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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너질 세상 신상의 광채 (단 2: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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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2:31)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단 2:32)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단 2:33)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단 2:34)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단 2:35)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1. 그리스도인은 세상 주권자의 눈높이에 맞추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전 1:25에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것들을 소홀히 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 열심을 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로 경쟁하며 살기에 지쳤습니다. 고전 1:26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하며 세상 속의 우리의 모습을 말합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기에는 세상적인 능력이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전 1:27에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영원한 약속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에게 나타나며 이루어지고 있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로 부족한 우리를 세워 이기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믿음의 삶 가운데 큰 실패의 함정이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깨닫지 못합니다. 그 함정은 우리가 정복하고 변혁시켜야 할 세상을 점점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세상을 대할 때 그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눈높이대로만 대하는 장벽을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의 능력만 힘입어야 하는 우리의 삶은 바른 삶이지만, 그것이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장벽이 된다면 성도의 삶은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중 한 가지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는 육체적으로 세상을 압도할 수 있는 위치에 서는 것입니다. 지식이나 기술이나 능력면에서, 그리고 신분이나 직책면에서 세상 사람보다 더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면 우리의 영적 지식을 마음껏 세상에 선포하며 세상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영적으로 세상을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는 것입니다. 세상보다 앞서 갈 수 있고, 앞서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라도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고립당하는 함정에 빠집니다.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 없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 영역의 변혁을 위해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세상의 거짓을 진리로, 역리를 순리로 변혁시킬 수 없습니다. 결국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파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적 능력을 성장시키든지, 아니면 세상적인 능력의 부족을 채워줄 영적인 안목을 증가시켜 가야 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느브갓네살 왕 앞에 섰던 다니엘은 포로의 신분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적인 위치와 능력으로는 결코 느브갓네살 왕을 상대하여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느브갓네살을 압도하는 영적 능력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느브갓네살이 어떤 인물인지 알았고, 그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 알았으며, 그가 어떻게 반응해야 자신의 곤고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러한 영적 권세와 능력으로 느브갓네살을 대하지 않았습니다.

단 2:26에서 보면 느브갓네살 왕은 자신이 꾼 꿈의 내용과 해석을 몰라 번민하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그러한 느브갓네살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단 2:26-30에서 그에게 하나님의 위로의 능력으로 평강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단 2:31-35에서 그에게 두 가지 꿈의 내용을 밝혀주었습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왕 앞에 섰던 방법입니다. 이때 보여준 다니엘의 모습은 왕의 권세에 두려워 떠는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의 영적 권세로 장벽을 만든 모습도 아닙니다. 그 영적 능력으로 느브갓네살 왕의 눈높이에 맞추어 신중하게 접근해 갔던 승리의 방법이었습니다.

2. 눈높이 표현은 두려움 속에 있는 세상 주권자들의 마음을 열게 한다.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왕에게 두 가지의 꿈을 알려주었습니다. 한 가지는 왕이 한 큰 신상을 본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왕이 본 거대한 신상이 뜨인 돌에 의해 부서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 꿈을 알려줄 때 자신의 관점과 자신의 입장으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전적으로 느브갓네살 왕의 관점에서 표현하였습니다. 왕의 관점, 왕의 입장에서 표현하는 다니엘의 지혜는 영적인 능력과 권세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을 잘 알고, 그의 변화를 위해 접근해 가는 열린 접근방법입니다.

단 2:31의 첫 문장을 보면,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말을 듣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권세를 앞세우거나 나타내기 위해서 “내가 보니 왕 앞에 큰 신상이 있습니다”라는 식의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능력 중심으로 살아가기에 그 능력을 자신의 능력인양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자신을 내세우는 방향으로 세상 주권자 앞에 나서기 쉽습니다. 만일 그렇게 표현할 경우, 상대는 마음을 닫고, 우리는 고립당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특히 세상 주권자들은 오랜 세월동안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자기중심적인 설명을 접할 때 마음을 열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왕에게 왕 중심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왕에게 왕 중심으로 설명할 때 왕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그 표현은 왕의 자존감을 침해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그 표현은 왕의 권위를 무너트리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위 권위가 세움 받고, 존귀함 받는 표현이었습니다.

왕은 꿈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번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눈높이에 맞는 표현은 두려움 속에 있는 세상 주권자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임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길이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우리의 세상적인 능력은 보잘것없고 미천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세상 주권자들보다 영적인 능력과 권세가 앞서 있습니다. 그 능력과 권세로 자신을 내세우려다 장벽을 쌓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그들을 알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한 능력으로 사용하며 접근해 간다면 그들을 살리고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언제나 우리의 입장에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요 14:19에 보면,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입장에서 설명하셨습니다. 언제나 “너희가 볼 것이다. 너희가 알 것이다. 너희가 만날 것이다”라는 식의 표현을 통하여 제자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셨습니다. 특히 경험하지 못한 세상, 경험하지 못한 사건 사물의 표현에 있어서 눈높이 표현은 상대의 마음의 문을 열고 나의 것을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관문입니다.

단 2:31의 두 번째 표현은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 역시 왕을 중심으로 한 표현입니다. 왕이 모든 것을 자세히,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표현입니다. 왕에게 보이기 위해서 다가 온 신상을 그대로 보이게 하는 표현입니다. 왕이 보아야 할 신상의 모습을 정확히 이해하며 볼 수 있게 하는 표현입니다. “내가 보니 한 신상이 왕 앞에 서 있습니다”라는 표현이 아닙니다. “왕이 보시기에 왕 앞에 한 신상이 서 있습니다”라는 표현입니다.

왕이 본 큰 신상의 모양은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라고 할 정도의 위압감이 넘치는 모습입니다. 단 3:1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고는 육십 규빗이요 광은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라고 합니다. 높이가 60규빗입니다. 1규빗을 45cm로 잡으면 약 27m입니다. 너비는 6규빗입니다. 약 2.7m입니다. 높이와 너비의 비가 정확히 10:1입니다.

여기서 “신상”으로 번역된 아람어 “쩨렘”은 사람의 형상을 나타내는 “인상”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은 많아야 5:1 미만인데 너비에 비해 높이가 10배나 되는 신상의 모습으로 인하여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눈에 익숙하지 않은 모습으로 두렵고 흉한 모습으로 왕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다가 “광채가 특심”하였습니다. 광채가 특별히 심하고 정도에 지나칠 정도였습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심히 두려운 모습에 압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단 2:32-33을 보면 그 신상은 금, 은, 놋, 철, 진흙으로 인한 다양한 빛의 반사로 현란한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왕은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며 번민하였습니다. 균형이 깨어진 인간 형상의 신상과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광채 때문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모를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잘못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이 두려움의 역사를 들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들어갈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3. 무너질 세상 신상의 광채의 결국을 아는 성도가 세상을 이긴다.

그런데 세상 주관자에게 설명해 주어야 할 성도 자신이 그 모습을 두려워한다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 능력과 권세는 그러한 세상 신상의 종국을 아는 능력과 권세입니다. “무너질 세상 신상의 광채”를 아는 성도들만이 세상 주관자들을 알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춘 표현과 접근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그들을 변화시켜 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 보이는 신상의 광채는 무너지고 사라질 광채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에게 보인 신상의 생김새를 보면 단 2:32-33에서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라고 알려줍니다. 그런데 단 2:36-43의 꿈 해석에 보면 이들은 각각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38절에서 정금으로 된 우상의 머리를 “바벨론”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은으로 된 가슴과 팔들은 “메데와 바사”이며,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는 “헬라 제국”을, 철로 된 종아리는 “로마 제국”을 의미하고, 철과 진흙으로 된 발의 부서짐은 “로마 제국의 분열”을 의미합니다.

우상의 모습은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떨어져 가는 존재로 변합니다. 금머리와 같던 느부갓네살 왕과 바벨론 제국이 최종적으로 소멸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머리가 무거운 금으로 되어 있는 형상으로서 무게중심이 위로 모아진 무너지기 쉬운 형상입니다. 이처럼 세상 주권자의 모습은 두려운 모습처럼 다가오지만 곧 무너질 것들입니다. 세상 주권자의 세상 원리는 광채가 특심하지만 곧 사라질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이 신상의 모습을 느브갓네살에게 보여주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맞이하는 세상 주권자의 모습을 알게 하십니다.

그런데 무너져 없어질 세상 신상의 광채의 종국을 모르는, 믿음이 부족한 성도들은 오히려 느브갓네살보다 더욱 더 큰 두려움 속에 빠져 있습니다. 마치 느브갓네살이 그 신상의 주인인 것처럼 느브갓네살을 두려워하며 그들 앞에 영적 능력과 권세를 들고 다가가지 못합니다. 그들도 두려워 떨며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모든 비밀을 알고, 그 해결책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들 앞에 담대히 서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자신의 영적 능력과 권세로 그들 앞에 장벽을 설치하며, 자신을 향하여 도전해 오지 못하게 방어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장벽을 쌓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들에게 다가가며, 그들의 두려워 떠는 불행한 인생의 모습을 회복시켜 주도록 요구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견고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의 진심은 세상 신상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그들의 본심은 그 신상 문제를 해결할 자를 바라고 찾는 마음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자는 신상이 아니라, 그 신상 문제를 해결해 줄 다니엘과 같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영적 능력과 권세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들에게 다가가기만 하면 그들의 마음을 열고 그들의 문제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너질 세상 신상의 광채를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들을 기다립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외치고 있는 두려움과 번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자를 기다립니다. 그들은 자신을 지켜줄 자를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너질 세상 신상의 광채에 놀라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천국을 약속하시고, 성령을 통한 영원한 동행을 약속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믿음을 주십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소망이 무너질 세상 신상의 광채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견고히 서게 합니다. 이 소망이 무너질 세상 신상의 광채에 두려워 떠는 자들에게 담대히 나가게 합니다.

세상은 급속히 변해갑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각종 사건과 역사들이 진행되어 갑니다. 인간의 과학 문명이 어떤 방향으로 튈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유비쿼터스의 세상이 몰고 올 미래의 모습을 낙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주관자들을 두렵게 하는 대상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즉 성도들의 믿음이 그들을 향해 나가게 하는 도구입니다.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앞에 보인 신상을 통하여 느브갓네살 왕 앞에 서게 되었고, 그의 마음을 열게 하였으며, 그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 앞에 무릎 꿇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역사와 변화와 사건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을 향해 도전해 나가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방편들입니다. 무너질 세상 신상의 광채를 바라보는 우리의 믿음이 세상을 향한 지혜로 나타날 때 그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김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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