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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 (왕하 5: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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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사랑 나눔 축제의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리고 이 잔치를 위해 애써서 준비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평범하게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소박한 꿈은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질병이라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공적 제 일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고 난치의 질병일 때, 아니 절대로 고칠 수 없다고 판정나는 불치의 질병을 만났을 때 이것은 우리의 모든 행복을 한꺼번에 위협하게 됩니다.

방금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을 보시면 행복의 모든 조건을 가졌는데 그의 행복 전체가 다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동안 요즈음 이라크전쟁을 통해서 그 이름이 별로 낯설지 않은 이스라엘과 시리아를 무대로 해서 약 3천 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당시 시리아에서는 벤하닷이라는 왕이 통치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에는 여호람이라는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 시리아에 나아만이라는 한 장관의 이야기를 오늘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사람은 행복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춘 것 같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있었고 정치적인 특권이 있었고 뿐만 아니라 인생에는 자부심을 가질만한 승리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 열왕기하 5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우선 이 사람은 군대 장관이라고 소개됩니다. 군대장관, 요즘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좀 세련된 말로 뭐라고 그러지요? ‘국방부 장관’ 그럽니다. 그렇지요?  당당한 지위가 있었습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라면 요즘 국방부장관하고 다릅니다. 그 때는 잘나가는 복지부장관도 없었고, 통일부장관도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국방부 장관 이면 제일 힘이 있는 자리였습니다. 

거기다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는 말은 ‘그 나라의 왕으로부터 특별한 신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인 모든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기 민족을 구출한 구국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크고 존귀한 자”라고 불립니다. 대단한 이름을 떨치던 장군입니다.

그러나 5장 1절 뒤 부분을 보시면 이 사람이 지금껏 쌓아놓은 모든 것이 위협을 당하는 자리에 와 있습니다. “저는 커다란 용사나”라고 우리말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을 자세히 이야기하면“저는 커다란 용사이다 그러나”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라는 접속사 이것은 반의 접속사라고 그러지요 앞에 잘나가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뒤엎어버리는 말입니다. 그러나 “문둥병자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문둥병자’, 지금도 만만치 않은 병입니다만 그때는 요즘 ‘에이즈’나 아주 악화된 암과 같이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병이었습니다.

훌륭한 국가적인 업적과 왕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고 국민적인 인기가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문둥병자라고 하는 이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불행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끝부분에 보니까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사람은 절망적인 자리에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까? 1. 어느 날 아주 좋은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고칠 수 없는 병을 안고 사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가장 기쁜 소식은 무슨 소식입니까? 그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뜻밖에도 이 복된 소식은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서 들려온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하녀에게서부터 들었던 것입니다. 이 하녀는 본래 이스라엘사람인데 시리아가 전쟁에서 이 하녀를 총으로 잡아왔던 것 입니다. 남자들이 큰 전쟁을 일으켜 고작 한 것이 하녀 하나를 데려 온 것처럼 그런 느낌을 줍니다.

그 가정부가 주인의 부인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주인 나아만이 문둥병이 걸린 다음부터 가정 분위기가 완전히 음산해 졌거든요. 그래서 이 소녀가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살았던 나라 이스라엘에 가면 거기 유명한 선지가가 한 분 있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쓰시는 사람인데 엘리사라는 이름의 선지자입니다. 그분을 찾아가기만 하면 우리 주인께서 틀림없이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캄캄한 가운데 한줄기 빛처럼 그 가정에 비쳤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새로운 삶을 위한 처방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통해서도 시시해 보이는 사람을 통해서도 우리의 삶 전부를 바뀌어 놓을 수 있는 놀라운 처방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비록 하녀였지만 아주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 누구를 만나면 새 삶의 희망이 있을 것인지를 말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도 정확히 오셔야 할 곳에 오셨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혹 처음 이 자리에 오셨다면 정말 쉽지 않은 결단을 하셨습니다.

절망적인 자리에서 새로운 삶으로 나가기 위해서 그가 취한 다음 행동은 무엇입니까?

2. 이 사람은 마침내 지시한 곳으로 갔습니다.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의 말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거기에 희망을 건 것입니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아마 이스라엘로 갔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녀가 분명히 누구에게 가야한다고 말했는데도 엉뚱한 곳을 찾았습니다.

내가 시리아의 군대장관이니까 나는 나하고 동등한 위치에 있는 이스라엘 왕을 먼저 만나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나아만은 “엘리사의 문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초대받아 오신 여러분 울산교회 교우들이 여러분을 행복의 자리에 초대하려고 모셨습니다. 아무도 행복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방문자 여러분 지금 여러분도 선지자의 문 앞에 선 나아만과 같이 바른 장소에 오셨습니다.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장소인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오셨습니다. 정말 잘 하셨습니다.

엘리사의 문 앞에 선 나아만 장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팡파르를 터트리며 이벤트를 해서 환영해주는 환영이겠습니까? 나아만은 어떻게 하면 지금 병을 고칠 수 있는지 그 처방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3. 이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병을 고칠 수 있는 처방입니다. 어떻게 하면 병을 고칠 수 있는지 처방을 받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새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처방이 필요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병을 고칠 수 있는 처방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요단강이라는 강이 있습니다. 말이 강이지 대한민국 비가 많이 내리는 우리나라가 생각하는 강 그런 수준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 사람이 가서 보면 그곳은 개울처럼 보입니다. 흐르고 있는 물도 신통치 않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스라엘을 가보지 못했지만, 남아공에 유학시절 제가 살던 동네에 이런 강이 있더라고요. 모히드 필 이라고 하는, 영어로 번역하면 “Beautiful River” 아주 아름다운 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가 보았더니 우리가 건너뛸 만한 강이고요, 개울이고 흐르고 있는 물은 모두다 흙탕물이더라고요. 모르긴 해도 요단강 수준이 거기서 크게 넘어가지 못한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열 받았어요.

문제는 자기가 도착하면 쫓아 나와서 뭔가를 환영하면서 기대했던 기대를 이루어 주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하인을 보내서  요단강에 들어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시오 그러면 당신의 몸은 낫습니다.

나아만이 그 집을 갈 때 그냥 간 것이 아닙니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그럽니다.

장관쯤 되니까 병을 고치러 오면서도 그냥 오는 게 아니라 굉장한 행렬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근사한 외제차들이 즐비하게 늘어 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자기가 찾아온 엘리사가 나와 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집 바깥에 나와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심부름꾼만 보냈습니다. 그리고 말을 전합니다.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온 것을 미리 알고 그 사람이 병을 고칠 수 있는 처방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나아만이 노하여 물러서서 가로되” 화가 났습니다. 뚜껑이 열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아만이 누구입니까? 시리아에서는 자기 나라에서는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이고 임금조차도 자기를 무시하지 못하는 처지인데 그동안 살면서 모든 사람이 자기를 우러러 보았는데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나라에 왔더니 시골에 있는 엘리사라고 하는 사람이 이렇게 사람을 푸대접 하다니! 기분이 나쁜 겁니다. 그때 종을 통해 들려준 이야기가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가 씻으면 나을거란 겁니다.

그래서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을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깨끗지 아니하냐! 물에 씻어서 문둥병이 나을 것 같으면 우리 동네 강이 훨씬 깨끗하다 거기에서 씻지 하필이면 여기서 씻을게 무어냐! 라고 화를 냅니다. 그렇다고 그냥 화를 내고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네 번째로 오늘 나아만이라는 장군을 통해서 우리가 살필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위한 지혜는 무엇일까요? 병을 고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마터면 그 행복을 얻지 못하고 돌아갈 뻔 했습니다. 하나님의 처방보다도 자기의 처방을 더 신뢰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따라해 보십시오. “내 처방보다 하나님의 처방이 더 중요하다.” 화가 나서 물러서면서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내가 타고 있는 이 마차에 저가 와서 내 이 유명한 나아만이 왔으면 처방전을 가지고 와서 두 손으로 줘도 뭣할 텐데 이런 이야기 입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해요? 나와서 서서 그 손을 내밀어서 내 아픈 자리에 올려놓고 신의 이름을 불러서 낫도록 해야 그 정도는 해 줄줄 알았는데 도대체 뭐냐 그러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아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너무나 화나는 일입니다, 왜냐면 한 번도 사람들에게 그런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전체가 다 우러러 보고 칭송하고 용비어천가를 읊어대고 있는데 화가 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꿔서 생각하면 이 나아만이 웃기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아파서 동네에 있는 병원에 찾아가 보십시오. 가서 의사선생님에게‘선생님, 제 생각에는요. 제 병은 이런 병인데요, 제 생각에는 제가 이런 약을 먹고 제 생각에는 제가 이런 주사를 맞으면 제 생각에는 제가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의사가 뭐라고 대답할까요? 진짜 그러면 의사 선생님이 화나는 겁니다. ‘정말 잘났어, 잘난 사람이 왜 병원을 찾아’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건 지금 병 고치러 가서 엘리사 역할이 의사 역할인데 내 생각에는 제가 좇아 나와서 손을 내어 환부에 얹고 저희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렇게 치료를 해 줄줄 알았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방문자 여러분, 우리가 우리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으면 우리가 왜 신을 찾습니까? 사람이 살면서 모든 일을 내 맘대로 다 할 수 있다면 왜 신을 찾습니까? 5분 후의 일이 정확하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큰소리를 쳐봐야 제대로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택시를 타면서 기사들 가운데 가끔 신경질을 내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저의 얼굴 때문이 아니라 내가 어디로 타고 가야할지 그 방향 때문에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아무 말은 않지만 속으로는 별 사람 다 보겠네 그렇게 입맛대로 손님을 태울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택시기사를 해! 다른 것을 하지 마음대로 손님을 골라서 태우려면 하필 왜 기사를 합니까? 그것보다 더 편한 일들이 많이 있을 건데, 인생이 그렇게 우리 생각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을 가집니까? 사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5분 후의 일도 모르고 내 인생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른다는 겁니다. 내가 세상에 내 뜻대로 온 것이 아니라 가는 것도 내 뜻대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 하나님 하나님이 같이 해 주셔야 됩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 주셔야 됩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신앙을 갖게 됩니다.

주님은 한번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라야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느니라. 나는 건강한 사람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나는 병든 사람을 위해서 찾아왔노라.”

예수님이 스스로를 의사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 모두는 마음의 병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병이 아니라 육체의 병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영혼의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지적하는 죄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외로움 속에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 때때로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우리가 헤맬 수밖에 없는 이유, 성경은 그것이 죄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영혼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의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까?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겸손히 우리가 병든 자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건강하다고 내가 다 알고 있다고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 화를 내고 돌아서려고 하는 나아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깊숙한 곳에 있는 나의 좌절과 불안과 허무와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인생이 이게 전부입니까? 사람 살아가는 것이 이것이 전부입니까? 우리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 삶이 이것보다 무언가는 달라야 되지 않습니까? 이런 항변을 할 수 있는 사람 같으면 하나님을 한 번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껏 살면서도 우리 나름대로의 길을 뚫으려고 노력했지 되는대로 살지 뭐! 그렇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좀 남들 보다 보람 있는 삶을 살겠다고 발버둥을 다 쳐 보았지요? 여러분의 생각대로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삶에 대해 어떻게 느끼십니까?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삶, 풍성한 삶, 정말 사는 것 다운 삶을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어떤 삶입니까? 마음에는 평안이 있고 일신에는 감사가 있고 눈을 뜨면 생활이군요. 한 번도 살아 보지 못한 이 세상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루를 마감하면서 사는 것이 황홀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그 복된 삶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삶은 힘들고 외롭고 짜증나고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살아야 될 자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이라는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는 그렇게 말 합니다. “내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는 순간 하나님의 치료가 시작된다.” 내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는 순간에 하나님의 도움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내어 놓고 하나님 할대로 해 보았지만 이제 당신이 맡아서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말 하는 것이 신앙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으러 나왔던 나아만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어 보십시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서 내 상처 위에 손을 흔들며 자기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를 고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 병을 고치러 와서 그 집 문 앞에 서서도 아직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오셔야 할 자리에 바로 오셨지만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도 자기 생각에 사로 잡혀 있으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내려놓으시고 한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셔야만 합니다. “하나님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의 처방을 신뢰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나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처방이 내게는 필요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면 오늘 아침에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면 삶이 바뀝니다.

새로운 삶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마지막 결단은 무엇입니까?

4. 나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그는 왜 화를 냅니까?

자기 생각대로 선지자가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세상에서 정말 내 생각대로 상대방이 행동해 주지 않으면 화내기 시작하면 세상 살면서 죽는 순가까지 화가 납니다. 미음을 받아 마시면서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도 신경질을 냅니다. 아내에게 해준 것이 무어 있다고, 살면서 해 준 것이 뭐 있다고, 왜 그렇습니까?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고 화를 내기 시작하면 사는 길이 걸어가는 길이 항상 가시밭길입니다. 아무도 여러분의 생각대로 해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 속에서 태어난 조막만한 녀석도 크면 여러분의 말을 듣지 않잖아요.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땅히 선지자의 손이 그 상처위에  얹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왜 이런 주장을 펼칠까요? “내가 누군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자기의 신분을 의식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시리아의 제일 잘 나가는 군대장관 이다 지금은 비록 문둥병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참 사람은 이상해요 지금은 그 높은 위치를 생각할 때가 아니고 병 고치려고 이스라엘의 궁벽한 촌에까지 왔지, 병을 고치려고 왔으면 그 일에 관심을 써야지 거기에 와서도 내가 비록 문둥병이 들기는 했지만 내가 누군데 이럽니다. 내가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그래도 왕년에는 잘 살았어! 이렇게 나옵니다.

문제의 해결, 문둥병에서 고침 받는 것보다도,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것보다도 아직도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신분입니다. 사람들이 날 어떻게 대해 주나 날 어떻게 대하나 이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체면의식 때문에 하마터면 병도 고치지 못하고 고생만 하고 갈 뻔 했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떤 사람에게도 신분이나 체면은 중요한 일입니다만 특별히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 체면이 참 중요합니다. 한국 사람들 가운데 예수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유달리 체면 때문에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한번 친구 체면 봐서 가주지만, 이럽니다. 나온 것도 체면입니다. 그렇지요? 나왔다가도 결국 신앙생활에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체면입니다. 특별히 경상도 양반들에게는 예수 믿지 못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이 체면 입니다. “뭐, 내가 지금까지 안 믿고 살아왔는데 내가 이 나이에 종교를 바꾸란 말이냐! 체면이 있지”이럽니다.

그래서 우리 말 가운데는 이 체면과 관련된 언어들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체면이라는 ‘면’이 뭐예요. 바로 얼굴이지요. 그래서 그 사람 얼굴이면 통하지 않는데 가 없다 그렇게 말하기도하고 아 그 사람 얼굴 한번 넓어 두꺼워 이런 사람도 있고요. 제 얼굴을 봐서라도 한번 부탁합니다. 그러기도하고요. 야! 내 얼굴에 먹칠 좀 하고 다니지만 그러기도 하고요. 그렇지요?

우리는 얼굴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합니다. 얼굴 때문에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맙니다. 체면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문둥병고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죽을 병에서 살 수만 있다면 체면이 문제입니까?

내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체면이 문제입니까?  이 체면을 뛰어넘어야만 합니다. 더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죽음에서부터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못 죽어서 사는 삶에서 부터  정말 사는 것 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영원한 천국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이제 이 체면과 신분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영국의 청교도 시절에 크롬웰이라는 유명한 장군 이야기를 아시지요. 이 장군이 어느 날 교회에 갔습니다. 높은 사람들에게는 의례히 수행원들이 따라 다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는데 남루한 옷을 입은 청년이 자꾸 장군님 옆에 앉으려고 해요 그래서 수행원들이 눈을 부라리면서 못 오도록 합니다. 그러니까 크롬웰 장군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로 나두게 이 청년을 그대로 나두게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야.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 아닌가?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한 가지 신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올 때는 장관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위원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을 나올 때는 교수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장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올 때는 가문 좋은 양반 집안의 후손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 좋은 똑똑한 여자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오직 한 가지의 신분만이 존재합니다. 그 신분은 죄인이라는 신분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삯이 사망입니다. 그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도 죽은 후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갈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에서 꼼짝없이 사로잡힌 인생을, 죄인이라는 이 신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데니엘 웹스터 라는 유명한 정치인이 있었어요. 워싱턴에서는 다 알아 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먼곳에 있는 교회를 나가지않고 주일만 되면 버지니아에 있는 조그만 산골교회를 찾아가서 에배를 드렸습니다. 사람들이 왜 의원님께서는 워싱턴의 큰 교회를 다 나두고 산골짝에 있는 작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립니까? 라고 물으니까 데니엘 웹스터가 하는 말이 내가 큰 교회를 나가면 나를 잘 아는 목사님들이 정치가 데니엘 웹스터에게 설교를 하니까 내가 정말 들어야 하는 죄인 웹스터에 대해서는 설교를 하지 않는단 말이요 나는 내가 들어야할 메시지를 위해서 나를 모르는 곳에 갑니다. 내게 정말 필요한 메시지를 위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우리에게는 오직하나의 신분만이 존재합니다. 죄인이라는 신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맞이하시고 우리를 품에 안아주시고 우리를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관한 이야기가 성경의 주제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죄인이지만 구별하지 않고 밀쳐버리지 않고 밀쳐 내지 않고 받아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깊은 사랑 가운데서 우리가 다시 태어나게 되면 표정이 바뀝니다.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입술에 감사와 찬송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을 만난 구약의 옛날 시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저를 이토록 돌아보시고 사랑해 주셨습니까?”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우리를 권고해 주십니까?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닌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태어나신 분들입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옆의 사람에게 말해봅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고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 가운데서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예, 선뜻 믿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을 못 들었습니다. 우리 엄마가 화나면 우리에게 그냥 험한 욕을 하면서 가서 죽으라든지, 혀가 빠질 놈아! 그러든지 이런 이야기를 주로 많이 들었는데 교회에 오니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그러니까 안 믿어지는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맞습니다. 믿어지지 않아도 여러분이 못 믿어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나아만이 어떻게 치료를 받습니까? 드디어 하나님의 처방, 그 처방 앞에 한 번 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열 받아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는데 종들이 길에 그냥 엎드린 겁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을 시켜도 병 낫기 위해서 순종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물에 들어가서 일곱 번 잠겼다가 나오는 것인데 그것 못할 리 있겠습니까? 제발 오셨으니까 시키는 대로 한번 해 봅시다.

화가 나면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말이 맞아요. 자기가 여기까지 온 것은 훈장 달고 폼 잡으려고 온 것 아니잖아요. 병 고치려고 온 것입니다. 주 이유가 병만 고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나아만이 종들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던 마차에서 자기가 내려왔습니다, 눈높이를 사람들과 같이 해야겠기에 뿐만 아닙니다. 사람들이 늘 같은 높이에서 자기를 우러러 보는 것은 자기가 입고 있는 예복입니다. 달려 있는 훈장들입니다. 물에 들어가려면 이것을 벗어야 됩니다. 그대로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벗어놓고 그리고 물에 들어간다는 것은 길에서부터 더 낮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서 있는 자리에서 더 낮아져서 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들어가도 쉽지 않는 것은 한번 들어가면 뭔가 상처가 낫는 기미가 보여야 되는데 보이지 않거든요. 한번 딱 교회에 나가면 돌아가면서 뭔가 이벤트가 하나 생겨야 하는데 그러질 않습니다. 3년을 교회에 따라 가 보았는데 아직도 뭔가 일이 풀리지 않아 그래서 사람들은 중간에 포기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일곱 번을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세 번 들어갔을 때 변화가 보였을까요? 다섯 번, 여섯 번,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일곱 번째 물이 효험이 있어서 문둥병을 고칠 수 있으면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조금 바뀌고 두 번들어가면 조금 바뀌고 세 번 들어가면 조금 더 바뀔 거라면, 그러나 치료하시는 것은 물의 효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일곱 번째로 들어갔다가 나오니까 눈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해 졌습니다. 어린아이의 살 같아 졌습니다. 물에 들어가셔야 하고 일곱 번 몸을 담궈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방문자 여러분, 어떤 분은 데이트를 하러 가면서 그렇게 생각을 했대요. 내가 열 번은 만나보고 가부간 결정을 하리라고 결심했답니다. 일생을 함께 할 사람을 결정하기 위해 적어도 열 번을 만나볼 필요가 있다면 한 평생이 아니라 영원한 운명이 달린 문제를 두고 너무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오늘 아침 여러분 모두가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영접하므로 새로운 삶을 한번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지금 까지는 내 생각대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살기로 한번 결단을 합시다. 

그 결과가 여러분은 무엇일지 말하고 있습니다. 참 만족과 기쁨이 없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한번 나아가 보십시오. 그러면 사는 것이 새로워 질것입니다. 만물이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누울 때도 오늘 정말 멋진 삶을 살았어! 그렇게 하루를 마감하면 뒷날 아침에 눈을 뜰 때는 하나님 아무도 밟아 않은 하얀 눈 같은 새날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정말 믿으세요. 그런 삶도 있습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그런 삶이 있습니다. 

혹시 오늘 말씀을 듣고 결단이 되지 않는 분이라면 적어도 남은 일곱 번은 하나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충분한 기회를 가지시고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일곱 번은 하나님 앞에 나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복된 새로운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건강을 잃어버리고, 죄로 말미암아 행복을 잃어버리고,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처방을 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를 위한 새로운 하나님의 삶의 처방이 여기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예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짊어지고 거룩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보배로운 용서의 강, 이 사랑의 강에  한 번 몸을 담궈 보십시오.

오늘 아침, 이 아름다운 순간,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처방인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아름다운 인생을 회복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정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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