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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강림을 기다리는 성도 (약 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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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가까웠다는 기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이 애용하던 인사말은 “마라나타!”였습니다. “마라나타”는 아람어인데 ‘우리 주님이 오신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근 250년 동안이나 지속된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박해를 이겨낸 것은 바로 이 ‘마라나타’ 신앙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강림하실 것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은 그저 기독교의 신앙적인 표현 중 하나 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마라나타!” 곧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도 속히 오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올바로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주의 강림을 고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종교적인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교리가 아닙니다.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고난을 앞두신 시점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1)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주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을 데려가시려고 강림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위해서 강림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심판주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셔서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였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심판주로서 이 땅에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계시록 1장 7절에도 나옵니다. 거기에는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집에 가시거든 사복음서를 읽어보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강림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 말씀하셨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천사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무도 모르게 승천하신 것이 아니고 사도들을 비롯해서 수백 명의 신도들이 보는 가운데서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습니다. 그것도 예루살렘 근처의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구름을 타고 올리워 가시는 주님을 좀 더 분명히 보기 위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했습니다. 흰옷 입은 두 사람은 곧 천사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3)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4)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

그리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고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야고보 선생도 말씀하기를 “7)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들은 주의 강림을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사실로 알고 증언했습니다. 이처럼 주의 강림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입니다. 이제 주를 믿는 성도들이 할 일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주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우리는 주의 강림이 매우 가까운 때를 살아갑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이미 사도들은 주의 강림이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21세기인 지금은 그만큼 더 주의 강림이 가까워졌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 성경의 시간 개념이 너무나 막연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가깝다고 한 것이 벌써 2천년이나 지났지 않느냐고 반문할는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8)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로 그것이 주의 강림이 지체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지체 없이 주의 강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대하여 오래 참아주시지만, 행하기로 작정하신 것은 때가 되매 지체 없이 시행하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의 강림을 고대하며 깨어서 믿음을 지켜나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주의 강림을 기다리는 성도라야 세상 유혹과 핍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으로 유혹이 많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듣고 보는 것 가운데 우리 마음을 세상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나 자신의 주관을 갖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이 세상의 풍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살아갈 적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것을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풍조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경계합니다.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

세상을 따라서 살면 믿음을 지켜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려면 주의 강림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의 강림을 고대하는 성도는 세상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 대신,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렸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언제 주님께서 강림하실지라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믿음을 준비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신자의 수는 많은데, 신앙의 수준이 매우 낮은 것이 흠입니다. 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한국 교회와 흡사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출석 교인이 많고, 물질적으로 부자 교회가 되었더라도, 또한 부서 조직도 잘 되어 있고, 여러 가지 좋은 프로그램을 운영할지라도, 주의 강림을 기다리는 신자들이 많지 않다면 결코 주님의 칭찬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가운데는 현세적인 번영과 축복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잘 살고 행복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믿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십시오. 어디 한 곳이라도 “나를 믿으면 이 땅에서 부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산상수훈에 언급하신 여덟 가지의 복 가운데 물질적인 번영과 관련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전부 영적인 복으로 되어 있습니다.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

사랑하는 성도님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얻는데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넓은 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싫어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생활이 아니라, 세속을 끊어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주의 강림을 대망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뜨뜻미지근한 어거스틴을 변화시킨 것은 로마서 13장 11절로 14절 말씀입니다.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는 이 성경 구절을 읽고 지금이 어떤 때인지를 알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왔던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고 철저하게 신앙위주로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어거스틴과 같이, 우리도 신앙이 해이될 때마다 주의 강림이 가까왔음을 생각하고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100퍼센트 세속화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이 세속화되어 있습니다. 듣고 보는 것들이 다 세속화된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 기독교인들은 기술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살던 기독교인들에 비해서 신앙생활의 조건이 불리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박해가 없는 대신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 등이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고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이 같은 세상 풍조에 물들지 않으려면,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손짓하고 부를 때 주의 강림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강림하십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들이 세상 즐거움에 흠뻑 취해 있을 때, 도적 같이 임하실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로 3절에 “1)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3)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밤은 곧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밤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영적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세상일에만 몰두해서 살아가는 시대가 곧 밤입니다.

예수님은 재림을 앞둔 시점에 사람들의 형편에 대하여 “38)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고 하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이고, 그것이 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에만 몰두한 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과 같이 육에 속한 사람이요, 어두움에 속한 사람인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물질적인 번영을 추구하는 데만 관심이 있지 자기 영혼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생을 엔조이 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있지, 그것이 영혼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바로 이 같은 상태를 가리켜 영적인 잠에 빠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지난번에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난 쓰나미 재앙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해변에서 모래찜질을 즐기고, 물놀이를 즐기던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밀어닥친 쓰나미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만일 그 때 사람들이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그것이 재앙의 전조임을 알았더라면 서둘러 안전지대로 피신함으로써 재난을 모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기에 참혹한 비극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비유컨대, 주님의 강림이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재림의 가까움을 알리는 시대의 징조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7)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14)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전번에 쓰나미 재앙이 발생했을 때, 방송사나 신문마다 그 원인을 분석해서 보도하는데 힘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력한 분석은 심해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이나 지진으로 지각변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화산 폭발이나 지진은 지구의 표층을 이루고 있는 판들이 서로 포개지거나 밀거나 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는데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분석은 과학적인 관점에서 본 결과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쓰나미가 일어난 물리적인 원인을 분석하는 것, 그 이상을 우리에게 말해 주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같은 현상을 신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쓰나미 재앙을 보면서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하신 주님의 예언에 입각해서 그것을 종말을 알리는 징조의 하나로 알아채야 하는 것입니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민족 분규에 관한 뉴스를 대하면서 그것을 단순히 국가 간의 이해타산이나 민족의식의 발현으로 볼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예언에 근거해서 종말의 징조 중 하나로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이 전 세계적으로 급속하게 전파되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영적으로 깨어 시대의 징조를 보고 지금이 어느 때인 줄을 분명히 깨달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의 강림을 대망하는 믿음으로 다가오는 세상 유혹과 핍박을 능히 이겨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주의 강림을 기다리며 상급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강림하시는 이유는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들을 데리러 오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초림하실 때에는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셨으나 재림하실 때에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오십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셔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이르기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심판주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요 5:22)고 하셨습니다.

므나 비유에 보면, 임금은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 열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주고,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다섯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므나를 땅에 감추어 두었다가 도로 가져온 종은 무서운 책망과 함께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땅에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진 생애는 임금이 준 므나와 같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생명과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모든 조건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장차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인이 준 밑천을 가지고 열심히 장사한 종들은 주의 강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게으른 종은 주의 강림에 무관심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구원을 받지만, 각 사람의 공력에 따라서 받을 상이 다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3장 12절 이하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주의 강림을 고대하지 않는 사람은 장차 받을 상급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신자는 불 속에서 건짐 받은 사람처럼 겨우 구원만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같이 주의 강림을 기대하면서 열심을 품고 주의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르기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일을 위해 수고한 것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수고한 성도는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을 위해 수고한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는 주의 이름으로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0:42). 인생을 지혜롭게 살기 원하십니까? 주의 강림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영원한 상급을 준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농부는 추수 때를 바라고 한 해 동안 인내하면서 농사를 짓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강림을 바라고 모든 시험과 핍박을 참아내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우리는 하찮은 것을 얻기 위해 수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라는 바가 한없이 고귀한 것이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주의 강림은 성도들이 죄와 죽음과 사단에 대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날에 성도들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신천신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모시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 마다 주의 강림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언제, 어느 때 주님께서 강림하실지라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쁨으로 맞이하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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