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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조연배우10> 위대한 권위자 바나바 (행 4: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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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조연배우 시리즈를 마치며

오늘이 위대한 조연배우 시리즈 설교 열 번째 시간이자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 동안 열 번에 걸쳐 열 한 명의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조연배우들을 다루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모세의 장인 이드로, 모세의 좌청룡 우백호인 아론과 훌, 아브라함의 충실한 종 다메섹 엘리에셀,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갈렙, 다윗의 생명보다 귀한 친구인 요나단, 에스더의 사촌오빠이자 실제적으로 유다 민족을 구원했던 주인공 모르드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시몬, 주님을 장사 지낸 아리마대 요셉이 그 사람들입니다. 아마 내용을 잊어버렸던 분들도 이 사람들의 이름을 들으며 “아, 그랬지” 하고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물론 위대한 조연배우 시리즈를 열 번으로 끝내면서 아쉬움이 많습니다. 아직 다뤄야 할 성경의 조연배우들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자신의 전 재산인 오병이어를 주님께 바친 이름 없는 한 아이라든가, 바울의 충실한 동역자인 부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리고 디모데나 실라나 에바브로 디도, 두기고 등등 정말 많은 사람을 더 다루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쉬움 속에서 이 정도로 시리즈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이번 시리즈 설교를 한 이유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 두기 바랍니다. 꼭 주연이 되어야만, 꼭 주인공이 되어 각광 받고 박수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큰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뒤에 숨어 일할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주역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 땅에서 너무 드러나고 칭찬과 인정과 박수를 받게 되면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께 받을 상급이 줄어든다고 했습니다. 이 진리를 분명히 기억하시고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만 섬기며 일하시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

이제 오늘 본론으로 들어가 위대한 조연배우 시리즈의 마지막 인물인 바나바에 대해 살펴봅시다. 사도행전 2장에 의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통해 예루살렘 초대교회, 즉 처음 교회가 세워집니다. 2장 42~47절에 보면 이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이 초대교회는 참된 가르침과 교제와 기도와 찬양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날마다 믿는 사람이 더해지는 부흥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이들은 특히 함께 모여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쓰는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공산주의의 할아버지라 할 수 있는 칼 마르크스가 이 구절을 보고 공산주의를 고안했다고 할 정도로 이 본문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획기적인 재산소유방법을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전 재산을 사도 앞에 내놓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초대교회의 특징이 오늘 본문의 바로 앞 구절인 4장 32~35절에 나옵니다. 읽어봅시다.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그렇습니다. 앞서 2장에도 나온 것처럼 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든 물건을 통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한 사람이 자신의 모든 재산인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 앞에 바치는 모범을 보였는데 그 사람이 바로 바나바라는 별명을 가진 구브로 사람 요셉입니다.




권위자 바나바

오늘 본문인 36절과 37절에 보면 우리가 바나바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 다섯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그의 출신지인지 그는 구브로라는 지역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그의 인종과 지파를 보면 유대인이며 레위지파 사람입니다.

셋째, 그의 이름, 즉 본명은 요셉입니다.

넷째, 그의 별명은 사도들이 붙여주었는데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섯째, 그의 행동이 나타납니다. 그는 자기 밭을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러면 이 다섯 가지 정보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먼저 그의 출신지인 구브로는 어디인가?  ‘구브로’란 오늘날 지중해에 있는 그리스령 키프로스, 혹은 사이프러스 섬을 뜻합니다. 바나바는 우리로 치면 제주도나 울릉도 쯤 되는 섬 출신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그는 유대인 중에도 레위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레위 지파라면 특별히 구분된 거룩한 지파 아닙니까? 제사장이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일을 담당한 지파입니다.

셋째, 그의 본명인 요셉은 지난 주 살펴본 아리마대 요셉처럼 흔한 유대인의 이름입니다.

넷째, 그의 별명은 ‘권위자’라는 뜻을 가진 ‘바나바’입니다. 우리는 이 별명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별명이 그의 성품과 특성을 잘 나타내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별명이 있습니까? 별명이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생김새나 습관, 성격 등을 특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그래서 별명을 들어보면 그 사람이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인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구브로 사람 요셉의 별명은 ‘바나바’입니다. 그 뜻을 개역성경에서는 ‘귄위자’라고 설명하는데 좀더 정확하게는 아람어로 ‘바르 나바’ 즉 ‘권위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권위’라고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시스’는 격려, 권면, 위안, 위로 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요셉이라는 사람이 남을 잘 격려하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의 주특기가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을 잘 격려하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이었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단순히 슬픔 당하고 어려움 당한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만 뜻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거나 죄를 짓는 사람을 보면 권면하고 충고해주며 어려운 사람들은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절에 보면 예언의 은사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예언이란 다른 사람에게 말을 통해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은사 중에서도 예언의 은사가 가장 상위에 있다고 말하는데 그 예언의 은사가 바로 말을 통해 덕을 세우고 잘못하는 사람을 권면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로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 중에도 이 권면하고 위로하는 은사가 정말 귀하고 수준이 높은 은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별명을 36절에 나온 것처럼 사도들이 직접 붙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직제자인 열 두 제자들로서 큰 권위를 가지고 당시 초대교회를 이끌어간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들이 볼 때도 구브로 사람 요셉이 권위자로서 뛰어난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고 인정해 준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참 귀한 은사인데 목사가 볼 때도 “이 사람은 정말 뛰어나다”고 인정해 줄 만큼 남을 잘 권면하고 위로하는 은사를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도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줄 만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권면과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기 잘못된 죄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고 파멸에 이를 것이 뻔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길에서 돌이키도록 권면하고 충고해야 하는데 이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잘못하면 그 사람 마음이 상합니다. 그래서 “지가 뭔데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해?”하며 마음을 완전히 닫아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권면하는 일은 목사도 참 하기 힘든 일이지요. 그런데 권면하는 은사를 가진 분들은 이 일을 참 잘 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하면서도 그 사람을 깨닫게 해서 돌이키도록 만듭니다. 이런 사람이 한 명만 있으면 교회 분위기가 달라지고 귀한 역사가 많이 일어납니다. 말로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로는 내 형제요 자매라고 하면서 이 사람이 분명 잘못된 길로 가는데도, 그대로 놔두면 파멸의 길로 멸망의 길로 갈 것이 뻔한데 그냥 방치해 둔다면 그 책임은 우리가 함께 져야 합니다. 우리도 함께 죄를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또한 지금 여기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한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위로 역시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내가 지금 진정으로 당신과 함께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줘야지 안 그러면 말로만 위로하고 말로만 슬퍼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정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로하는 은사를 가진 분들은 마음속에 진실한 사랑을 가진 분입니다. 남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당신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이런 분이 한분만 계셔도 참 교회가 따뜻해집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 이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될 때에만 그 교회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권위자’가 꼭 지켜야 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 권위자는 절대로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나타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남을 권면하는 일을 하면서 이런 소문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개 집사 혼 좀 냈지. 그러면 못 쓴다고 말이야. 그 정도면 정신 좀 차릴는지.. 쯧쯧” 생각해 보십시오. 이 분의 말이 그 사람 귀에 들어가면 그 권면이 먹혀들겠습니까? 위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용히 남들 모르게 위로하고 격려해야지 자꾸 자신을 드러내며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양 나타낸다면 그 위로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내가 저 사람 불쌍해서 돈 얼마 가져다주었다”고 자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아무개 상담하고 위로했다”고 드러내면 그 사람은 정말 자존심이 상하고 다음부터 절대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권위자는 언제나 겸손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권위의 일을 하시려면 절대 드러내지 마시고 목회자의 목회방향에 따르며 도와주는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목회자보다 앞서거나 내가 목회자보다 더 상담이나 권위 잘하는 사람인 양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자세로 권위의 일을 하면 오히려 목회에 어려움을 주고 교회를 혼란하게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나바는 사도들을 철저하게 돕는 입장에서 권면과 위로를 했고 기꺼이 조연의 사명을 감당한 분이었기에 사도들도 그를 인정하고 친히 ‘바나바’ 즉 이 요셉은 정말 훌륭한 권위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효자교회에는 이런 바나바 권사, 바나바 집사가 몇 분이나 계실까요? “저 권사님, 저 집사님은 정말 권면하고 위로하는 은사를 받았어.” 하는 분이 누구이며 몇 분이나 있습니까? 우리도 이 은사를 받아봅시다. 쉬운 일은 아니지요. 상담을 하고 권면과 위로를 하려면 우선 내 성질 다 죽이고 내 고집 다 꺾어야 가능합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끝까지 충분히 듣고 진심으로 그 마음을 읽고 그 마음에 공감해 주는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절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은사지요. 하지만 이런 분이 꼭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교회가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주연 자리를 내준 바나바

바나바에 대해 성경이 꽤 많은 정보를 주고 있으므로 이외에도 함께 나눌 말씀이 참 많습니다. 아마 서너 번 설교를 해도 될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오늘은 바나바에 대해 두 가지 사실만 살펴봅니다. 바로 조금 전 말씀드린 그의 권위자로서의 능력과 이제부터 살펴볼 바나바와 사도 바울의 관계입니다.

사도 바울에 비하면 바나바는 분명히 조연급 배우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거꾸로 바울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고 바나바가 교회 안에서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사울은 거꾸러져 예수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복음을 위해 생명을 거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런데 9장 26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전에 얼마나 무섭고 철저한 핍박자였는지 기억한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아무리 사울 자신이 나는 변했다고 주장해도 믿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나선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27절입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무슨 뜻입니까? 아무도 사울을 믿어주지 않을 때 바나바가 나서서 바울을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고 사울이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과 친분을 가질 수 있도록 주선해 준 것입니다. 이미 바나바는 사도들에게 인정받은 사람이었고 사도행전 11장 24절에 나온 것처럼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신뢰를 받은 사람이었기에 사도들은 사울은 못 믿어도 바나바의 말은 믿어주었고 그래서 사울이 교회에 발을 붙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뛰어난 지도자며 제주도 선교의 아버지인 이기풍 목사님는 본디 평양거리의 유명한 깡패이며 싸움꾼이었습니다. 그는 평양 네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던 사무엘 마펫(우리나라 이름은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크게 다치게 하기도 했습니다만 이 마펫 선교사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회개하여 예수 믿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장이가 된 것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특히 평양의 성도들은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후원해준 분이 바로 그에게 돌을 맞아 머리가 깨졌던 마펫 선교사입니다. 사람들이 깡패 이기풍은 못 믿어도 마펫 선교사는 믿었기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펫 선교사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위대한 지도자 이기풍 목사가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또 생각해 보십시오. 바나바가 없었다면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인물 사도 바울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면 왜 바나바는 이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사울을 추천하고 후원한 것일까요? 바나바는 사울의 능력과 잠재력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사울이 가진 학식이나 재능, 무엇보다 무엇을 확신하게 되면 생명을 바쳐서라도 끝까지 뿌리를 뽑고야 마는 성품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주님의 복음사역을 위해 위대하게 쓰임 받을 재목이라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바나바에게는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바나바가 사울을 추천하고 후원해 준 것뿐 아니라 나중에는 아예 주연과 조연 자리를 바꾸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3장 2절에 보면 안디옥교회가 성령님의 지시를 따라 바나바와 사울을 세워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분명히 이름 순서에서 바나바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이 사울입니다. 이 선교팀의 팀장은 누가 뭐래도 존경과 인정을 받은 바나바였던 것이지요.

두 사람은 안디옥교회의 파송으로 선교여행을 떠나 제일 먼저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서서히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을 바꾼 사도 바울이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구브로에서 바예수라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를 만났을 때 그를 꾸짖어 소경을 만든 사람은 바나바가 아니라 바울입니다. 그러더니 13장 13절에 가서는 이 선교팀을 ‘바나바와 바울 일행’이라고 하지 않고 아예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바나바의 이름은 아예 나오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선교여행 과정에서 중요한 설교나 중요한 이적은 거의 바울이 도맡아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무슨 쿠데타라도 일어나 바울이 바나바의 주연자리를 빼앗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나바는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과 재능을 가진 바울에게 기꺼이 주연자리를 내어준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여행을 시작한 이후 과연 바울은 그 뛰어난 능력을 십분 발휘합니다. 그의 메시지는 능력이 있었고 그의 행동에는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바나바가 일찍이 핍박자 사울에게서 보았던 능력과 재능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민합니다. “얘 너무 컸다. 더 커서 내 자리 위협하기 전에 싹을 잘라버리자.” 이런 결론을 맺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사를 보면 정치적으로 큰 인물들이 후계자를 안 키우는 습관이 있습니다. 좀 싹이 클만하면 잘라버렸습니다. 그 까닭은 내가 천년만년 이 자리에 있을 줄 알고 저 놈이 커서 내 자리를 위협할까봐 겁이 나서였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정반대의 일을 합니다. 자신이 키운 사람이 더 큰 능력을 발휘하자 기꺼이 그를 자신의 앞에 세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납니다. 이것이 바나바의 가장 위대한 업적입니다. 바나바 없이는 바울도 없는 것입니다.




바나바를 찾으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는 바나바라는 또 한 명의 위대한 조연배우를 만났습니다. 바나바는 사람을 발굴하고 세우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권면과 위로를 통해 다른 사람을 도왔고 더욱 위대한 것은 자신이 발굴하고 키운 바울이 자기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하자 기꺼이 뒤로 물러나 사도 바울을 돕는 조연이 되기를 자처합니다. 이러한 바나바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사도 바울은 그의 기대대로 위대한 선교사가 되어 주의 복음을 세계에 전파하는 위대한 선교사역을 이루었고, 위대한 신학자가 되어 신약의 13권을 기록하고 특히 로마서 등 교리서신을 기록함으로 기독교의 체계와 신학을 정립하는 위대한 일을 이룹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기독교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라면 그를 발굴하고 세우고 주연으로 만든 바나바는 더 위대한 인물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위대한 구원역사를 이루기 위해 일군을 찾으십니다. 그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일군들이 필요합니다. 능력과 재능을 갖춘 헌신된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자격을 갖춘 사람이 하루아침에 나타나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발굴하고 키워주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을 찾아내고 키워내는 사람들이 정말 필요합니다. 게다가 그 사람이 제대로 일하도록 돕기 위해 나는 언제든지 뒤로 물러나거나 숨을 각오가 된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바로 바나바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하나님의 일군들, 좋은 주연배우도 찾고 계시지만 이런 바나바 같은 위대한 조연배우는 더 간절히 필요로 하십니다. 주연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많지만 바나바 같은 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됩시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사람을 발굴하고 세워주고 키워주는 교회가 됩시다. 다함께 저를 따라합시다. “나도 기꺼이 조연배우가 되자!” 한 번 더 따라합니다. “나도 사람을 세워주고 키워주는 성도가 되자!” 아멘.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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