔을 타 가져오자 흐뭇한 표정으로 스튜어디스를 바라보더니 " 한 잔은 자네 마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잘 고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염려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늘 염려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를 염려의 늪으로 빠지게 하는 것 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염려하지도 않습니다. 거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할 수 없으니까 이 일을 할 수 있으신 분 우리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1)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염려하지 말고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세상의 염려는 혼자 다 지고 가는 사람처럼 24시간 고민하며 전전긍긍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시 37:5)"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 16:3)"
어차피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그것 붙들고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27절에 우리가 염려함으로 키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다른 해석으로 하면 여기서 키는 생명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염려함으로 한 자의 거리를 갈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명을 연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염려하면 할수록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영적 침체만 가져올 뿐입니다. 우리의 생사가 다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염려를 맡아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공중의 새들을 심지도 않은데서 먹게 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백합화도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아름답게 창조하여 입히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것들보다 더욱 우리를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26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아멘. 32절을 읽어 보십시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아멘
그러므로 염려거리가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할 수 없는 것 그것 붙들고 염려의 늪속에 빠져 허우적 거리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2)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못하는 것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다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빌립보서에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걱정하십니까?" 신앙의 사람들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왔을 때 염려하며 낙담한 것이 아니라 기도했습니다.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할 때 염려하며 절망한 것이 아니라 기도해 아이를 얻어씁니다. 히스기야가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염려하며 좌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여 질병을 치유받았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약 5:15)"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염려하며 포기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여 빌립보 감옥을 나오게 된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 11:9)"
다니엘이 총리직을 잃어버리고 죽음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기도하여 능력받고 승리한 것입니다.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 34:6)"

3. 염려의 생각을 복음적인 생각으로 바꾸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1)염려하는 생각을 복음적인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염려를 하게 되면 그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계속 나쁜 생각 부정적인 생각 비관적인 생각이 자신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자꾸 해석을 안좋은 쪽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께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어렵게 남편을 전도했답니다. 그런데 남편 집사님의 담배가 늘 마음에 걸렸답니다. 담배 냄세 내며 교회에 오는 남편도 싫었지만 담배로 인해 질병에 걸리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어느날 좋은 기회가 왔답니다. 신문에 담배의 해악에 대하여 특집이 실렸답니다. 그 신문을 남편 앞에 갔다 주니까 남편이 신문을 보고 사인펜을 가져 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남편이‘금연’이라고 쓰고 담배를 끈을 줄 알고 기대를 했답니다. 그런데 남편은 '신문사절'이라고 쓰더니 문에 붙이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생각이 쓰레기 통을 뒤져 가장 좋지 않은 경우만 상정하여 그 속에서 좌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그릇일지라도 오물이 들어가면 오물 그릇이 되고 맙니다. 아무리 맑은 물일지라도 색소가 들어가면 금방 물의 색깔이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해결하는 방법이 맑은 물을 계속 집어 넣은 것입니다. 맑은 물이 들어가면 시간되면 더러운 물이 정제되게 됩니다. 어느 집사님이 조그마한 땅이 집 앞에 있었답니다. 계속 사람들이 쓰레기를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그곳을 텃밭으로 만들어 채소를 심었답니다. 그 후에 쓰레기가 없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염려의 늪에서 벗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쓰레기를 거두고 복음적 생각을 심는 것입니다. 문제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더욱 염려의 늪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오늘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26절에 보십시오. 목숨을 위하여 몸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공중의 새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기르시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새들이 먹을 것 염려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가만히 굶주리며 죽도록 가만히 놓아 두겠냐는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깊고 정확하게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염려하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은 합리적인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잘못된 감정에 의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대부분 상상과 추측에 의한 것입니다. 신앙적 이성으로 볼 때 세상에 염려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0절 보십시오. 솔로몬은 최대의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인공미도 하나님이 한 송이 백합화에게 준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이세상을 주관하시며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문제가 있으면 염려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통해 우리를 성숙시키시고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염려거리가 있으며 있을수록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9)"
죄악 가운데 죄의 대가를 받을 것을 염려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부모님을 떠나 막막한 미래를 가야하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합니다.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2-3) "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신 31:6)"

2)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채우고 그것으로 끝내면 안되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으로 가득 채우고 가만이 있으면 더 염려의 늪으로 빠져들어가지는 않지만 염려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탈출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남아 있는 한 염려는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염려의 늪에서 완전히 탈출하려면 더 적극적인 방법이 필요합니다. 병들었을 때 이 병으로 하나님이 나 죽지 않게 할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더 적극적이 방법이 필요합니다. 1%로 가능성만 있어도 말씀 붙들고 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치유시킬 것을 믿고 이제까지는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며 살았지만 이제는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그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염려 거리를 계기로 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33절을 읽어 보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삶의 우선 순위를 바꾸는 것입니다. 재물을 좇는 삶을 살며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의식주에 매여 살 때는 아무리 쌓고 아무리 먹어도 염려문제에서 해방되지 못했지만 의식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게 되면 염려로부터 완전히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염려거리가 없어집니다. 어떤 경우든 자족할 수 있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 세상 것을 목적으로 삼고 사는 이방인과는 근본적으로 삶의 방법이 바꾸어져 버립니다. 이 땅의 삶을 목적이 아니라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죽음도 질병도 실패도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욱 보석처럼 만드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않습니다. 은혜로 주어진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자꾸 사람은 내일을 염려합니다. 그러나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면 있는 것이고 안주시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은혜로 주시면 오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때로 괴로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환난이 있습니다. 삶의 고난과 역경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천국과 비교하면 그리 길지 않습니다. 한 날의 괴로움입니다. 염려로 인해 발목 잡히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다보면 어느새 염려는 없어지고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완전한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빌립보서를 통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7)"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 4:9)"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이제 제자들만이 홀로 사명을 감당해야 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염려가 있습니까?
1. 염려란 하나님을 불신하는 심각한 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2. 모든 염려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3. 염려의 생각을 복음적인 생각으로 바꾸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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