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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받은 사람의 삶 (요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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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쓸 데 없는 짓” 그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해 놓고 보면 쓸데없는 짓 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기준하여 쓸데 있는 일과 쓸데없는 일을 규정 할 수 있습니까?
소위 바람피우는 것. 그런데 내가 하면 로맨스요 사랑인데,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합니다. 내 중심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면 선하고 남이하면 악한 겁니다.
도대체 뭐가 쓸데 있는 짓이며 뭐가 쓸데없는 짓일까?
어떻게 보면 생각하면 모든 게 다 쓸데없습니다.
아이들. 죽는 등 마는 등 하면서 공부시켜 놓으면 자기 혼자 그렇게 큰 것 같이 부모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 키워보아야 다 쓸데없는 짓이다.”
지금 40대이상, 죽어라하고 직장 다니고 사업 키워봐야 언제 그거 다 쓰고 죽겠어요? 다 자식들 몫이지. 그래서 “죽어라 하고 살아봐야, 그래서 돈 모아 봐야 다 쓸데없는 짓이다.”
악한 사람들이 더 잘사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착하고 선하게 살아봐야 다 쓸데없는 짓이다.”
그러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여러분 애쓰고 발버둥치며 살고 있지요? 그러나 내일이라도 주님 오시면 그거 다 쓸데없는 거 아닙니까?
어느 부자, 열심히 일 했을 거 같아요. 그러니 다른 해 보다 더 엄청난 수확을 거두어들여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곳간이 작아서 더 지었잖아요.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데려가시면 그 모든 것이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러니 그가 애쓰고 수고한거 “다 쓸데없는 짓” 한 거 아닙니까?
이 시간, 여기 나와 앉아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이 예배는 귀중한 자리요 은혜 받는 자리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쓸데없는 짓 하는 자리일겁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평생 살아도 해 놓은 거 없어요. “다 쓸데없는 짓인데 뭘 하겠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왕에 사는 것, 쓸데 있다고 생각하고 사십시오.
기왕에 하는 것, 다 필요하기에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여기서 저기로 돌멩이 하나 옮기는 것도, 남들은 쓸데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여러분에게 그 일은 귀중한 일이요, 쓸데 있는 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퇴보하는 사람들 모든 것을 다 쓸데없는 일로 여깁니다.
아침에 뭐 하러 청소 하겠어요. 오후면 또 더러워질 텐데……. 그러니 그 집은 항상 더러운 겁니다.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사과나무는 심어서 뭐 하겠어요. 내가 그 사과나무 열매를 따 먹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 사과나무를 심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목적이 있는 사람,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내 평생에 내가 그 사과를 따먹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못 따 먹어도 내 후손이 따먹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쓸데없는 짓이 아니라 쓸데 있는 짓입니다.
무슨 일이든 신중히 생각 그리고 이거다 싶으면 전력투구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다가오는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체 베다니 마을을 찾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6:6에 보면, 예수님께서 머무신 집은 “베다니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입니다. 그렇다고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생긴 일이냐를 따질건 없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열린 것인데, 오늘 본문은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기뻐하며 예수님께 감사하는 잔치였을 거라고 추축이 됩니다.
거기서 죽었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살아난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았고, 마르다는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잔치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손에는 매우 아름다운 옥합의 들려져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마리아는 얼굴은 약간 상기 되어 불그스레했고, 그 발걸음은 떨리는 듯 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나아와 비스듬히 누워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 옥합을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곤 자기의 머리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향유의 냄새가 그 집에 가득히 퍼져나갔습니다.
나드 향유. 이것은 유대 땅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히말라야 산 일대에서 나는 감송 향으로 만든 향유로서, 약 300데나리온이라 나가는 값 비싼 향유입니다. 그야말로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전 제산인 것입니다.
그러자 거기 있는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저도 이 성경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었습니다. “저런, 저런, 쓸데없는 짓을 하다니” 가격은 얼마나 하는지 모르지만 그건 정말 쓸데없는 짓 하는 것입니다.
나도 깜짝 놀랐는데, 그것이 300데나리온이라 하는 값비싼 것일 줄 아는 가룟 유다는 아마도 까무러칠 만 했을 것입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해 보면, 1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 300데나리온이면 1년 치 삯입니다. 1년 내내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고, 그야말로 죽을 둥 말 둥 해서 모아둔 것입니다. 그것 가지면 시집 밑천도 할 수 있고, 차도 괜찮은 거 뽑을 수도 있고, 멋지게 여행할 수도 있고, 철에 맞는 옷도 해 입을 수 있고…….
그런데 그걸 그냥 쏟아 부은 겁니다.
통째로 예수님께 드린 것 아닙니다. 차라리 예수님께 그냥 통째로 드렸다면, 그래도 앞으로 어떻게든 유용하게 쓸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냥 발에다 부었습니다.
누가복음 7:44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집에 들어오실 때, 집 주인인 시몬이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발은 먼지투성이의 발이였을 것입니다.  거기다 누가복음 7:38에 보면, 그 여인은 눈물도 흘렸습니다. 향유는 순도가 그 가치를 결정하는 건데, 이젠 다시 주워 담아도 먼지와 눈물로 범벅이 되어서 그 가치가 없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미쳐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여인이 머리를 풀어 그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있었으니…….
로또 복권. 이번에는 일등이 4명인가 나와서 19억씩 가져갔다고 합니다. 그런 기사를 보면 왠지 배가 아픕니다. 마치 나한테 올 것이 꼭 그 사람한테 간 거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고, 19억. 아깝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실 복권은 사지도 않았으면서 말입니다. 내 것도 아닌 것을 남이 가져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아까운데, 그것이 내 손에 들어 올 수 있었고, 또 내 손에 들어 왔던 거라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마가복음 14:4-5, 그것을 본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면서 서로 말합니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줄 수 있었겠다.” 그러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습니다.
화가 나지요. 나도 화가 나는데……. 여자를 야단칠 만 하지요. 내 것은 아니지만, 그 비싼 향유를 그렇게 할 수는 없잖아요? 나부터라도 그 여인보고 야단 칠 거 같아요.
또 평소에 예수님이 뭐라 하셨어요? 가난한 자 돌보라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그렇게 허비해서는 안 되지요. 팔아서 가난한 사람 나누어 주어야지요. 세상에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은, 진정한 세상은 그렇게 계산하고 따지는 것으로 유지 되는 것 아닙니다.
물건 값도 그래요. 물건 값 깎는 여러분 여러분의 손으로 만들어 보세요. 쉬운가?
그림 그려주면 “이거 얼마 들었어요?” 하고 묻습니다. 사실, 들어간 비용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더 더욱이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계산하고 따지는 것으로 유지되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물론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곧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무슨 일 했을 때 잘 했니 못 했니 하는 것은 곧 내 중심에서 비판하는 것입니다. 남의 상황이나 입장은 전혀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또 내가 무엇을 할 때 이렇게 저렇게 따지는 것도 내 중심에서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내 상황, 내 입장만 내 세웁니다.
여러분이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따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비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미워서 싫어”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서 미운 것을 찾아내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미워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봉사. “난 시간이 없어서” “난 돈이 없어서” 그래서 못 하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애, 나도 시간이 없단다. 애, 나도 너를 구원할 힘이 없단다.” 그러신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에 “나중에 하겠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까지도 “너의 구원은 나중에 보자.” 그러신다는 겁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따지는 관계 아니잖아요. 계산하는 관계도 아니잖아요. 서로 사랑하고 그렇게 사랑하기에 희생하고 헌신하는 관계잖아요.
보세요. 배고픔 속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 있어요. 보상이 없어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 있어요.
우리가 친구나 사람을 만날 때, 가룟 유다와 같이 얼마짜린데 하고 따지면 만날 수 있어요?
지금 우리 사회가 문제는, 그걸 따지는데 있는 겁니다. 정치, 경제, 심지어 결혼까지도 따집니다.
더욱이 우리의 결정이 의로울 겁니까? 내 결정이 정답이에요?  어느 모임이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 있습니다. 만에 하나 자기주장에 통과 되지 않으면 이 사람은 무시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화를 내고 삐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주장이 의로운 겁니까? 이 사람의 주장이 정답이에요?
사람들 그 여인보고, “너 낭비했다. 잘못했다.” 가룟 유다 역시, “이건 잘못되었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한 건데…….” 그럽니다.
그러나 본문 6절,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시게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 자루를 맡아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든 것을 훔쳐 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뭡니까? 가난한 사람을 위해 한 말이 아니고, 자기 욕심에서 한 말이라는 겁니다. 겉으로는 가난한 사람을 걱정하는 채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것 삼으려고 했던 겁니다.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 있어요. 형편이 어려운 사람 생각하는 척 해요.
죄송한 말이지만 이런 예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이번에 교회 건축 합니다. 성도들 모두 1억씩 헌금 하십시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 있다. “목사님, 너무 액수가 큽니다. 그렇게 하면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시험들 수 있습니다.” 물론 시험들 수 있어요. 그래서 난 그렇게 안 하잖아요? 그러나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정말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겁니다. 보세요. 자기가 싫으니 다른 사람 들먹이는 겁니다.
그렇게 가난한 사람 생각하는 사람이 결국 자기 스승을 은 30에 팔아먹어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은 어려워서 못하는 사람의 몫까지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폴 틸리히는 “사랑은 거룩한 낭비다.” 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주고서도 더 주기를 원하며, 얼마나 주었는지 계산하지 않으며, 준 것을 아까워하거나 후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계산하기 시작하면 사랑이 식어진 것입니다.
그랬어요. 집 주인 시몬은 예수님이 들어오실 때 발 씻을 물도 드리지 않았어요. 이런 유대인들이라면 당연히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안 했어요. 나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어요. 그러나 제자들 중 누구하나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누가 했어요? 바로 이 여인이 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이 여인이 한 행동을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마리아는 예수님이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미리 알고 기름을 부은 것은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 했을 뿐인데, 주님의 장례를 예비하는 놀라운 은총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지만, 그 사랑의 열매는 언제나 엄청 납니다.
내가 무엇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노력과 수고는 그 계산으로 세워진 무엇을 얻을 수도 있지만, 얻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하는 사랑, 그래서 희생하기까지 하는 사랑은 아무런 계산, 아무런 목적이 없지만 놀랍게도 아름답고 굉장한 열매를 얻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이것이 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되게 하겠다.” 그래서 가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 그것은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 성공은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눈으로 보았을 때, 그 아이가 가진 재능을 보았고 그래서 그 아이의 재능을 개발시켜 줄 때 성공합니다. 그런 것 없이 무조건 부모의 목적을 세우고 그 아이를 키운다면 십중팔구는 실패합니다.
“교회 일, 열심히 해 보아야 다 쓸데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동기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 욕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께 천원 드리면 백 배, 곧 10만원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최소한 몇 천원이라도 받을 거라는 계산으로 일한 사람입니다.
그냥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면 반드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입으로 고백하듯, 죽어야 할 사람들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당신의 생명을 죽음으로 던져 넣어 죽음에 있는 우리의 생명을 건져 주셨습니다.
그것을 아는 마리아는 자기 생명을 드리고 싶었는데, 생명을 드릴 수 없으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들을 사랑 하십시오.
이건 은혜 받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걸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그냥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보세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예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인류를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신 예수. 그냥 그것으로 끝입니까? 예수 십자가 죽으심으로 끝입니까?
빌립보서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무릎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어떻게 되셨어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무릎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심은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
그 말씀은, 심기어져야만 거둘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심기만 하면, 심기어지기만 하면 반드시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식 투자. 때로 까먹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드려진 것은 반드시 풍성한 열매 맺고 더 큰 은혜와 복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일하게 하실 때는 더 큰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헌신하게 하실 때는 더 큰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받은 자는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 더 큰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사랑 받았음에도 사랑하지 못하면 그 받은 은혜조차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들과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이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합니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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