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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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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요 5: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요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요 5: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여러분! 인류 최초의 남자인 아담이 최초의 여성인 하와에게 한 최초의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와 유?"라고 합니다. 하와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하와 유--"

어느날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 가로 찾아 가셨습니다. 이 못은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더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는 문이 여러개가 있는데 그 여러개의 문 가운데 양문이라는 문이 있습니다. 양문이라고 하는 곳은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를 위해 수많은 양들을 바쳐야 하니까 양을 몰고 드나드는 문이라 그래서 양문이라 했습니다. 이 문 곁에는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은 간헐천, 온천수가 가끔 땅의 기압에 의해서 치솟아 나오는 그런 온천수가 흐르는 곳이었어요. 온천이라고 하는 곳은 각종 피부병에도 좋고, 위장병에도 좋고, 그리고 뜨거울 때 그 물이 솟아 올라올 때 들어가면 엄청난 효과가 있겠지요? 그래서 많은 환자들이 자연요법으로 치료하기 위해서 모여 들었어요. 게다가 가끔 천사가 연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나라에 각색 병을 가진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못가에서 기다리며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베데스다 연못에 종종 물이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그때 고침을 받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물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마다 이 병자도 재빨리가 뛰어들려고 했지만 거기에도 생존경쟁은 치열해서 그에게 치료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상태가 좋은 사람이 먼저 뛰어들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뛰어들고, 그는 다리를 못 쓰니까 기어가다가보면 다른 사람들이 다 들어가 있고 이미 연못의 소용돌이는 가라앉고 맙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낫을 기회를 놓치고 지금껏 38년째 병자로 거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렇게 안타까운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이 베데스다 연못가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중에서 그 중에 가장 오래된 38년된 병자앞에 다가가셔서 그를 살펴보십니다. 그리고 그의 병이 이미 오래된 병임을 아시고,환자를 향하여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주여, 물이 움직일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연못의 물이 동하지 않았으나 그 연못에 들어가지도 않았으나 38년된 병자의 다리에는 38년만에 힘이 들어갑니다. 일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이 병자의 마음에 믿음이 가득차고 주님으로부터 치료함을 받은 이 놀라운 사건을 성경에 기록함은 무슨 이유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가로 찾아가셨습니다. 이 베데스다라는 말은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긍휼과 사랑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와 같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긍휼과 자비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38년된 병자와 같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걸어가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짧지만 의미있는 질문을 던지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에게 던지신 질문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중심으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1. 네가 아직도 낫기를 소원하느냐?는 뜻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너 낫고 싶냐?는 질문은 하나마나한 질문입니다. 당연히 낫고 싶지, 아프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렇게 물었을까요?
사람들은 기다리다가 지치는 습성이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주님은 왜 물었을까요? 그것은 아무도 그 병자를 옮겨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제는 거의 포기 상태에 있는 그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38년동안 마음대로 거동하지 못하고 누워만 지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또한 얼마나 좌절이 되겠습니까? 그동안 낫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겠습니까? 용하다는 의원을 다 찾아 다니고 좋다는 약은 다 먹어보고 마지막으로 베데스다 연못의 소문을 듣고 와서 기다리는데 연못 물이 동한것을 보고 달려가면 번번이 늦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경험상, 이치상, 조건상 아무리 생각해도 치료받아 건강을 되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포기하고 희망을 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오랜 병에 효자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효자라고 하더라도 처음에 부모가 중병을 앓아 누우면 간호를 얼마동안은 잘 하겠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 3년이 되면 효성스런 마음으로 간병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고생이 되다보니 짜증을 내고 귀찮게 여기기 쉽상입니다. 점차 나을 것이라는 희망은 사라지고 돌아가시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당사자이지만 38년이나 누워서 지내면 자포자기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병자에게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네가 아직 낫기를 소망하며 절망과 싸우고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주님도 절망한 사람은 도우실 수 없습니다. 사단은 절망이라는 독약을 가져다 놓고 지친 사람으로 하여금 빨리 먹고 영원히 멸망하라고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절망하여 자신을 무가치한 것에 함부로 내어주지 않고 끝까지 소망을 붙들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공부를 잘 못해도 소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전도대상자가 아무리 전도해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늘 연약하여 결심을 지키지 못하고 주저 앉는다고 자포자기 하지 마십시오. 사업의 위기를 만났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중병에 걸려 병균이 여러분을 갉아 먹고 있다고 해도 절대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자 오늘 여러분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다시 말해 네가 아직 포기하지 않고 소원을 품고 기도하느냐? 는 말슴입니다.

바클리라고 하는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받을 수 있는 요건이 즉 그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열망의 요건이 어느 정도 있었을 때에 예수님의 능력이 발휘된다고 얘기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바친 시간과 열정. 그리고 헌신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성과가 크길 바라고 또 조급히 큰 성과를 보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갈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유명한 무디*선생도 한번은 자기의 사업성과가 너무도 미미한 것에 낙심하여 서재에 앉아 있었습니다. 때마침 그의 친구가 찾아와서 낙심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무디는 자기가 일한 성과가 너무 작아 낙심했다고 친구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자네 노아의 생애에 대하여 공부해 본 적이 있는가?"하고 물었습니다. 무디가 "아니, 그의 생애에 대하여 특별히 공부한 일은 없는걸."하고 대답하자 친구는 무디에게 노아에 대하여 공부하라고 권하였습니다.
무디는 친구가 간 뒤에 구약을 펴 들고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느라 여러 해 동안 온갖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받았으나 끝까지 실망하지 않고 견딘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방주가 완성되었을 때 노아의 가족 말고는 오직 육축 즉 짐승만이 방주에 오를 수 있었던 부분을 읽으며 크게 깨닫고 외쳤습니다. "아, 나의 조급함이 이리도 어리석은 것임을!" 그의 결심으로 침울함은 사라지고 엎드려 하나님께 새로운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하였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려운 환경속에서, 불가능할 수 밖에 없는 조건속에서도 포기하지않고 믿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도 크고 놀라운 소원을 가지고 끝까지 소망을 붙잡고 큰 소리로 "예, 꼭 낫고 싶습니다."하고 부르짖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깨끗이 치유받기를 축원합니다.

2. 네가 나에게 믿음을 보이겠느냐?는 뜻입니다.

네가 낫고자하면 만병의 치료자이신 예수님께 믿음을 품고 나아오라는 말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 그 시간에 한 사람을 치유해주시기 위해 그곳에 가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치유하시기에 앞서 그의 믿음을 확인하실 필요가 잇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치유해 주셨지만 거의 늘 믿음을 품은 사람에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주 "네가 나을 줄로 믿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치유하시는 능력은 예수님의 것이지만 치유받는 사람이 받아 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충만한 토양속에서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은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그 놀라운 능력은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중에 함께 계시며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전능하신 예수님앞에서 믿음을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시기에 앞서 먼저 믿음을 촉구하십니다. 여러분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믿으시고 그분이 여러분을 치유해 주실 것을 믿으십시오.

유명한 흑인 오페라 가수인 제시 놀만이 만델라가 남 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것을 축하하여 영국 런던 웸블리 스테디엄에서 열린 음악 공연회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순서는 맨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날 대부분의 출연자들인 인기 록 밴드 그룹들과 록 가수들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그룹이 무대에 올라 공연할 때마다 7만 이상의 군중들은 광란에 가까운 기성과 흥분으로 온 종일 열광했다고 합니다. 무려 10시간이상의 광란의 열풍이 지나간 후 어두원진 밤 제시 놀만이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무대에 두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고 합니다.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후 그녀는 반주도 없이 아카펠라로 천천히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노래는 뜻밖에 찬송가였습니다. 죄의 노예가 된 인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미하는 전직 노예상인이었다가 회개하고 구원받아 노예 해방을 위해 일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존 뉴턴이 작사한 찬송이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장래는 숨소리하나 들리지 않도록 조용해 졌습니다. 3절이 시작되자 여기 저기서 사람들은 잊혀졌던 이 찬송을 따라 조용히 노래하기 시작하기 시작합니다. "이제껏 내가 산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노래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울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한동안 스태디엄을 떠나지 못했고 사람들은 깊은 적막 속에서 침묵에 잠겨 있었다고 합니다. 한 기자는 그 날 그곳에 성령이 임하셨다고 보도했다고 합니다. 그날 그 제시 놀만의 노래는 다음 주일 적지 않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교회로 향하게 했다고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날 놀만의 노래속에 증거된 그리스도의 은혜가 병들고 상처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한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여러분의 모든 질병과 마음의 상처 그리고 영혼속의 깊은 병인 죄를 다루시고자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분앞에 믿음을 보이고 마음을 여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아픈 곳을 내어 맡기고 아픈 마음의 상처를 그분께 보여 드리십시오. 체면과 가식을 다 벗어던지고 겸손히 그분앞에 믿음으로 서십시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38년동안 여러분으로 꼼짝못하게 만들었던 모든 눌림에서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3. 네가 내 말에 순종하겠느냐?는 뜻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은 세 가지 명령으로 돼 있습니다. 일어나라,네 자리를 들어라,걸어가라. 그 명령들은 모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것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절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순종한 결과가 9절에 나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믿음으로 순종할 때 즉시 이적이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베데스다의 병자를 고치신 사건에서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요한의 상징적 비교법입니다. 물로 병을 고치는 베데스다와 참치유의 근원이 되신 예수님의 비교입니다. 38년 된 병자라고 하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의사에게 시달림을 받았을 것이며 생존을 위해 얼마나 많은 구걸을 했을 것인가? 이제 마지막 소망인 베데스다에 먼저 몸을 담가야 하는 이 병자에게 언제든지 와서 믿기만 하면 낫게 하시는 주님에 대해 요한은 절묘하게 비교한 것입니다.

어떻게 일어났을까? 38년 동안 근육한번 쓰지 못했고 신경은 죽었고 아마도 그의 등이나 부분에서 욕창이 났었을 것이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일어날 수 없었던 그 38년 된 병자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뼈가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렸을까. 신경이 갑자기 살아났을까. 어땠을까. 많은 생각을 해보지만 도저히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재활 하는데 가보면요 죽었던 신경이나 죽었던 근육 혹은 쓰지 못하는 근육을 다시 한번 운동시키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5년 동안 10년 동안 그렇게 힘쓰고 힘써서 재활을 해도 완벽하게 복구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38년 동안 한 번도 써보지 않은 근육이 갑자기 일어 나가지고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몸 하나 지탱한 정도가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네 자리를 들로 가라 그랬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자기 몸도 휘청휘청할 수 있을 가운데 자기 자리까지 딱 걸머지고는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순종에는 자기희생이 따른다. 그리고 순종에는 모험이 따른다. 그러나 순종에는 기적이 따라옵니다. 예수님께 즉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한 아이가 잇었습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떠돌이 악사로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어릴 때 이 여자아이는 병약해서 침대에만 누워있거나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아이를 내성적인 괴짜 아이로 보았습니다. 이 아이는 손톱을 물어뜯기 일수 였고 갖가지의 공포증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척추장애로 척추 교정복을 입고 있어서 항상 누군가가 돌봐주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직업에 대해서 아무런 목적이 없는 몽상가였지만 노인이나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누구일까요? 그 여자아이는 뒤에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이 되어서 가난하고 억압받던 사람들의 수고자가 된 엘리노 루즈벨트였습니다.

또 한 아이를 소개합니다. 이 아이는 한국 사람입니다. 서당에서 또 보통 학교에서도 공부로는 전혀 안된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당시 하급관리 시험을 봤는데 두 번씩이나 떨어졌습니다. 관상쟁이를 찾아갔더니 "흉상이요 천한 상이다. 너는 어디에 나설 사람이 못된다. 제발 앞에 나서지 마라" 그날 그 사람은 꾸준히 발전해 나갔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사람 전혀 흉상이라고 몰골이 사납다고 그렇게 얘기했던 사람은 우리 나라 임시정부의 수반까지 올랐던 한국 근대사의 가장 이름이 빛난 김구 선생님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사람들이 전부다 그렇게 가망 없는데서부터 출발해서 세상의 이름을 떨친 사람이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거기는 한 가지 그 사람들의 생애를 바꿔논 역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체험한 놀라운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독교신앙의 은혜가 그 사람들을 변화시켰던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 질문하시고 계십니다. (오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소원합니다. 예,믿습니다. 예,순종하겠읍니다. 하는 결단이 있게 되면 그리스도의 권능이 우리에게 미치게 되어 새로운 삶, 새로운 기적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손길을 경험하여 복된 새로운 삶, 행복한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문 기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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