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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요청 (롬 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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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4장 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고 기이하여 우리의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이해력을 뛰어 넘는 사랑입니다. 하나뿐인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것은 순전히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증언합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생명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향하여 애타게 호소하고 계십니다. 이사야서 65장 2절에 이르시기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저는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요청’을 세 단계로 나누어서 상고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향하여 "오라"고 요청하십니다.

“오라” 하시는 요청은 죄인들을 구원에로 초대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천국 잔치를 준비해 놓으시고 진정한 사랑에 목마르고 굶주린 인생들을 향하여 “오라”고 요청하십니다. “1)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또한 범죄하고 불의한 인생들을 향하여 용서와 화해의 자리로 “오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6)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6-7)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가출한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는 곧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무거운 죄의 짐을 진 자들이요, 삶의 곤고한 짐을 지고 가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인생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초대하십니다.

또 주님의 멍에를 짐으로써 우리 인생의 짐을 함께 나누어지자고 말씀하십니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은혜로운 초청에 응한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사람을 차별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세리, 창기를 사람취급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이방인들과 사귀거나 거래하는 자들을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 같은 자들과는 상종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신분에 따라서 사람을 차별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라고 대우하시고 세리나 죄인이라고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마태를 불러 제자로 삼으셨으며, 일곱 귀신 들려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던 막달라 마리아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같은 예수님을 보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마 11:19).

지금도 주님께서는 범죄한 인생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 때 주님의 부르심을 효과적인 부르심이 되도록 해야 할 책임이 우리 각 자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막기 때문에 멸망을 당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주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16)…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비유에서 정식으로 초대 받은 사람들은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행세하던 자들을 말합니다.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 귀족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자들, 병신들, 소경들, 저는 자들과 산울 가로 나가서 강권하여 데려온 자들은 하층민들,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그들 가운데 예루살렘의 귀족 출신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지를 말입니다. 제자 중에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들이 가장 많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이는 주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난 사람들보다 오히려 못난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같이 언급했습니다.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이 말씀과 같이, 오늘날도 이 세상에는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택하지 않으시고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택하여 불러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님들도 이 같은 은혜를 받았으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부르심에 응한 자들을 향하여 "믿으라"고 요청하십니다.

“오라” 하시는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한 사람은, 또 하나의 요청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믿으라”는 요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로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천국 잔치에 초대 받았으면 그만이지, 또 무슨 절차가 남아 있느냐고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비유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2)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10)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

이 비유는 등장인물이나 전개되는 사건은 다르지만, 그 의미는 누가복음 14장의 비유와 같습니다. 천국 잔치에 정식으로 초대받은 유대인들이 거절함으로써 초대받지 못했던 자들이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2장의 비유에는 누가복음 14장의 비유에 없는 내용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와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바깥 어두운 데로 쫓아냈다는 내용입니다.

누구나 이 비유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계획에 없이 갑자기 초대 받은 사람들입니다. 언제 예복을 준비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거니와 또 그들 가운데는 예복을 준비할만한 경제력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의 관습을 알면 금방 오해가 풀립니다. 그 당시 왕궁에서 잔치를 할 때는 입구에 손님을 위한 예복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손님들은 그 예복을 걸치고 연회장에 입장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예복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의인이라야 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죄인이 무슨 수로 의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임금이 준비해 둔 예복을 입듯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나의 의로 삼음으로 가능합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죄인입니다.

혹 사람들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보면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 10절 이하에는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했습니다.

인간들 간에는 누가 누구보다 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차이란 오십보백보에 불과합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서려면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롬 3:22).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청함을 받은 자는 천국 잔치 곧 구원의 자리에 초대 받은 사람들을, 그리고 택함을 받은 자는 실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비유에 예복을 입은 자들은 택함을 입은 자들이고,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은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전자는 구원 받은 자들을, 후자는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을 말합니다. 구원의 자리에 초대를 받았으면서도 구원을 받지 못하다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어느 신학대학의 교수가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목사면서도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부처를 믿어도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신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을 일컬어 청함을 받았으나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거짓된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등록하고 기독교인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은 그 다음 단계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믿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줍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주(主)는 곧 하나님을 일컫는 호칭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시인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입니다.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도마는 동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았다고 했을 때 믿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 후에 예수님께서 의심하는 도마를 찾아오셨습니다. 도마더러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도마가 대답하기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할 뿐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믿지는 않으면서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신앙을 고백할 때 구원 받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렇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공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일 뿐 공로가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 속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가리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제자의 삶"을 요청하십니다.

“오라” 하시는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 나온 사람은 이제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 백성에서 천국 백성이 되었으며,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요청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거저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공로도 필요치 않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제자가 되는 것은 다릅니다. 인간 편에서 볼 때 어려움과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합니다. 때로는 대가를 치를 때도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믿는 자들은 많은데, 제자의 삶을 실천하는 신자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단계를 말하며, 후자는 성숙한 단계를 말합니다.

생명은 가만히 있는 법이 없으며 지속적으로 자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갓난아이를 보세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납니다. 만약에 아기가 자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들의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령한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자라나야 합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영적 성장을 멈춘 신자들도 있습니다. 성장을 하되 너무 더디게 자라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은 이같이 권면합니다.

“12)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13)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

성도들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와 같습니다. 가지의 존재 목적은 과실을 맺기 위함입니다. 과실을 맺되 많이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과실을 많이 맺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셨습니다.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 안에 있기만 하면 절로 과실을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내 힘으로 잘 해보려고 하면 너무 힘이 들고 금방 지쳐 버립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의 은혜로 해야 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로부터 진액을 공급받아서 생명을 누리고 많은 열매를 맺듯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의 진액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으라”(행 11:23)고 권면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도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으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먼저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하신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모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에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십니다. 나의 경험이나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려 들지 마시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한 마음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능력 있는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제자는 전도에 힘씁니다. 복음 전파는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했습니다. 세상이 점점 더 악해져서 사람들이 진리에 대하여 귀를 막고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우리에게는 전해 줄 책임이 있습니다(겔 2:7). 다른 나라에 가서 선교사로 일하지는 못할지라도,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전도하면 됩니다. 믿지 않는 남편, 자녀, 부모, 형제, 친척, 친구, 이웃 사람들, 이웃집 아이들을 우리의 전도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전도를 받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될 것입니다(행 13:48).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단계에 머물러 있는 분들은 없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구원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원 받는 믿음을 가지신 성도님들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매 단계마다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요청에 기꺼이 호응함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가운데 거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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