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마 6:13)

  • 잡초 잡초
  • 886
  • 0

첨부 1


주기도문은 성경구절을 하나씩 나누어서 설교를 해야 됩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말씀은 세 번에 걸쳐서 설교하겠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부분을 먼저 말씀드리려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끊임없이 시달리는 시험의 문제를 취급하셨습니다. 시험은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이 시험은 세상에서의 심판과 같아서 시험 때가 되면 누구든지 괴로워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시험과 세상의 시험은 다른 개념이지만 고난의 부분에서는 같은 맥락을 유지합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대학의 입시 제도가 하도 어려워 입시 지옥이라는 말이 생길 만큼 많은 젊은이들이 괴로움을 당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과정은 다 시험 제도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시험도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운전을 하지 않았던 제 친구 목사님 한 분은 미국에 이민을 와서 운전 시험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운동신경이 좋아 운동도 잘 하시고, 미국 가기 전에 여기서 영어 통역관을 했을 정도로 영어도 아주 잘하는 똑똑하신 분입니다. 너무 머리가 좋아 문제가 될 만큼 아주 예리한 분별력을 가진 분인데도 운전 시험에 자꾸 떨어진단 말입니다. ‘이상하다.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운동신경도 좋은데 왜 이렇게 자꾸 떨어지는 걸까? 여자들도 한번에 붙는데….’ 어떤 때는 시험관을 옆에 태우고 거리로 나가게 되어 있는데 남의 잔디밭에 차를 올려놓고 말았습니다. 시험관이 “아니, 남의 잔디밭에 왜 차를 올려놨습니까?”하고 말하니까 당황하게 되고, 어떤 때는 기왕 올라왔으니까 뒤로 어떻게 나가보라고 해서 뒤로 나가다가 그 집의 쓰레기통을 와장창 들이받아 가지고 온통 길바닥을 쓰레기 천지로 만들어놓은 적도 있었습니다. 시험관이 “뻔뻔합니다, 뻔뻔해요. 아니, 어떻게 이런 실력을 가지고 시험을 보겠다고 오셨습니까?”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자꾸 떨어져서 일곱 번이나 시험을 봤습니다. ‘나의 뇌 가운데 운전을 못하는 그런 조직이 있나? 왜 다른 것은 다 되는데 운전만 이렇게 안 되나?’라고 고민을 하던 중 미국에서 살려면 운전을 안 하면 살수가 없어서 여덟 번째 시험에는 머리를 썼습니다. ‘

미국 사람들은 목사라고 하면 좀 봐주는 게 있다던데 내가 한번 머리 좀 써야겠다!’ 시험 보러 가서 운전대를 잡고 옆에 있는 시험관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목사입니다.”라고 소개를 했더니 “아, 그러십니까? 나는 집사입니다.”라고 하면서 그 시험관이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주는지 “저희 교회 담임 목사님을 제가 너무나 사랑하고 교회가 너무 좋고….” 교회 이야기만 하면서 “그냥 한바퀴만 돌아오세요.”라고 안심시켜 주니까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운전도 아주 잘 되고, 운전에는 거의 신경도 쓰지 않고 교회 이야기만 하고 한국 교회는 또 어떠냐고 물어보기도 하는데 이 목사님이 영어를 잘하니까 영어로 한국교회는 이렇다 소개하고 언제 이민 왔는지 이야기하고 아주 잘 됐습니다. ‘아! 진작 내가 목사라고 밝힐 것을….’하고 기뻐서 돌아와서 있는데, 뭐가 잘못되고 잘 되었는지를 미국에서는 시험지를 본인에게 직접 줄 수 있어서 채점해서 몇 점이라고 써서 그 사람이 사인해 주는데, 그 시험관이 웃으면서 “또 만납시다.”라고 하는 겁니다. 받은 시험지를 봤더니 “NO PASS” 그래서 이렇게 재미나게 이야기하고 운전도 잘했는데 불합격을 이유를 그 시험관에게 물어봤다고 합니다. “내가 오늘 왜 불합격입니까?” “당신이 목사만 아니면 오늘 합격입니다. 목사는 이 사회에 굉장히 중요한 사람인데 목사가 교통사고로는 죽지 말아야지요. 저는 목사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정도 가지고는 합격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연습 더 해 가지고 오세요.”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여덟 번째 목사라고 말한 것 때문에 또 한 번 떨어지고 아홉 번째서야 합격한 친구가 있습니다. 이렇게 시험은 괴로운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로 시험에 관한 교훈이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들지 않는 게 가장 좋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 반대의 뜻도 있습니다. 야고보의 말씀은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라고 것입니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또,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다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시험은 괜찮은 것이고 어떤 시험은 마귀의 역사인가?’우리가 생각해 보면 오늘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첫째로 이 시험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테스트(Test)의 부분이 있습니다. 이 테스트의 시험은 하나님의 소원이 들어있는 하나님이 동의하시는 부분을 말합니다. 야고보서에 나타난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라고 하는 것은 이 테스트의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어떤 시험인가 하면 이것을 받을 때는 말도 못하게 괴롭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잘 이기고 지나간 다음에는 내가 겪은 시험 비중에 따라 큰 영광스러움이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게 테스트의 부분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테스트의 대표적인 예는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욥의 사건도 그렇습니다. 어느 날 마귀가 하나님 앞에 요청을 합니다.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좋은 것을 너무 많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번 도로 빼앗아 보세요. 그러면 욥이 하나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그래? 그러면 너하고 나하고 욥을 테스트해 보자!” 그래서 하나님이 욥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빼앗아 버리는 것을 동의합니다. “그렇게 하자! 다만 욥의 생명에는 손대지 말라.”라고 약속을 하고 욥에게 시련, 테스트가 나타납니다. 사업의 몰락이 왔지 않습니까?

욥은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하면 재벌입니다. 그렇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 몰락의 시험이 욥에게 찾아왔습니다. 사람이 생활수준을 높이기는 쉬워도 내리기는 참 어렵습니다. 재벌이 알거지가 되었으니 살 수 있겠습니까? 또한 가정적인 몰락이 왔습니다. 그 많던 아들, 딸이 전부 죽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시험은 없다는 뜻입니다. 자신에게도 테스트가 들어옵니다. 몸에 질병이 생겨 견딜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의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마지막까지 지켜주던 아내도 욥을 저주하면서 자기 곁을 떠납니다. 그 다음에는 외부 세계에 시험이 들어옵니다. 세 친구가 찾아와 온갖 비난을 욥에게 퍼부어 댑니다. 욥이 겪었던 이 테스트는 똑같지는 않아도 우리들 삶에 있습니다. 때로는 물질적 시험을 당해서 슬퍼하던 때도 있고 자녀들의 고난 문제가 시험이 되어서 인생을 절망하고 후회하는 그런 일이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고, 신체적 고통 속에서 인생의 고난을 뼈저리게 통감하는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가까운 친구들이나 남편, 아내의 오해와 비난 속에 외로운 시간을 슬프게 보내던 때도 있고, 욥이 당한 이 모든 것은 우리 인간의 당할 수 있는 절망스런 시험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들이 매일 같이 기도하는 부분은 “이런 것들이 내 주변에 다가오지 않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이 테스트의 부분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라고 말합니다. 왜 기쁘게 여기는 것일까? 망했는데 뭐가 기쁜 것인가? 이 테스트의 부분은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당하는 시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아무 잘못이 없으십니다. 욥도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동방의 의인인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 더 의로운 아무 잘못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잘못이 하나도 없이 인간 최고의 고통스러운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요셉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잘못을 전혀 하지 않는 상태에서 죄 없이 외국에 인신매매가 되어 팔려가고 죄 없이 감옥에 갇히고, 사랑 받던 부모와 생이별하여 소식을 끊고 살아야 했던 이산가족의 아픔의 시험도 겪었고, 형들이 팔아먹었으니 혈육간의 배신의 시험을 겪었고, 아버지 사랑을 받다가 별안간 노예 생활로 전락하게 되니까 자존심이 몰락하는 시험을 만났고, 어린 몸에 일하지 않으면 밥 얻어먹기 힘든 생계 위협도 겪었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써야 되는 말 못할 시험 속에 빠지게 되었고, 감옥의 죄수 생활이 주는 육체적, 정신적 갈등의 시험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욥도, 요셉도 테스트 안에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잘못이 없는 시험의 고난입니다.

그러나 이런 테스트의 시험은 과정이 지날 때 큰 영광스러움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어떻게 됩니까? 그 테스트를 지난 다음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 역사를 만듭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히브리 성경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빌립보서 2장에도 같은 맥락으로 예수의 영광을 전하고 있는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죄 없이 큰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시더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시험이 아브라함에게도 왔었습니다. 왜 그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가? 선택하셨으면 좋은 일을 주셔야 되는데 “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아들을 죽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테스트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시험의 과정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하시고 하나님을 믿는 자의 표본 인물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조상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아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노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도 있고 할아버지도 있는데 아브라함부터 말하지 그 이상은 말을 안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테스트는 왜 오는 것일까? 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올 때는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 주님이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하신 이 시험은 어떤 의미인가? 이것은 유혹(Temptation)이라는 것입니다. 이 “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험(Test)과 유혹(Temptation)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시험은 과정이 매우 힘이 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지나면 큰 영광이 찾아옵니다. 유혹의 과정은 너무나 즐겁고 좋지만 지나면 멸망이 옵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는 겁니다. 이 시험은 어디에나 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데 시장에 나가 일을 할 때도 집안에 있을 때에도 있습니다. 산에 가면 없을까? 마찬가지로 거기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여럿이 있을 때에도 생기고, 혼자 있을 때에도 생기고, 교회 오면 교회에도 있고, 심지어 설교를 들을 때에도, 기도할 때에도 끊임없이 생깁니다. 이처럼 시험은 보편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 가셔서 아무도 만나지 아니하고 혼자 하나님과 금식으로 40일 기도하시니 그 자리에서 시험이 왔습니다. 보편성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 둘만 계신데 더구나 아무 것도 안하고 기도만 하고 있는 그 거룩한 자리에도 주님 곁으로 유혹이 왔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유혹을 당합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시험을 받게 되어 있는 보편성이 있습니다. 나는 목사니까, 나는 권사니까, 나는 모태 신앙이니까, 나는 새벽기도 교인이니까 이런 이유들이 넉넉한데도 이 유혹은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이 점은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법당 같은데 가보시면 부처가 있지 않습니까? 그 부처의 머리를 자세히 보시면 파마한 것처럼 곱슬머리입니다. 왜 그렇게 만들어났습니까? 달팽이 모양으로 해놓은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경건하게 온갖 욕심을 버리고 앉아 수양을 하는 그런 시간에도 머리에는 온갖 세상의 유혹이 징글맞게 가득 차 있다는 뜻입니다. 그 시험을 말할 때 영어로 세 가지를 말합니다. ‘Whenever언제나’, ‘Whoever누구에게나’, ‘Wherever어디서나’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시험이 없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시험이 옵니다. 그러면 부자는? 부자이기 때문에 시험이 옵니다. 돈을 100만원 벌 때 10만원 십일조는 쉽게 냈는데 1000만원 버니까 시험이 옵니다. 100만원씩 십일조를 내야 하는데 돈이 많아지니까 더 큰 시험이 옵니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돈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보편성으로 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유혹의 부분입니다. “오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니까 이 유혹의 시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거기에 들지 않게 하라고 기도하라! 이렇게 시험은 두 가지 길로 갈립니다. 예수님께 다가와서 시험하는 자를 성경은 마귀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바로 이 부분이 유혹의 부분입니다. 시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이 시험을 이길 것인가? 시험을 이길 수 있다고 내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마귀는 영리해서 한번 건드려서 재미를 본 사람은 자꾸 건드립니다. 믿음이 부족해 재미볼만한 사람을 골라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영리한 마귀는 유다를 선택합니다. 왜?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의 말다툼, 언짢은 관계가 자꾸 일어난 사람이 유다였기 때문입니다. ‘아! 이 놈을 잡으면 되겠다!’ 그래서 누가복음 22장 3절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그때부터 이 사람은 유혹에 빠진 겁니다. 사단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험은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다고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시험을 두려워하는 자는 시험에 걸립니다.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군대와 같은 영적인 힘을 가지고 시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힘찬 찬송을 부르며 영적 능력을 가지고 나가면 시험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못난 자식은 귀신이 눈만 흘려도 벌떡 넘어간다고 그랬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으니까 시험에 자꾸 걸리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영적 결함이 나를 자꾸 시험으로 끌고 갑니다. 여러분 마음에 걸림돌 역할은 무엇입니까? ‘아! 하나님이 평생 나에게 물질을 많이 주셨는데 나는 하나님께 물질과 함께 충성하지 않고 있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물질적 시험이 옵니다. ‘내가 윤리 도덕적인 면에서 깨끗하지 않다.’ 그러면 그 문제에 자꾸만 시험이 듭니다. ‘나는 예배 하나도 제대로 드리지 않고 살아간다.’ 그 사람은 예배에 자꾸 빠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의 고백이 부족한 부분을 마귀는 타고 들어옵니다. 어느 시점에 가서는 사람이 결단을 해야 됩니다. 그 결단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어? 이 사람이 달라졌네? 무서워졌네? 하고 물러가게 됩니다. 집사님 한 분이 저한테 와서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는 라스베가스와 가까워서 그곳에 놀러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기서 동전 하나 집어넣고 당기면 어떤 때는 돈이 천불씩 와르르 쏟아지니 이게 무슨 벼락부자가 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듭니다. 그런데 거기 가서 돈을 따서 행복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유혹에 걸리니까 자꾸만 가게 되어 물질적 문제가 생깁니다. ‘이번 달 월급을 타면 생활비 얼마를 제하고 그리고 나서 빨리 가서 그거 또 해야지.’ 여기에 한번 걸리면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패가망신하게 되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거기에 빠져서 헤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유혹은 그런 힘이 있습니다. “목사님한테 고백하는 것은 제가 월급 타서 생활비 딱 제하고 노름하러 다닐 수 있는 비용을 만들기 위해 다른 것을 줄일 수 있는 것은 헌금 밖에 없어 헌금 안내고 아내에게는 십일조 한다고 거짓말을 해서 노름하는데 모두 썼습니다. 그런데 물질 시험에 계속 걸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병적인 단계까지 와서 어느 날 내가 회개하고 다시는 안가겠다고 결심하고 지금 6, 7년째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물질적 시험이 없습니다. 시험거리는 어느 때인가는 결단을 하고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 주님이 주신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힘으로 이 유혹에서 헤어 나오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보호를 받습니다. 기도는 절대자의 힘을 의지하는 행위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겟세마네 동산 한 군데 나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직접 분명하게 들은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잠만 잤지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날 밤부터 베드로는 시험에 걸립니다. 시험에 걸린 베드로가 계속해서 하는 일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 가니라”,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니라”, “예루살렘을 도망치다시피 갈릴리로 피해버리고” 시험에 걸려니까 비겁한 자가 됩니다. 만약 예수님과 같이 그날 밤을 새워 함께 기도를 했다면 그 기도의 힘을 통해서 아마도 예수님과 나란히 십자가를 졌을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 박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지구상에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긴 민족은 히브리 민족이다. 왜 그런가? 도전과 응답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무수한 고난과 시험의 과정을 통해 단련된 신앙 문화를 가지고 있다. 온 세상을 찬란하게 빛낸 신앙 문화가 그들의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그 속에서 인류 구원의 문제가 완성된 신앙문화를 그들이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여러분! 어떤 시험의 문제를 안고 오늘 여기에 오셨습니까? 그 시험의 문제는 내 영혼을 찬란하게 빛낼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영적으로 관찰하시고 기도를 통해 더 확고한 믿음으로 유혹의 부분을 기도를 해서 물리칠 수 있는 시험에 대한 분명한 신앙관을 가지고 영적 가득한 은혜로 이 성전을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저희들도 끊임없이 시험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는 시험은 기쁘게 받아들이고 잘 이길 수 있게 하시고 유혹의 부분은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