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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업자 (벧전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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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가장 실존적인 경험은 염려이다. 염려는 언제나 원치않는 동반자로 함께 있다. 그리고 이 염려가 가장 큰 스트레스로 우리를 짓누른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정열의 불을 끄고 장기에 상처를 준다. 염려는 고통하는 영혼의 소리로 모든 죄인들을 압도한다. 신자라도 이 무서운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사람은 없다. 이 지겨운 동반자는 어떻게 임하는가?

사람들은 종종 마음 먹은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않되는 일을 마음 먹었기 때문에 일이 않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심리학에서 연구한 바는 마음은 스스로 예언을 하고 그것을 이루어 간다는 것이다. 실패를 예상하고 실패로 향해서 나아간다. 누구나 실패할 사람은 이미 마음 속에 실패를 생각하고 그것에 관해 말하고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영혼이 죽음을 맛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한 인간에게 복종을 요구하였다. 복종하지 않을 때 반드시 죽으리라고 덧붙였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에 길에 들어섰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영혼은 하나님과 단절되고 무서운 결핍과 형벌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는 장차 올 영원한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것이 바로 불신앙의 상태이다.

불신앙은 마음의 염려로 표현된다. 이것이 심하면 안달이나 불안 초조로 나타난다. 신경쇠약, 두려움이 일어난다. 그리고 병의 대부분이 바로 여기서 나타난다.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평안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것이 누려지지 않는다면 어찌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마음은 아직도 옛 사람에 의해서 지배되기에 하나님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낙심하거나 근심할 때 또는 우울할 때 면역체계가 무너진다고 한다. 그래서 너무도 쉽게 병에 걸리게 된다. 생각해 보라. 두통, 소화불량, 감기 또는 장기의 기능저하는 여기에서부터 오지 않았던지. 아내를 사별한 남편이 얼마 후에 또 병으로 죽는 경우도 그것이다. 귀신이 데려 갔는지 모르지만 의학적으로 보아도 면역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냉동실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얼마 뒤에 그는 문이 닫힌 것을 알았다. 문은 안에서 열 수 없었다. 소리를 질렀으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퇴근한 뒤였다. 거기서 그는 두려웠다. 그리고 너무 너무 추웠다. 그는 죽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자기는 여기서 얼어 죽는다고. 다음 날 다른 사람들이 그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시체로 변해있었다.

사람들은 놀랐다. 왜냐하면 그 냉동실은 여러 달 동안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전기를 꽂지 않아서 밖의 온도와 별 차이가 없는 곳이었따. 무엇이 이 사람을 죽게 했던가? 바로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은 그에게 엄청난 추위를 느끼게 하였고 실제로 육체의 모든 기관을 정지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두려움은 면역체계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능력을 중지시킨다.

성경에 보면 전쟁할 때 군사들의 심리상태를 말한다. 그것이 바로 사기이다. 아무리 이쪽 군사의 수가 많아도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되면 반드시 지게 마련이다. 아무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언제나 명령하시는 말이 있다.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라. 마음을 담대히 하라. 마음을 강하게 먹으라." 그래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일들을 말해주셨다. 우리가 새로운 존재라고 선언하신다. 새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찬양받는 존재들, 천재, 역사, 귀족과 제왕들보다 나은 존재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거기 맞는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면 새 삶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과 행동을 연습시키기 위해서 교회에 모이라고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옛 사고와 옛 행동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늘 두려워하고 늘 걱정한다. 그럴수록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사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잠재되어 버린다. 이런 상태가 오래 계속되면 무능하고 부정적인 신자로 굳어져 버린다. 이것이 신자의 죄악이다. 하나님이 베풀어준 구원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를 한다. 자신에게 말하는 그 내용을 들어보면 어떤 사람인지가 나타난다. 하나님이 새롭게 만들어준 사람이라도 옛사람의 악한 사고가 지배하는 것이다. "기회만 나타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돈을 벌자." "자 바쁘고 피곤하니 오늘은 교회에 나가지 말자." "울적하니 술이나 한 잔하자." 이 말들이 자신을 명백히 표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말들이 곧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나간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시간 마음 속으로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한다. 자신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별로 안 좋아해." "나는 의지가 약한 편이야." "나는 성공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무능해." "무슨 새로운 일을 하기엔 너무 늙었어." "나는 이성에게 매력이 없어." "난 좋지 않은 신자야." 둥둥

이러한 자신이 없어서 하는 말들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스스로로 만들어간다. "난 의지가 약해"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노력하기를 처음부터 낮은 목표를 세우고 결국 노력을 포기한다. 또한 "사람들이 난 별로 좋아하지 않아"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기 맞게 행동한다. 그래서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동을 한다. "돈이 않따라.""몸이 약해.""매력이 없어" 다 마찬가지이다.

만약 부모가 자식에게 "넌 나가서 깡통이나 찰거다. 무능한 놈"하고 되풀이 말한다고 치자. 그러면 자식은 자기가 들은 것을 믿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무능하다는 결론을 증거들을 수집해서는 늘 그 생각에 잡힌다. 그는 실패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못났다" 또는 "멍청하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못난 짓과 멍청한 짓을 계속해서 해 댈 수 밖에 없는게 인간이다.

그렇듯 마음이 부정적인 사고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인간은 절대로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누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그 누가 마음 속 깊은데서 올라오는 염려를 물리칠 힘이 있는가? 이 문제는 오로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해결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만드셨다. 신자들은 자신이 새로운 사람임을 깨달아야 한다. 어떻게 새로운 사람이 되었는가? 돕는 이가 항상 같이 하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것을 제공한다. 의가 없는 사람에게는 의를, 지혜가 필요한 사람에겐 지혜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신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신자더러 "나는 마른 막대기가 아니다"라고 하라고.

그러므로 신자는 이러한 지식에서 마음으로 하여금 생각을 조정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단 신자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 맞추어서 생각해야 한다. 그의 말씀을 내 생각으로 삼는 것이다. 즉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골 3:10)가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안다면 신자는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새롭게 하느냐고 묻지 말라. 이미 새롭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항상 새 마음을 더욱 새롭게 하라는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멸하도록 하라."(롬 12:1) 자기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좋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미국의 어떤 여자 분이 과부가 되었다. 이미 여섯 아이가 있었는데도 열 두 고아를 입양해서는 모두다 대학까지 졸업시키고 훌륭하게 키운다. 그녀가 올해의 인물에 뽑힌 뒤에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 힘든 삶을 살았음에도 그녀의 모습은 매력적이고 힘이 있어 보였다. 기자들은 모두다 그 비결에 최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말한다. "제게는 동업자가 한 분 계십니다." "아니 동업자라니요." 그러면 그렇지 어떻게 자기 혼자의 힘으로 그렇게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었겠는가?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하루는 너무 힘이 들어서 주와 약속을 했습니다. '주여 나는 꿈꾸고 일하는 부분을 맡겠습니다. 당신은 걱정을 맡으십시오.' 그로부터 나는 더 이상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꿈꾸고 일하며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동업관계였다. 이것이 신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신자는 꿈꾸고 일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길 권리가 있다. 주는 확실한 동업자로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절대로 혼동해서는 않된다. 그렇다면 신자는 자신이 할 일에 대해서 모든 마음을 집중시켜야만 한다.

기도할 때는 종이에 왼쪽과 오른쪽을 가르는 선을 그어라. 그리고 왼쪽에는 동업자의 할 일을, 오른 쪽에는 내가 할 일을 적는다. 나는 내 맡은 일을 한다. 그리고 동업자는 동업자의 일을 한다. 모든 힘들어 보이고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일은 동업자의 난에다 쓰라. 나의 난에는 내가 할 일 곧 믿고 감사하고 사랑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내용을 쓰라. 그리고 기도하라.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꿈꾸는 것이다. 요엘 2:28절의 약속. 성령 곧 동업자를 받은 이들에게는 반드시 꿈이 있다. 그것을 찾아내라. 그것은 동업자가 선물로 주는 것이다. 그 꿈을 향해서 일어서 나가라. 잠시도 좌절하지 말고 우울해 하지도 말라. 부지런히 꿈을 향해서 움직이라. 자기의 할일을 묵묵히 최선을 다해서 하라. 그러면 나머지 일들은 동업자가 해 주신다.

절대로 걱정하지 말라. 절대로 두려워 말라. 그것은 동업자의 몫이다. 그것은 우리 전공이 아니다. 걱정을 통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단지 우리의 마음을 죄로 물들일뿐이다. 어둡게 하고 망하게 할뿐이다. 그는 이미 우리를 위해서 슬픔을 당하고 고통을 당했다. 그는 우리의 염려를 당했고 지금도 그것을 짊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할 입장이 못된다.

우리가 할 일이 너무도 많다. 그저 한 발자욱씩 나아가자. 한 영혼 인도하기를 생각해 보라. 그들이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영향을 못미칠 것이다. 이런 염려는 주께 맡기라. 그저 기도하고 그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꿈을 꾸라. 그리고 그들에게 나아가서 말하라. "나와 함께 교회에 갑시다. 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읍시다." 하나님은 그들을 움직일 것이다.

각자 자기의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엄청난 것이요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의 일도 있고 인간의 일도 있다. 꿈꾸라.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라."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것은 내 몫이다. 너는 네 할 일이나 해라."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 저가 너를 돌보시기 때문이다." 염려는 죄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것을 담당하셨다.
(김기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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