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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일용할 양식 (마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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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통치)가 임하도록 기도한 후에 오는 세 가지 간구인 ‘양식’과 ‘죄 사함’과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활하면서 요구되는 모든 필요를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그 필요 중의 첫 번째 자리를 ‘양식’이 차지합니다. 이 간구는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뜻, 그리고 뒤에서 언급한 죄 사함과 시험에 들지 않는 문제와 비교할 때, 대단히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기도생활에 있어서 매우 위험한 두 가지 생각을 집고 넘어가야겠습니다. 하나는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것들은 거룩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지 말고 그냥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무조건 가난하고 궁핍하게 사는 것을 옳고 바른 삶이라 생각하면 게으름으로 인한 가난과 궁핍까지 합리화됩니다. 성경은 결코 이런 생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살후 3:11)을 정죄하며 그런 형제들에게서 떠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살후 3:6).

또 하나의 극단은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지나치게 탐하는 태도입니다. 기도하면서도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평생 양식 더 나아가 자식대대로 쌓아놓고 먹을 양식을 구하는 것은 탐욕입니다. 이러한 일이 악한 것은 다른 사람의 일용할 양식을 착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돈을 악하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정죄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일용할 양식’ 기도는 이 두 극단적인 생각을 벗어나 있습니다. 한꺼번에 욕심을 내어 한 달 분량을 기도한다거나 기도도 없이 하루를 지내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날마다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과 함께, 일용할 양식을 넘어선 탐욕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제한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b-3)했습니다. 우리는 탐욕을 부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매일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일차적으로는 ‘생존에 필요한 실제의 음식물’을 위한 기도이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양식”이라는 말에는 물질세계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루를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은 많습니다. 돈도 필요하고 체력도 필요합니다. 여러 가지 아픔을 참을 수 있는 인내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학생들은 이해력과 집중력과 기억력이 필요합니다. 직장인들은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함을 조화할 수 있는 능력, 냉철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주부에게는 아이들을 다루는 지혜와 참을성, 규모 있는 살림살이를 위한 능력도 필요합니다. 특히 우리에게는 혼탁한 시대를 바르게 살아가기 위한 진리에 대한 ‘분별력’과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필요들을 구한다는 것은, 이 모든 능력과 힘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수 있는 분이며, 우리가 구할 때 공급해 주시는 분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8:17절을 보면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성실하게 일해서 재물을 얻었다 할지라도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과 힘은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일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능력과 힘을 거두어 가신다면 그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의 공급자 되심을 고백하고 감사하며 살게 합니다.

일용할 양식 기도의 핵심은 이러한 고백과 감사를 매일 드리면서 하나님께 의
존해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익히는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하루는 해가 진 이후부터 다음날 해가 지기까지였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기도하면 그날을 위한 기도지만, 저녁에는 그 다음날을 위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필요한 것을 위해 오늘 구하고, 다음날이 되면 또 그날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 삶을 살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꺼번에 많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서 일 년에 한 번씩 생활비만 보내주거나, 평생 먹고 지낼 재산을 주고서는 돌아보지 않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매일 매일 자녀의 필요를 살피시며 필요에 따라 공급해 주시는 아버지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일주일에 한번, 혹은 한 달에 한번 채워주시도록 기도한 후에 잊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필요를 기도하면서 공급자 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금은 부족한 듯이 사는 것이 복이 되는 것은, 적어도 그러한 때는 채워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구하게 되고, 채워주심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또 내가 부족한 만큼 부족한 다른 사람들의 심정을 잘 헤아리고 그들에게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과의 교제가 잘 됩니다. 그러나 풍족하게 되면 서서히 하나님을 잊고 지내기 쉽습니다. 마치 자기 힘과 능으로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이 생각되고, 자기의 힘과 능이 약해지기 전에 더 얻어놓으려는 탐욕에 사로잡혀 이웃의 양식까지 착취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체력이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잊고 살기 쉽습니다. 연약해서 비실거리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심하면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건강도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음 깨닫게 됩니다. 야고보서 1:17절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4:7절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내게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을 주시기도 합니다. 학문적 재능을 다른 사람들보다 몇 곱절 주시기도 하고, 재물을 몇 곱절 주시기도 합니다. 지치지 않고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튼튼한 몸을 주시기도 하고, 특별한 재능과 지혜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렇게 특별하거나 많이 주신 것을 은혜의 선물 곧 ‘은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재물도 ‘은사’에 속합니다. 이 모든 은사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들을 온전하게 잘 세우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엡 4:11-12). 그래서 베드로 전서 4:10절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 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에게’라면 이미 풍족한 사람은 이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풍족하여도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게 있는 재능과 지혜와 지식이 다른 사람에게는 없을 수 있습니다. 내게는 풍족한 시간이 다른 사람에게는 없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의 한쪽에서는 비만환자들이 넘쳐나는 반면, 지구의 다른 한쪽에서는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이처럼 다른 사람의 필요까지도 생각하게 합니다.

일용할 양식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양식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쌓아놓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베풀라고 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는 직접 또는 천사를 통해서 공급하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양식을 공급하시는 일도 사람을 통해서 되어 지도록 의도하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이 주신 양식을 그대로 창고에 쌓아놓고 ‘하나님 저 결핍된 사람에게 양식을 주세요, 내 것은 건드리지 마시구요’라고 기도한다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참으로 기도하는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려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내게 주신 은사로 어떻게 봉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게 주신 재능과 내게 주신 건강과 내게 주신 소유를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이 아닌 사람들도 ‘배워서 남 주나’라는 태도에서 ‘배워서 남 주자’라는 태도로 전환하여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우는 저도 배워서 남 주려고 공부합니다. 이왕 주는 것 좀 더 제대로 잘 알아서 잘 주고 싶기에 더 열심히 공부합니다.

일용할 양식의 간구에서 “우리에게”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의 필요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관심을 두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물질을 쌓아두기 위해 남의 것을 착취하게 되는 물질숭배와는 전적으로 반대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가르침을 오히려 자기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대로 ‘무능하고 게으른 탓에’ 남 줄 것 하나 없는 궁색한 형편으로 살고, ‘성실하게 일하고 공부하지 않아’ 초라하게 되었으면서도 ‘세상이 나를 버려도 우리 주님은 아신다’며 감상적인 눈물을 흘리는 태도는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는 것은 편하게 놀고먹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기도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야함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만 의존하고 그분의 공급하심에 감사하며 잉여 양식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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