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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만히 서 있어라 (삼상 12:6-18, 롬 13:11-14, 마 7: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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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백성들이 위기에 직면할 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대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제시해 주십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 그들이 홍해 앞에까지 왔을 때 애굽의 군인들이 600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추격해 왔습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이스라엘 진중에는 심한 동요와 혼란이 일게 되었습니다. 먼저 그들 중의 일부는 낙심천만하여 울고불고 야단을 떨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종노릇하는 것이 이 광야에서 개죽음 하는 것보다 더 낫지 않았겠느냐?”고 땅을 치며 통곡하였습니다. 또 다른 일부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매일반이라”고 하면서 “될 대로 되라”고 차라리 속편하게 일찌감치 체념하였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애굽 사람들에게 가서 항복하고 목숨만이라도 부지하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은 책임론을 제기합니다. “일이 누구 때문에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화살은 모세에게로 집중했습니다. 모세로서는 출애굽 여정 출발부터 너무 엄청난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위기에서 모세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출14:15에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는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를 갈라주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해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출애굽에 이어 “홍해도해(洪海渡海)”라고 하는 두 번째 하나님의 구원 역사였습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기도의 사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친 말씀이 있습니다. 출14:13에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기13절에 이어 14절에도 역시 “가만히 서 있어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무엘서 본문에도 7절에 “너희는 가만히 서 있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6절에도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있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의 말씀이나 오늘 본문에 “가만히 있어라”고 하는 말씀의 참 뜻은 그냥 입을 다물고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기 앞에서 혼비백산하여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좌충우돌 허둥지둥하지 말고 정신 똑똑하게 차리고 하나님 앞에 서라 그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자신만 믿고 교만하거나 아니면 절망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께 아뢰고, 주님이 역사하실 기회를 드리라 그 말입니다.

모세를 통한 출애굽과 이제 사무엘을 끝으로 새롭게 열려지는 왕정 시대 그 중간에 “사사시대”가 있습니다. 그 사사시대는 과도기로서 이스라엘 역사상 암흑시대요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대입니다. 그 사사시대 역사의 정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배신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그 결과로 두 번째 패턴은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이웃 강대국에 의하여 압박을 받게 되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 번째로 이스라엘이 견디다 못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자 사사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십니다. 즉 배신-징벌-회개-구원이 사사시대 역사의 패턴이었습니다. 여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비록 이스라엘이 범죄 했다고 해도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무엘 시대에 와서 이스라엘의 큰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왕을 구하면서 정치적 변혁을 요구한 것이 잘못이란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위기 상황에서 과거처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방법으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구한데 있습니다. 그것이 왕을 세우라고 요구한 일입니다. 이래서 사무엘은 “너희가 왕을 구하는 죄를 범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게 하나님보다 더 앞서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그것이 사람-부모, 자식, 남편, 아내-이든지 물질이든지 명예든지 권세든지 할 것 없이 하나님보다 앞세울 때 내가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그것은 내게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먼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난 아들을 바치라고 하신 것은 짓궂은 심술이 아니라 우선순위에 대한 테스트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먼저 하나님” 신앙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여기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만히 서 있어라”고 하는 말씀은 구원을 위해서 여기 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하나님 면전,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 1:에 “복 있는 사람은...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본회퍼에게 “묵상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본회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묵상이란 성모 마리아가 한 것처럼 성경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마음에 두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묵상입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기다리는 것”이 다름 아니라 “가만히 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무엘서 8절에 “너희 조상이 내게 부르짖으매...”라고 했습니다. 10절에도 “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 온 것입니다. 돌아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께 예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힘써 외친 말씀이 무엇입니까?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께서 맨 먼저 외친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 즉 “돌아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앞에 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어떠합니까? 오늘 사무엘서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너희를 치러 옴을 보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1) 15절에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수준 높은 문화 앞에 주눅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우상숭배 문화, 육감적이고 물량위주의 문화를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하나님 중심의 소박한 삶을 싫어해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사람들의 삶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들릴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것이 그때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까?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신앙적인 것보다 세속적인 것이 훨씬 더 매력이 있지 않습니까?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미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귀가 막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구원을 다른데서 찾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2)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떠나는 것이 소극적이라면 여호와를 거역하는 것은 적극적입니다. 시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악인의 꾀에 귀를 기울이고, 죄인과 동행하며, 오만한 자와 동석하는 것을 즐긴다면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원수들과 내통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꾀에 귀가 솔깃했습니다. 예수님의 거처만 알려주면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돈도 줄 것이고, 또 명예도 얻게 될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가룟 유다 자기보고 잡아끌고 오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설사 자기가 처소를 알려 준다고 해도 예수께서 능력을 발휘해서 적들을 물리치실 것이요, 그러면 이것을 계기로 해서 오히려 예수께서 그 왕권을 확립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매우 합리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원수와 내통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한 것이 바로 주님을 거역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 방법대로 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는 이것을 “십자가의 어리석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원과 승리가 바로 여기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이스라엘이 비록 왕을 구하는 죄를 범했으나 그 왕마저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13절 사무엘서 마지막 부분에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힘써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1) 14절에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십계명 가운데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은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첫 계명은 다른 어떤 계명보다 더 중요합니다. 우리 신앙의 승패는 여기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3년간의 공생애를 마무리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으며, 얼마나 놀라운 약속을 해 주셨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이 확실한 신앙을 소유하고 고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말씀하시고 주신 결론에서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그 주초를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은 비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기 비바람이나 창수는 무엇입니까?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데 닥치는 여러 가지 시련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일도 역시 우리 신앙은 승리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 앞에 설 때를 말합니다.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예외 없이 다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심판의 날에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겠습니까? 명예입니까? 권세입니까? 지식입니까? 물질입니까? 선행입니까? 그때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런데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주님은 이미 문밖에 와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님 맞을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그 준비가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다시 확인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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