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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기게 하시는 여호와 (삼하 8: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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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간동안 우리는 승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귀한 것인가를 실감하는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강단 앞에 놓여있는 트로피를 보면서 저것을 얻기까지 얼마나 수고의 땀이 필요했는가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일곱종목의 선수만 백명이 넘는 그런 많은 선수들의 수고가 있었고, 그들을 위해서 후원하고 격려하고 뒷받침 하는 선수들의 보이지 않는 손길들도 무척 컸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룻동안의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을 위해서 수많은 시간과 물질과 사람들이 수고의 땀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그리고 그 때의 감격을 절절히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어느 모임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전혀 감동이 되지를 않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물어보니까 운동회에 오지를 않았어요. 그러니 깜깜 무소식이지요. 전류가 흐르지 않아요. 우리는 지금도 전류가 흐릅니다.

그 감격, 마지막 결승전의 감격은 우리는 잊을 수 없는 감격을 우리는 느끼고 있는데, 참석하지 않은 분들은 전혀 딴세계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이 무감동, 무감각, 그런 상황일 것입니다.

우리 모든 동역자들과 모든 성도들도 올림픽, 혹은 월드컵 경기를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 그렇게 말할 정도로 흥미진진한 경기였고, 단 한 번의 다툼도 없었던 은혜로운 경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이기게 하시는 여호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벌써 일주일 전에 말씀의 제목이 나와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 말씀에 어울리는 결과도 주셨다는 것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의 군사적으로 성공한 이야기가 본문의 중심적인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 군사적으로 성공한 다윗의 이야기, 전쟁에서 성공한 다윗의 이야기, 그러나 오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1절에 ‘이 후에’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블레셋 사람을 항복받고, 모압을 쳐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소바를 쳐서 보병 2만을 사로잡고, 아람을 쳐서 2만2천을 죽이고 조공을 받고, 금방패를 그들이 취하여, 하맛을 쳐서 왕으로 아예 전쟁에 앞서서 그들이 평화의 사절단을 보내어 은그릇, 금그릇, 놋그릇을 바치게 하고, 에돔을 쳐서 1만8천명을 그들이 죽이는 그런 일들을 통해서 다윗은 승리자로, 그리고 금과 은을 얻는 경제적 부유자로, 그리고 주변 어떤 나라도 이스라엘을 넘볼 수 없는 그런 강대국으로 명예를 얻어가는 그런 내용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윗이 주변 국가들과의 전투와 전쟁에서 이겼던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1절 ‘이후에’라고 하는 표현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후에’라고 하는 말, 지금 사무엘하 8장은 지금 다윗을 통한 승리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데, 이런 곳곳에서 다윗이 승리할 수 있었던 내적인 원인이 바로 이 전에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곧 사무엘상, 사무엘하로 이어지는 다윗의 삶 속에서 좀더 구체적으로는 사무엘하 7장과 8장의 사건들을 우리가 기억에 떠올리면서 우리가 왜 다윗이 이길 수 밖에 없었는가를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6장은 다윗이 언약궤를 블레셋 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오려고 하는 시도가 담겨져 있는 내용입니다. 바로 6장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오려는 하는 정성된 노력을 기울이고, 새수레를 만들고, 한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못한 그런 소를 끌게 하고, 그리고 최고의 목수와 재목을 동원하여 그들은 새수레에 법궤를 실고,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다가 아곤의 타작마당에서 소가 뛸 때에 웃사가 법궤를 뒤에서 모시고 간수하고 오다가 떨어지려고 하는 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 죄가 되어서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웃사가 죽었지만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 다윗왕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가려고 하는 일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법궤는 오벧에돔이라고 하는 집에 석달 동안 있는 그 동안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그 집과 자녀들과 가정의 복을 주셨다는 소문이 예루살렘까지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어려움을 겪는 경우들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주님의 일 하다가 상처받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주님의 일을 하다가 상처 받는 일 정상이다. 주님의 일 하다가 손해 보는 일 정상이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 옆사람과 인사 한 번 할까요? 주님의 일 하다가 손해 보는 것 정상입니다.

가끔씩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듣지요. ‘목사님, 저는 절대로 주님의 일 안합니다. 속장 안 하구요, 강사 안 하구요, 선교회장 안 하구요, 임원 안 하구요, 뭐 안 합니다.’ ‘왜요?’ ‘제가 그 일 하다가 상처 받았는지 몰라요.’ ‘그게 정상입니다.’

주님의 일 하다가 손해 보는 것 그게 정상입니다. 손해 보려고 주님의 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의 일 하면서 물질적으로 교회를 통해서 이득을 얻으려고 일 하셨어요? 주님의 일 하려면 주머니에서 생각지 않은 돈들이 많이 나가지요? 그게 정상 아닙니까? 우리가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면 손해 보려고 주님의 일 하려는 거예요.

무슨 소리야 지금? 내가 예수 믿어서 복 받고, 예수 믿어서 잘 되려고 왔는데, 평안의교회는 예수 믿어서 손해 본다니 이거 내가 잘 못 온 거 아니야? 이러고 지금 혼란스러운 분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주님을 믿는 일은 손해 보는 일을 기꺼이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뭐라 그럽니까? 우리가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나이다. 잘못된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무언가를 얻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정상적인 믿음을 가진 자, 오히려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압니다.

주님을 위해서 가난을 선택하고, 주님을 위해서 낮은 자리를 선택하고, 주님을 위해서 손해 보는 것을 기뻐하고, 나누는 게 뭐예요? 나누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손해본다는 것입니다. 떡 두개가 내 정량인데, 그 정량 떡 두개를 눈 딱 감고, 하나를 떼어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 그거 손해 보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그 정량을 떼어 주는 것, 그게 섬김이요, 그게 나눔인 줄 믿습니다. 그 떡 세 덩이 있어서 내 정량 먹고 하나 남은 거 주는 것 그것은 나눔이 아니예요. 그것은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그것은 쓰레기 처리 하는 거예요. 그것은 나눔이 아닙니다.

나눔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손해보는 거예요. 그것을 기꺼이 손해 보는 거지요. 그것을 기뻐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이다. 손해보면서 기뻐하고, 손해보면서 즐거워하고, 또 손해 보려고 달려들고요.

오늘 우리는 오벧에돔의 집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기억하면서 다윗이 또 섬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법궤를 성전으로, 다시금 성소로 모시고 오면서 이번에는 잘 못된 전철을 밟지 않고, 이제는 제사장의 어깨에 메고 그리고 찬양대와 악기를 가진 자들이 앞장 서서 온 예루살렘의 성도들과 뽑힌 자 3만의 군대를 동원해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셨습니다.

7장에 가서는 성전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백향목으로 지어준 궁전에 거하다 보니까 나만 좋은 곳에 살고, 우리 주님의 집은 아직도 천막이고, 주님의 법궤는 아직도 천막 속에 있으니 내 마음이 평안치 않구나. 그래서 나단 선지자를 불러서 자기의 뜻을 이야기 했어요. 하나님의 성전도 백향목으로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만 좋은 집에 사니까 영 마음이 불편해요.

어떤 성도들은 주님의 성전을 봉헌하기 전에는 내 집을 가지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약속하고 헌신하는 성도들도 있었어요. 나단 선지자가 그 다윗왕의 이야기를 듣고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왕의 마음이 얼마나 귀한지 그렇게 하시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 밤에 나단 선지자를 책망하셨어요. 그리고 당장 다윗왕에게 달려가서 이 말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너의 그 마음 참 고맙지만, 내가 언제 백향목으로 집 지어 달라고 부탁한 적 있니? 지금 너의 입장에서 이스라엘 왕의 입장에서 집중적으로 해야 할 사역은 집을 짓는 일이 아니야. 그들의 신앙의 내면을 견고하게 하는 일이 급선무야.

나를 위하여 집을 짓는 일은 너의 아들 솔로몬 시대에 해도 그것은 늦지 않아.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왕에게 이스라엘의 신앙의 견고함을 든든히 세우도록 요청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가진 다윗에게 왕조를 새롭게 출발할 것이라고 하는, 그 왕조가 계속 번성할 것이라고 하는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보좌와 후손을 약속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좌 없는 후손, 후손 없는 보좌, 이 모두가 왕조가 유지될 수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의 선한 마음을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짓겠다고 하는 그런 소박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다윗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가정과 그의 나라를 축복하시고 그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신 이 후에 오늘 8장의 말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늘 6절과 11절, 14절 하나님께서는 후렴귀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누구를 만나든지, 11절에 보면 다윗왕이 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는지 우리의 삶의 특징이 거기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윗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나라에서 얻은 금, 은, 모압과 아람과 암몬과 블레셋과 아말렉과 소바와 13절 에돔까지 그 주변 모든 나라에서 은과 금과 모든 명예와 모든 권세까지도 11절에서부터 계속 되어지는 중요한 동사가 하나 나옵니다. 그것은 ‘드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먼저 드릴 수 있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은, 금이 생겨도, 명예가 생겨도, 권세가 생겨도 먼저 다윗은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지요.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이기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고백을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공은 우연한 것이다. 승리라고 하는 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옆사람과 인사하십시다. 성공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승리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월요일 우리는 부천남지방 감리사기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종합준우승을 했어요. 축구가 우승을 했고, 줄넘기가 우승을 했고, 족구가 준우승을 했고, 스키타기가 준우승을 했습니다. 릴레이에 남자가 준우승을 했고, 여자가 3위를 했고, 그리고 피구와 배구는 애석하게도 탈락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보면 체육대회에 대한 사진과 글들이 쭉 있는데, 보통 7- 8개 종목들의 글들이 올라가 있는데, 보통 100명이상의 성도들이 클릭을 해서 약 1000명 이상의 성도들이 이번 체육대회 홈페이지 게시판을 들나들면서 그들의 의견을 쓰고 마음을 전했습니다.

보니까 피구선수들의 사진란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위로의 말과 위로의 사이트에 방문을 했습니다. 피구는 외형적으로는 트로피는 없지만 진정한 우승은 피구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해 우리는 많은 경기를 통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만, 우리가 올해에 하나님께서 더욱더 은혜를 주시고,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교회가 하나가 되는 큰 기쁨을 얻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올해는 축구가 모든 사람들 보기에 가장 즐겁고 재미있는 경기가 되어서 좀 과장된 표현인 줄 모르지만, ‘목사님, 월드컵보다 더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과장되기는 했지만 듣기는 나쁘지 않더라구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 경기마다 담임목사가 의무적으로 뛰도록 되어 있었어요. 이번에 이 규정이 여러번 왔다갔다 해서 안타까움이 있었어요. 만약에 결승전까지 가면 4경기를 뛰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 그래서 우리 임원에게 부탁을 해서 후반전은 우리 부목사님이 뛸 수 있도록 그렇게 규칙을 바꾸면 좋겠다. 그래서 토요일날은 그렇게 통보를 받았어요. 그래서 나목사님에게 유니폼과 후반전에 뛸 준비를 하라고 그렇게 당부까지 해 놓았습니다.

막상 당일날 아침에 가 보니까 또 바뀌었대요, 담임목사가 끝까지 뛰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래요. 어떤 분은 속도 모르고 우리 목사님 욕심이 많아서 끝까지 혼자 뛴다고 그러는 분들도 있어요. 모르면 오해가 되는 거예요. 모르면 이상한 소리 하는 것입니다.

첫경기에 제가 왼쪽 인대를 다쳤습니다. 제가 박지성 흉내를 내다가 거의 100% 똑같이 흉내를 냈는데, 마지막 슛팅에서 공이 빗맞으면서 오른쪽 인대가 늘어났어요. 너무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그래도 첫 경기는 그럭저럭 마쳤는데, 두 번째 준결승은 너무 아파서 걸을 수가 없었어요. 다리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어요.

붕대를 감고 임시치료를 하면서 준결승은 뛰어다니면서 제가 울고 싶은 마음 뿐이었어요.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견디기가 어려웠어요. 어떻게 경기가 지나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를 않아요. 그리고 세 번째 결승전 때는 제가 무릎에 손을 얹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통증만 느끼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결승전 때는 제가 잘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가 잘 뛰어 다녔어요. 열심히 뛰어다녔어요. 보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 할 만큼, 그 다음에 후반전에 오른쪽 다리가 쥐가 나가지고 한 5분 동안 나와서 응급처치를 받고 또 들어가서 뛰었어요.

그런 정신을 보면서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은 저 양반이 좋으니까 저러겠지. 생각하겠지만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가슴 졸이고 안타까워 했는지 몰라요. 제가 우스개 소리로 그랬지요. 이순신 장군이 한 말을 기억하면서 ‘나의 부상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체육대회는 시작부터 끝까지 감동 그 자체 였어요. 종목 하나 하나에 얼마나 우리의 감동과 성도의 사랑과 애정이 담겨 있는지 모릅니다. 참가 안 하는 분들은 어떻게 알아요? 왜 안 오는 것입니까?

그 날 주일 날 안 올 사람 손 들라니까 하나도 안 들드만. 그래도 그 날 체육대회 때 우리 평안의교회가 가장 참석을 했구요. 가장 열정적으로 응원했습니다. 우리가 승리한다고 하는 것은 거저 되는 법이 없습니다. 희생이 없이는 수고의 땀이 없이는, 아픔을 겪지 않고는 우리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사업하시는 분들, 망하려고 사업하시는 분 계십니까? 개업예배 거창하게 드립니다. 개업예배 드리면서 나는 1년 만에 망해야지. 그러면서 개업예배 드리는 분 계십니까? 성공하려고 하시지요.

공부하는 학생들이 망하려고 실패하려고 공부하는 사람들 있습니까? 학업에 성공하려고 우리 목회자들도 목회에 성공하려고 최선을 다해서 합니다. 대강대강 하는 것 저는 용납하고 싶지 않아요. 모든 삶의 우리의 영역은 모든 삶의 부분은 성공하기를 원하고, 이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우연한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저는 오늘 이 다윗의 승리, 그는 어디를 가든지, 어느 나라를 만나든지 그는 성공했습니다. 승리했습니다. 야 다윗이 재수가 좋았나? 그 당시에 시기가 그렇게 우연히 되는 시기였나? 그 해답은 1절에 있습니다. ‘이 후에...’ 다윗의 그런 신앙중심적인 삶,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공경하고, 하나님만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았던 그런 삶의 태도가 준비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8장의 말씀은 결과적인 것만 나와 있는 거예요. 아람을 만나든지, 모압을 만나든지, 암몬을 만나든지, 블레셋을 만나든지, 아말렉을 만나든지, 소바를 만나든지, 에돔을 만나든지, 그 나라가 어떤 나라냐, 어떤 대상이냐, 크냐, 작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윗만 만나면 그들은 맥을 출 수가 없었어요. 왜?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다보면 이기게 하고, 승리하게 하면 이런 생각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기게 하시고, 그의 나라가 컸기 때문에 남북이 통일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긴 것이지, 그러나 우리가 아는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기 이전에 유다광야를 전전하면서 억울한 누명으로 피난살이를 하고 견디기 어려운 위협 속에서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바라는 임마누엘의 신앙에서 부족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감사가 넉넉함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감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한 글을 여러분들에 소개하면서 저는 이렇게 제목을 달았습니다.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인터넷에서 제가 참고한 글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늘 밝고, 늘 웃고, 항상 감사하는 찡그리는 법이 없는 친구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 친구 집에 가 보게 되었는데 청소가 안 되었노라고 굳이 다음에 오라고 하는 친구의 권유를 뿌리치고, 웬지 난 그 날 그 친구집에 가고 싶었다. 친구에게는 예쁜 딸이 셋이 있었는데, 맛있는 것도 사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사는 집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허름한 집이었다. 열 평도 안 되는 초가집에 달랑 방 한 칸, 벽은 여기저기 허물어져 흙이 밟혔다. 아이들 책상은 하나도 없고, 장롱에는 문짝이 없어 이불이 곧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난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친구는 늘 밝고, 웃었고, 행복해 보였다. 친구의 남편은 늘 이른 새벽에 나가 공사현장에서 밤늦게 돌아오는데, 이전에 진 빚이 있어서 남편이 벌어온 돈은 생활비로 쓰기가 어렵다고 했다.

어느 날 친구는 자기가 일하는 곳에서 월급을 받았는데, 아이들이 거의 1년동안 고기를 못 먹었다며 택시를 타고 월급 30만원을 농협에서 찾아 닭갈비를 먹으러 갔다. 날아갈 듯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며 오늘만큼은 엄마는 아이들 먹고 싶은 만큼 먹이리라고 다짐하며 들뜬 기분으로 아이들과 함께 닭갈비집으로 갔다.

그런데 너무 들뜬 나머지 30만원이 든 지갑을 택시에 그대로 두고 내려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하려다가 그제야 지갑을 두고 내린 것을 알게 되었다. 주문을 하다가 중단하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엄마도 아이들도 함께 울었다.

집에 들어와 늘 먹던 라면으로 저녁을 대신했는데, 막내딸은 그날 먹지 못한 닭갈비 때문에 엉엉 울다가 잠이 들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나도 울었다. 집에 오자 마자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당장 닭갈비 먹으러 가자고 남편의 차로 그 친구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닭갈비집에 가서 그 먹고 싶었던 닭갈비를 실컷 먹였다. 난 닭갈비를 그렇게 맛있게 행복하게 먹는 것을 처음 보았다.

언젠가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자기 아이들이 입던 작은 옷을 누군가에게 보내야 하겠다고 옷을 챙기자 막내딸이 이렇게 말했단다. ‘엄마, 우리도 나누어 줄 것이 있다니 행복해요.’

지금 이 가정 10평도 안 되는 초라한 가정, 아이들 책상 하나 없고, 장롱에 문짝이 없어서 이불이 막 쏟아질 것 같은, 여러분 머리 속에 막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가정은 감사라고 하는 단어가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고, 행복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불편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가정이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감사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습니까? 가정에서 행복이라는 단어가 불편하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어렵다고 느껴지고 안쓰러운 가정이지만 자기들이 입던 옷은 자기들이 입던 옷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면서 또 다른 행복을 느끼는 가정, 행복은 나눔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기게 하셨는데, 11절에 보면 다윗은 곳곳에서 은과 금이라는 물질적인 것, 나라를 얻으면서 왕으로써의 명예와 권세를 제일 먼저 누구와 나누었느냐 하면 하나님과 나누었어요.

여러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은 쉐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 왔으니 먼저 하나님과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갔다가 처음 봉급 받았을 때 그 봉급을 가지고 어머니 선물을 사고, 어머니에게 그 봉투를 드리면서 ‘이거 어머니거예요.’ ‘이거 니가 탄거 아니냐?’ ‘어머니 아버지로 인해서 제가 첫 번째 봉급을 탔습니다.’ 옛날 같으면 빨간 내복을 사다드리면서 ‘이거 어머니 거예요. 어머니와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드리는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그것을 하면서 아직도 인색한 마음이 들고 아직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 나누는 행복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하나님과 나누고 싶어요. 부모님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부모님과 나누고 싶어요. 이것이 진정한 감사와 행복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런 다윗을 바라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윗을 축복하지 않을 수 없어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이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결과입니다. 왜? 그 분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어요. 그 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면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는 사로잡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자녀된 우리로써 천지를 지으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는 감동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늘 이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만 그것이 이겨지기 위해서 이기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가 사실은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은 1절 ‘이 후에’라고 하는 단어가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6장에서, 7장에서 이미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기게 하지 아니하시면,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견딜 수 없도록 다윗은 만들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 그 분이 함께 하시도록 우리의 삶이 부족함이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기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감화감동시키는 성도의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우리의 삶 속에서 이김이 있을 때마다 이기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이기게 하도록, 이길 수 밖에 없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는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됨을 감사를 드립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다윗의 신앙,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우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든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입니다.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을 감화감동시키는, 그러므로 당신의 자녀들이 이 땅에 살면서 주의 이름으로 승리하며, 주의 이름으로 성공하며, 주의 이름으로 이기게 하시는 그 주님을 바라보며, 그 이기는 주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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