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 때, 그 때 달라요~ (고전 10:23-33)

  • 잡초 잡초
  • 370
  • 0

첨부 1


(고전 10:23-33)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할렐루야!
성령님께서 오늘도 말씀을 전하고 듣는 저와 여러분을 진리의 샘으로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마틴 루터가 쓴 중요한 몇 편의 논문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글입니다. 루터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명제를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이 명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된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의 주인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것에도 그 자유를 침해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신적으로는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이 명제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오늘 저는 성경의 본문에 따라 3가지 관점을 생각해 볼까 합니다.

첫 번째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용이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두 번째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용이 제한을 받아야 할 이유,
세 번째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용에 대한 보편적 규칙, 원리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용에 대한 제한(23-24)
기독교의 복음이 어떤 지역에 전파되면 그 지역에 있는 문화와 사회적인 관습과 충돌하게 됩니다. 그 때 여러 가지 반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서로가 대립되는 경우도 있고, 혼합되어 기독교의 진리가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참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의 고린도 교회도 이방문화와 문화충돌을 겪고 있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기원전 46년에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aesar)가 아름답게 재건축하였습니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서 정치적인 특권을 누렸고, 부와 문화를 자랑하던 당시의 로마의 중심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 즉 비너스(Venus)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 바울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도시가 가지고 있었던 문화나 관습과 충돌하는 문제들이 많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였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부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나 지금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아마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하여 결론을 맺는 말씀입니다.

(고전 10:23-24) 『[23]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십시오.』

여기에 "가하다"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합법적"(lawful)이라는 말입니다. 신자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는 율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서 다 유익하고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일에 분명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를 이기적으로 사용하면 덕을 세우지도 못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용문제에 있어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왜 이렇게 제한을 받아야 할까요?

■ 자유가 제한을 받아야 할 이유(25-30)
우리는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고린도의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고린도의 시장에 나온 고기 가운데 많은 부분은 희생제사를 위해 잡은 고기였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시장에서 이러한 고기를 사지 않으면 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시장에서 산 고기일 경우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고전 10:25)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생각하여 묻지 않고 먹어도 됩니다.』

이 본문에서 "양심을 위하여"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는 "양심에 따라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고기를 살 때 자기의 신앙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NIV성경은 이 부분의 의미를 살려서 "양심에 의문을 품지 말고"(without raising questions of conscience)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을 사서 먹으면 죄가 될까 안될까 생각하지 말고 시장에 나온 것이라면 사서 먹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상을 입증하기 위하여 구약의 시편 24:1의 말씀을 인용하여 26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10:26) 『"땅과 거기에 가득찬 것들이 다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온 세상을 우리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그 자체로서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거리낌 없이 그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동일한 사상을 설명하였습니다.

(롬 14: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부정한 것입니다.』

(롬 14:20) 『음식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먹음으로써 남을 넘어지게 하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적인 부분을 예를 들어서 언급합니다.

(고전 10:27) 『불신자들 가운데서 누가 여러분을 초대하여 여러분이 거기에 가려고 하거든 여러분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나 양심을 생각하여 묻지 말고 드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인 불신자 친척과 친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된 신자들은 이러한 관계를 깨뜨려서는 안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5:9-10에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5:9-10) 『[9] 나는 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과 상종하지 말라고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10] 그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들이나, 약탈하는 자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과는 아주 상종하지 말라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과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의 초대를 받아서 거기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온 음식을 양심에 대하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일까요? 2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고전 10:28) 『그러나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이것은 제사에 올린 음식입니다."하고 말하거든 그렇게 알려 준 사람과 그 양심을 생각해서 드시지 마십시오.』

이 경우는 어떤 불신자가 그리스도인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상을 섬기는 일이나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을 잘못된 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말하는 것으로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말함으로 그리스도인을 난처하게 하거나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기 위하여 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그의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 "알려 준 사람과 그 양심을 생각해서" 먹지 말라고 하는 말을 주의해 보십시오. 차려진 음식 가운데 어떤 사람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고 말한 사람이 어떤 동기를 가지고 말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때에 신자가 어떻게 처신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가 어떻게 처신하느냐 따라 그의 양심에 시험을 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말하는 양심은 먹는 사람의 양심이 아니라 지켜보는 사람의 양심을 말합니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양심이라는 것을 다음 절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0:29-30) 『[29] 내가 여기에서 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 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입니다.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의 비판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30] 내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하면, 내가 감사하는 그 음식 때문에 비방을 받을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처신하는 것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양심에 의해 판단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경우에는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먹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의 자유가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제한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경우에 23-24절에서 말한 규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합법적이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하고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30절에서 우상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경우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해석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부분입니다.

(고전 10:30) 『내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하면, 내가 감사하는 그 음식 때문에 비방을 받을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말씀의 핵심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먹지 않을 상황과 감사함으로 먹어야 할 상황은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요?

■ 자유 사용에 대한 보편적인 규칙(31-33)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자유롭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자유를 행사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는 자유에 제한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용에 대한 보편적인 규칙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보편적인 규칙 두 가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고전 1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바울은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유를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규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 삶이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는 방편이 되는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나타나 있는 보편적인 규칙은 32-3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고전 10:32-33) 『[32] 여러분은 유대 사람에게도, 그리스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교회에도, 걸림돌이 되지 마십시오. [33] 나도 모든 일을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나 스스로의 이로움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이로움을 구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자유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신자이든지 아니든지, 아니면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그들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신자의 자유를 사용하는 보편적인 규칙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고, 그것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문제를 결정할 때 우리 자신의 유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그 일을 통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얻게 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이 악한 행동을 수용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유를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되 그들의 악한 행동을 수용하지 않는 범위에서 복음의 영광이 드러나는지를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모든 것"이라고 폭넓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모든 것"은 단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지식인들이 많이 범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주관적으로 이해하여서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주관적인 방식으로 행하는 방종이나 불의한 삶까지도 허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합법적인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하는 한 가지 지식만 주장하면 그것은 교만에 빠지게 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8:1에 바울은 아주 중요한 원리를 설명하였습니다.

(고전 8:1)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관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압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많은 성도들은 부당한 일은 할 수 없지만 성경의 법에 일치하는 정당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합법적인가 아니면 불법적인가 하는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법으로만 따져서 될 일이 아닙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 이상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가 합법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행동에서 나온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고린도전서 11:23-24의 명제입니다.

(고전 10:23-24) 『[23]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 "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바울은 최종적인 결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인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며 그것을 통하여 그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시금석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웟치만 니(Watchman Nee, 1903-1972)라는 중국 선교사가 쓴 책에 여기에 대한 적절한 예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국에 한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살던 곳에 어느 해에 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 농부는 자기 논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제까지만 해도 자기 논에 가득 고여 있던 물이 밤사이에 그 앞의 논 주인이 빼어 갔습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인 농부는 물을 다시 자기 밭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행동이 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부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웃 논의 주인이 부당하게 가져간 자기의 논의 물을 다시 자기 논에 가져오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며칠이 지난 후 다시 자기 논에 가보니 전과 같이 옆의 논 주인이 물을 다 빼어갔습니다. 화가 난 그리스도인 농부는 그 물을 자기 논으로 전과 같이 다시 가져갔습니다. 그의 행동은 분명 합법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내가 정당한 일을 하였는데 왜 평안함이 없습니까?" 그가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처럼 옆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에 논에 가서는 옆의 논 주인이 물을 빼내어 가기 전에 먼저 자기 논의 물을 옆의 논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에게 평화가 왔고 기쁨이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합법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유익하고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 우리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합법적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이 유익하거나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사례는 우상제물에 대한 문제 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 전반에 다 적용해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원칙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당하게 번 돈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또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의 자유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나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구원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신자의 합당한 삶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정당하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양심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배려가 없다면 그것은 교만하고 융통성 없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덴마크의 실존철학자 키엘케고르(Kierkegard)는 기독교 2천년사의 역사를 3단계로 보았습니다. 1단계는 초대교회시대로 순교자시대라 했고, 2단계는 중세교회시대로 수도사의 시대, 3단계는 근세 기독교시대로 신학교 교수 시대가 되었다고 한탄했습니다. 순교의 피로 진리를 증거하던 기독교가 수도원의 경건의 기독교를 거쳐 신학교와 교수들의 교리, 이론으로 교만해 있다고 하는 한탄인 것입니다. 개인이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감격, 기쁨으로 충만한 1단계를 지나서, 경건의 훈련을 하는 수도사의 시대를 거칩니다. 그것이 굳어지고 형식화가 되면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머리만 커지고 삶은 따라가지 않는 신학교 교수 신앙이 되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자유를 우리 방식대로 사용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해 보십시오. 여기에 바로 세상이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정연수 목사).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