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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놓은 땅의 기초 (욥 3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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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의 욥기는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38장에 와서 여러 가지가 크게 바뀝니다.

욥기는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는 데 대화의 주체가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사람과 사람의 대화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욥의 친구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이 돌아가면서 욥과 대화를 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제4의 인물인 부스 사람 엘리후가 등장하지요.
38장부터는 하나님과 욥의 대화로 바뀝니다.

대화의 형식도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주고받는 말의 분량이 거의 같았습니다.
친구가 한마디 하면, ‘너는 이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하면  욥도 ‘아니다! 나는 이렇게 의롭다!’ 대꾸를 했습니다.
기를 쓰고 대답했습니다.
38장부터는 주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욥은 거의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중간에, 40장 3절과 4절에 욥의 짧은 대답이 들어있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끝낸 다음에, 42장에 가서야 욥이 간신히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것으로 이 대화는 끝이 납니다.
대화의 내용, 대화의 소재도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인간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38장부터는 주로 자연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세요. 땅, 새별 별, 바다, 자연계의 일들이 등장합니다.
본문 앞의 37장, 엘리후의 이야기부터 하나님이 등장하고 번갯불, 눈, 비, 폭풍우 등이 등장하면서 분위기를 조금 바꾸더니 38장에 와서 대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은 본문을 살피면서  세 가지 교훈과 은혜를 얻으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한눈팔지 않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면밀하게 지켜보고 계십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언제 개입할까 헤아리시며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1절을 보세요.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욥기에서 하나님은 2장에서 잠깐 등장하셔서 사탄과 대화를 나누시고 사라지십니다.
그리고 38장에서야 다시 등장하십니다.
‘아니 그동안, 욥이 그렇게 무서운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가셨단 말인가? 주무셨단 말인가? 외출하셨단 말인가?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셨던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더구나 욥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욥기 13장 32절,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그러나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욥은 너무나 안타까워서 이렇게 말합니다.
욥기 30장 20절입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아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욥이, 더구나 하나님 자신이 내 종이라고 부르고,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없다고 칭찬하던 욥이(욥2: 3) 그렇게 안타깝게 부르짖는데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시다니 어떻게 된 것인가?’
불경스러운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이 청각장애를 일으키셨단 말인가?’ 궁금해집니다.
하나님은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외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외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욥이 받는 고통을 지켜보셨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등장해야할 때다’ 판단되었을 때 드디어 등장하신 것입니다.
1절, “그 때에”는 ‘가장 적합한 때에’라는 뜻입니다.

운동 경기를 할 때 감독을 선수 교체시기를 놓고 고심을 많이 합니다.
선수 교체가 승패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번 월드컵 예선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서도 후반에 정경호 선수인가요, 교체되어 그라운드에 들어가자마자 기세 좋게  골인을 시켜 승부를 거의 확정짓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춰서 친히 출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거기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태초의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책임지고 관리하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겪는 고통을 돌보시고 개입하셔야 할 때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더구나 욥이 받는 고난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 일은 욥기 1장과 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욥을 칭찬하셨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이 아니냐고 그의 소유물을 치면 틀림없이 주를 향해 욕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긴다고 했습니다.(욥1: 12)
나중에는 그를 네 손에 맡긴다고 했습니다.(욥2: 6) 건강을 해쳐도 좋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욥의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된 일인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인데 하나님이 모른 척하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이 무책임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세요.
어려운 일이 계속되다가도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문제가 해결되게 하시고, 다시 일어서게 하시고, 새 국면이 열리게 하신 일이 참 많습니다.
많은 것이 아니라 늘 그랬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나라가 지금까지 존속해 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때를 보면 모두 결정적인 순간들입니다.
성급하시게 개입하지도 않으셨고 늦게 개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들은 늦는다고 조바심을 할 때가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때가 가장 적절한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을 때도 하나님은 독생자의 고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 34)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 46)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고통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너무 가슴이 아파 바로 보지 못하시고 눈을 감으셨거나 고개를 잠시 돌리셨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5절을 보면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었고, 제구시에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 46) 크게 소리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도 하나님은 예수님의 고통을 친히 느끼고 계셨습니다.

내가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일에 하나님은 지금 당장 개입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아니다, 저 사람이 더 깨달아야 한다, 저 사람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 겸손해져야 한다.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리자!’하면서 참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인간의 한계점에 이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까 친구가 한마디 하면 욥도 지지 않고 한마디 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욥이 말을 더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33장부터는 보세요. 엘리후가 욥을 향해 많은 말을 하는데 욥은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지쳤기 때문에, 기진맥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폭풍우 가운데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자동차에 GPS를 달았습니다. 저는 복잡한 것을 잘 다루지도 못하고 따라서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잘 설치하지 않습니다. 전에 있던 직장에서 장비를 구입할 일이 많았는데 단순한 것을 구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무인 카메라에 신경이 쓰여서 다른 차에 달린 GPS에 관심을 보였더니 교육부에서 달아주었습니다. 교사양성교육에서 두 번 강의했는데 그 강사료 대신이랍니다.
그거 참 신기합니다. 위성에서 내려다보면서 ‘앞에 지하차도가 있습니다.’ ‘이 도로는 제한속도가 얼마입니다.’ ‘과속단속 무인 카메라가 있습니다.’ 잘 알려줍니다.
‘당신은 지금 동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남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보여 줍니다.
그 조그만 기계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기계가 뭐라고 할 때 저도 모르게 그 기계에 대고 ’알았어, 임마!‘ 몇 번 대꾸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GPS 이상으로 세밀하게 우리를 살피십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 하셔야합니다.

여러분,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때에 나타나실 것을 또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은 근본적인 답을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가 하시는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근본적인 답입니다.

욥은 왜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까?
하나님의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 했습니까?
하나님이 부드러운 얼굴로 웃으며 나타나셔서 ‘내 사랑하는 욥아,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느냐? 너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고생을 했단다.’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드디어 나타나시는데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첫마디가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심한 꾸지람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반가워하다가 이 꾸지람을 듣고 놀라서 졸도했을지도 모릅니다.

4절을 뒷부분을 보세요. 하나님은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너는 다 아는 척하지만 아무 것도 모른다.’ 하는 뜻입니다.
‘너, 왜 그렇게 잘난 척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꾸지람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합니다.
하나님의 꾸지람 속에 더 큰 사랑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징계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네가 소유를 잃은 것은 이 때문이다’ ‘네가 자식을 모두 잃은 것은 이 때문이다’ ‘네가 건강을 잃은 것은 이 때문이다’ 하나하나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조주인 내가 하는 일에 네가 왜 이러쿵저러쿵하느냐!’ 하셨습니다.
근본적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단에 대해서 가르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통일교(지금은 가정연합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만)는  이래서 이단입니다.’ ‘안식교는 이래서 이단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래서 이단입니다.’
‘장막성전은 이래서 이단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은 이래서 이단입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가르치는 것입니다.
귀납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나는 ‘기독교의 기본진리는 이것입니다.’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기독교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습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이런 공헌을 해 왔습니다.’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에서 벗어나면 이단입니다!’ ‘이것과 다른 주장을 하면 이단입니다!’하는 것입니다.
연역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의 방법을 쓰면 새로운 이단이 생길 때마다 설명해 주어야합니다.
뒤의 방법을 쓰면 성도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뒤의 방법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고기 한 마리를 주시지 않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해 하나하나, 모두 답을 가져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 하나님의 능력 앞에 나는 무지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든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해야합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구조를 하박국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박국서 1장에서 하박국은 하나님께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새번역성경」에는 성경말씀에 문장부호가 들어 있는데 하박국서 1장에는 물음표가 일곱 개 나옵니다.
하박국서 2장에서 하나님이 대답을 하시는데 하박국의 여러 질문에 대해서 하나하나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박국은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합1: 2) 부르짖었는데 하나님은 ‘그것은 이 때문이다.’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박국은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합1: 3) 부르짖었는데 하나님은 ‘그것은 이 때문이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 4b)

하셨습니다.
‘궁금한 일,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일, 모순이라고 여겨지는 일이 많더라도 하나님을 믿으면 서 살아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채점관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해서는 안 된다.’하는 정답 앞에서 욥은 몇 점쯤 될 것 같습니까?
우선 낙제는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욥기 13장 15절 앞부분을 보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는 말씀을 “그가 나를 죽이실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욥은 이 점에서는 일단 합격입니다.
그런데 37장까지는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끝까지 따졌기 때문입니다.
점수를 준다면 C+ 또는 B-쯤 될 것 같습니다.

4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욥기 38장부터 41장까지 욥은 하나님의 집중 보충수업을 받습니다.
그리고 42장에 가서 모범답안을 제출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스스로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했습니다.
A+++입니다.

자, 여러분, 욥을 채점하셨으면 여러분 자신을 채점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해서는 안 된다’는 정답 앞에 나는 몇 점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신뢰하셔서, 특별히 나에게 하는 일을 신뢰하셔서
여러분도, 저도 A+++ 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존중해야합니다.

우리가 이 교회당 건축에 대해 말할 때 거의 빼놓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이 교회당은 정림건축이 설계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자랑 비슷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 회사가 유능한 설계회사로 인정받고 있고, 인천 국제공항 설계에도 참여하고 잘 알려진 건물들을 많이 설계했기 때문입니다. 
자, 하나 묻습니다. 이 세상은 누가 설계했습니까?
하나님이 설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땅의 기초를 놓으시고 설계하셨습니다!
5절,

누가 그것의 도량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었는지 네가 아느냐

하는 것은 ‘내가 이 세상을 설계했다’는 뜻입니다.
「새번역성경」은 5절을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었는지, 너는 아느냐?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설계하고 기둥을 세우고 모퉁잇돌을 놓으셨습니다.
설계, 시공, 감리 모두 하나님이십니다.

7절,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정확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인데 아마도  새벽 별,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기서는 천사를 말합니다.- ‘하나님, 설계 참 잘하셨습니다! 명 설계입니다!’ 하였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설계가 얼마나 치밀한지 보세요.
바다를 지으실 때 ‘여기까지가 바다이다. 여기부터는 육지이다.’ 한계를 정하셨습니다.
‘바닷물, 너는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한다. 파도가 아무리 높더라도 여기에서 스톱이다!’ 경계선을 그으셨습니다.

바다에도 정해진 한계가 있는 것처럼 세상의 일에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지켜야합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무리 발달해서 디지털 시대를 이루고 생명문제에 개입하게 되었어도 지켜야 할 한계가 있습니다. 
요즘 여기저기에서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데 개발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바닷물의 한계가 부분적으로 무너지는 것이 해일입니다. 해일, 얼마나 무섭습니까?
사람이 지켜야 할 한계를 지키지 않으면 그것보다 더 무서운 재앙을 만날 것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선악과입니다.
그 한계를 침범한 데서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12절을 보세요. 새벽이 오는 것도 하나님의 설계 가운데 하나입니다.
14절은 새벽빛이 오면 언덕과 계곡을 옷의 주름처럼, 진흙 판에 찍은 도장처럼 뚜렷하게 보이게 한다는 뜻입니다. 아주 시적인 표현입니다.
하루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새벽입니다.
산 위에서 새벽이 오는 것을 바라본 일이 있는 사람은 이 표현에 공감하실 것입니다.
결혼 주례를 할 때 먼저 신랑이 입장합니다. 그러면 주례에게 인사하고 돌아서게 합니다.
그 다음에 신부가 입장하는데 신랑에게 잘 보아두라고 신부의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라고 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그 말 속에는 ‘같이 살아가면서 좀 못마땅하게 여겨질 때도 있고 밉게 보일 때도 있겠지만
입장할 때의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면서 행복하게 잘 살라‘는 당부도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매일 새벽을 맞이하실 때 14절의 이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루 살아가면서 좀 힘든 일이 있더라도 새벽의 벅찬 아름다움을 생각하면서 이기시기 바랍니다.

아까 ‘한계’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우리가 겪는 고통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무한정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욥기 38장에서 41장까지는 ‘창조의 신비’ 이런 제목을 붙일 수 있겠는데 여러 가지들이 무질서하게 등장합니다.
22절에는 눈, 우박, 25절에는 홍수, 우레, 번개, 28절에 비, 이슬방울, 31절부터는 별들 이야기, 39장에는 동물들의 이야기, 40장에는 괴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베헤못 이야기, 41장에는 역시 괴물인 리워야단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주 무질서하게 나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무서운 질서가 그 가운데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도 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창조의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 질서를 깨뜨려서는 안 됩니다.
이 질서를 깨뜨리는 것을 우리는 환경파괴라고 부릅니다.
이 질서를 존중하고 이 질서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우리는 환경선교라고 부릅니다.

이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 숨어 있는 오묘한 진리를 존중하고 선용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본문 밖의 34절과 35절을 보세요.

네가 목소리를 구름에까지 높여 넘치는 물이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번개가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이 말씀은 제가 목양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기 전까지 이십여 년 간 섬기고 있던 직장에서가장 귀하게 여기는 말씀입니다.
그 직장은 원래는 중국과 구소련지역과 북한에 중파방송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제가 그 분야의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지금은 국내방송에 더 힘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파방송을 그 먼 지역까지 보내려면 특별한 설비가 필요합니다.
서울에서 하는 중파방송도 대전 정도 넘어가면 들리지 않지요. 
그래서 출력도 강하게 하고, 지향성이라고 북한으로 방송을 할 때는 전파를 북쪽으로 집중시키고, 중국어 방송을 할 때는 서쪽으로 집중시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쓰는데 제일 기본적인 것은 바로 이 말씀에서 얻은 것입니다.
일정한 높이의 구름이 밤이 되면 전기성분을 갖는데 이것을 전리층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전파를 보내 반사시켜서 멀리까지 보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공간파라고 하지요. 영어로는 Sky Waves라고 합니다.
그 방송은 보우먼이라는 분이 설립했습니다.
이차대전이 끝나고 제일 먼저 필리핀에 방송국을 세우고 여기저기 확장을 했습니다.
방송국을 세우기 위해서 미국에서 필리핀에 가는데 그 때는 비행기 여행이 발달하지 않아서 배를 타고 갔답니다. 수십 일이 걸렸겠지요.
밤마다 갑판에 나와서 밤하늘을 보면서 창조의 오묘함을 다시 깨닫다가 이 말씀에서 영감을 얻어 이 방법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선하게 활용하는 일의 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가지고 고민을 좀 했습니다.
‘하나님이 놓은 땅의 기초’ 이것은 사실은 기독교의 전통, 또는 질서라고 할까 하는 것에서는 좀 어긋나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는 무엇이라고 해야 합니까?
‘땅의 기초를 놓은 하나님’이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악센트를 두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 중심이니까요.
오늘은 ‘하나님이 놓은 땅의 기초’라고 하기로 했습니다.
오늘이 환경선교주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종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횡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질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바탕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종적인 사랑과 이웃 사랑 횡적인 사랑을 합하면 열십(十) 자가 되는데, 거기에 바탕에 획을 하나 더 그어서 흙토(土)자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흙토 자 사랑의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과 저를 더 사랑하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가 겪는 일을 모두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인 진리를 깨우쳐주십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창조질서의 주인이십니다.

이 교훈을 생각하면서 용기를 얻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존중하기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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