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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 (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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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우리가 믿음이 부족한 성도라 할지라도 적어도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꿈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해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무지의 어려움이 있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습니다. 혹은 알면서도 이루어드리지 못하는 죄악의 유혹과 연약함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경우입니다. 또는 왠지 모르게 마음에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지경도 있습니다. 요나와 같은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좀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소망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8절 끝에 나오는 대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는 말씀을 볼 때 우리는 그 앞 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이루어 드리고 싶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앞 절에 나온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내용은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내용이고 또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이와 같이 당연하고 또 우리 가슴속에 늘 감동을 주는 말씀이 언젠가는 우리들에게 너무 멀리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또는 왜 내게 이와 같은 최소한의 믿음의 기본조차 이루어지지 않을까라고 마음의 안타까움을 느낄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늘의 말씀을 선언적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세절의 짧은 단문으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고, 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룸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오늘의 말씀을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항상 기뻐하라’하는 16절의 내용입니다.

항상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파악이 끝났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의 섭리는 언제나 내게 기쁨주시고 은혜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것이지 내게 어떤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선함과 축복과 은혜와 은총이라는 섭리를 온전히 파악하고 이제 내 마음속에 확신할 때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을 보니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나에 대한 근본적인 하나님의 계획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소망이니 나는 어떠한 것들이 내 앞에 현상적으로 어른거린다 할지라고 그 현상 뒤에 섭리하고 계시는 분명한 뜻을 파악하여 아니 하나님은 내게 이제는 평안과 기쁨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기쁘다라는 것입니다.
눈앞에는 슬픈 장면이 어른거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결과적으로 그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고 내게 기쁨과 평안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중요한 것은 ‘항상’이라는 수식어를 먼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어떤 선택적이거나 한시적이거나 아니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언제나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요인이 있고 우리는 언제나 기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과 우리들에게 주어진 상황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상황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 우리는 언제나 기쁜 것입니다. 더욱이 ‘항상’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일관성이 있고 수시로 그 마음이 변함이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 따라 상황 따라 이리저리 변하고 말 바꾸고 세상말로 얼굴빛까지 바꾸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에 결코 기뻐할 수 없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기쁨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동일하게 한가지로 마음을 일관되게 가져 하나님이 내게 대한 모든 기쁨의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내 마음의 기쁨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어떤 상황도 내 앞에 늘어지는 어떤 현상도 내가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물감 한통 가지고 있습니다. 한손에는 붓을 들고 있습니다. 내 앞에 누가 어떤 사물을 갖다 놓아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물감과 붓을 가지고 그것을 색칠해서 그 색깔을 변하게 할 수 있습니다. 붉은색 물감을 붓을 가지고 찍어서 칠해서 그 사물을 다 붉은색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붉은색이 기쁨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항상 기뻐한다는 것은 내 앞의 상황, 내 앞에 놓인 여건, 내 앞에 놓인 시간, 내 앞에 놓인 공간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 마음의 해석적 능력과 그리고 내 마음의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슬픔, 고통, 눈물 아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기쁨으로 만들 수 있는 내 마음에 해석적 능력과 의미부여의 권세니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에 기뻐할 수 있는 구조와 틀을 만들어야 합니다. 방앗간에서 쌀을 빻아서 떡을 만드는데 맨 끝에 둥근 모양의 틀을 만들면 가래떡이 나오고 넓적한 틀을 끼우면 절편이 나오고 이와 같은 각각의 모양이 나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기쁨으로 구조화 되어 있다면 나를 통하는 모든 상황과 모든 느낌들은 결국 어떠한 것이라도 기쁨으로 화할 수 있음을 우리는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목회하면서 어렵다고 생각해 본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일이라고 굳이 생각을 안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좀 더 힘을 쏟고 시간을 더 쏟고 방법을 개선하고 또 뿐만 아니라 기도하고 기다리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렵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렵다 생각했으면 그것도 어려움이라 의미 지어지고 그것은 어려움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기쁨이야.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은 항상 기쁨이야’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언제나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 기뻐하라 말씀합니다. 슬퍼하거나 낙심하거나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은 ‘기뻐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도 내고 마음의 슬픔도 가지고 눈물도 가지지만 곧 회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적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의 낙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마음껏 누리라고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모든 권세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마음에 욕심으로 말미암아 사단이 꼬이는 꼬임에 빠져서 결국 하나님께 도전하다가 그 모든 에덴의 낙원의 축복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절연되니 그들에게는 영적인 죽음의 상태가 왔습니다. 그들에게는 기쁨이 사라지고 그들에게는 암흑가운데 놓이게 되는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그와 같은 모습을 불쌍히 여겨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대신 그들의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 인간들과 화목하시고 우리 인간들에게 다시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결국 기뻐함이라는 것은 구원받은 백성들의 징표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이렇게 여쭤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백성입니까?’ 하는 말은 ‘여러분 지금 기뻐하며 살고 계십니까?’라는 말로 대치되어도 괜찮다 생각합니다. 제가 한번 여쭤볼 테니 마음에 진실을 가지고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기뻐하고 계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기뻐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백성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게 된 사람이 살게 되었는데 왜 안 기쁘겠습니다. 아파보세요. 혹시 병원에 며칠이라도 입원했다 나와 보면 햇빛을 쐰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바람을 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내가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우리는 마음속에 사무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 우리는 자연히 이세상의 모든 것이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 중에서도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가장 먼저 온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의미를 두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모든 일을 어련히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결국 기쁨이라는 것은 은혜 받은 백성의 특권입니다. 사망의 어둠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생명과 은혜의 빛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세미한 삶의 상황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 유학생들 수련회가 보스턴에 있어서 보스턴에 다녀왔습니다. 마침 제가 6년 전에 안식년을 보내면서 머물던 바로 그 동네에서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말씀도 전하고 기도도 하고 교제도 하고 학생들이 준비해 놓은 논문도 읽고 하는 시간들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매우 즐거운 시간도 가지고 서로 격려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그런데 6년 전에 살던 바로 그 동네에서 모임을 가지게 돼서 그 동네 거리가 옛날에 있는 것과 얼마나 달라졌나 살펴보게 되었는데 거의 그대로인 것 같았습니다. 음식점 이름도 가게 이름도 그리고 주변의 건물도 거의 그대로이고 바뀐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만 바뀐 것 같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바뀌어 있겠지요. 그리고 또 6년 만에 간 저도 많이 바뀌어 있었겠지요.

우리 삶의 상황이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 그대로 있는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서 그 상황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을 늘 생각해 봅니다. 우리 인생에는 바람 불고 비 오지만 그것도 큰 틀에서 보면 일정량 비 오고 일정량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해봅니다. 같은 건물 같은 거리 같은 모습도 밤과 낮에 따라 빛에 따라 어둠에 따라 그 분위기에 따라 그것을 느끼는 마음이 달라지리라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삶의 기쁨과 삶의 슬픔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기쁨의 눈으로 바라보면 언제나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감격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의 삶은 늘 새로운 것을 느끼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왜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 할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라는 확신이 있으면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내 죄를 대신 사하여 주시고 나에게 생명주시고 구원주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고 내게 기쁨 주셨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고 그 기대는 우리를 기쁘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인가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무엇인가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인 것입니다.
제가 한 열흘 정확히는 십일일 일정을 다녀오면서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에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어디를 가나 만나는 분들이 참 잘해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분당중앙교회 목사니까 잘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유학생들 만나도 친절하게 잘 해주시고 여러 가지로 기쁘고 감사하게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여러 성도님들이 정성을 들여서 장학금도 보내주시고 기도도 해주시고 여러 가지 이러저러한 마음으로 후원을 해주시고 또 그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가 가니 아마 우리 유학생들이 마음에 무척 기뻐하는 마음으로 잘 대해주셨겠지요. 저라는 자연인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의 대표로 환대해 주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기쁨으로 대했습니다. 또 제가 간 김에 며칠 집회를 한 가운데도 그 성도님들이 상당히 잘 해주셨습니다. 말씀을 전하러 갔으니 말씀을 전하면 은혜도 받고 하니 기쁨으로 서로 또 교제하지 않습니까?

집회는 금요일 토요일 주일에 있었는데, 제가 하루 전 목요일에 갔습니다. 그리고 끝나고 월요일에 거기 있다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주일 월요일 이렇게 식사를 준비하시는데 아침, 점심, 저녁을 각 가정에서 준비를 하셨습니다. 아마 강사목사님 오시니까 누가 식사를 준비하시겠습니까? 하고 식사시간표를 썼는데 거기에 이름을 기입하셔서 준비를 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은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고 이번에도 컨퍼런스에 참여하셔서 논문도 읽으시고 하셨는데 기도를 많이 하셔서 성도님들이 은혜로 준비를 많이 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침 점심 저녁 각별하게 준비를 하신 음식을 먹으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절대 한 그릇만 먹고는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아침, 점심, 저녁을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주일, 월요일, 제가 지금 얼굴이 포동포동 하잖아요. 제가 거울을 보면서 처음에는 시차 때문에 얼굴이 부은 줄 알았는데 빠지지 않은 걸 보니 부은 게 아니고 살이 찐 것이었습니다. 또 가뜩이나 시차 때문에 졸려서 밥 먹고 자고 밥 먹고 자고 시간되면 말씀전하고 먹고 자고 말씀 전하고 그것 밖에 없으니까 얼굴이 포동포동해 지더라고요. 그런데 제 마음속에는 그렇게 아무리 잘해주셔도 우리 분당중앙교회 성도들이 더 좋더라고요. 이런 아부 속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성도들이 있다면 참 문제가 있겠지요.

뭔가 기대하고 마음속에 소망을 가지고 무엇인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참 기쁜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도 언제 대해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환대해주시고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정말 기쁨으로 나를 맞아주신다는 생각이 있다면 우리는 기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영화를 봅니다. 작품성이 뛰어난 데 비극적 주제가 있는 영화 이리저리 슬픔의 장면이 있는 영화도 봅니다. 그것을 보고 나서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실컷 눈물을 흘리고 나서 우리는 잘 보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참 훌륭한 영화다 좋은 영화다’라고 합니다. 영화 내용은 그것을 감상하고 느끼는 우리 감정의 순화나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주인공이 다 박수 받고 환호하며 큰집에서 잘 먹고 잘사는 해피엔딩이 이루어져야만 잘된 영화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즉 눈앞의 장면은 이러저러해도 그것을 느끼고 감상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며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슬픔의 장면이 있습니다. 눈물의 장면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참 좋은 삶이야’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기쁜 삶이야’라고 우리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조그만 장면들 분할된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루어지는 큰 구도의 작품을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게 어떤 슬픔이 있어도, 아픔이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아픔과 슬픔을 포함해서 이루어지는 큰 그림이 우리들에게 기쁜 은혜의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슬퍼하는 사람들도 그래요. 분명히 우리들에게 슬픔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슬픔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봅니다.

저희집에도 아이들이 있다 보니까 사춘기 때의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엄마가 시장에서 과일을 사왔다. 사과, 배, 포도, 참외 이런 것이 있다고 하면 복숭아는 없어요? 하고 묻습니다. 왜 꼭 없는 것 물어보는지 모르겠습니다. 청개구리 같은 청소년의 때라고 생각하고 더 감싸주고 칭찬해 줍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이럴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기쁜 일이 많아 그것을 누리기에도 충분한데 우리는 항상 없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면에 집중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슬프게 사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면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삶이라면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예배드리는 것 기쁘죠? 4부예배가 있다는 것 기쁘죠? 한잠 자고 실컷 자고 일어날 수 있으니까 기쁘죠?

저는 설교 때마다 설교자로서 은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설교를 하면 우리 성도들이 설교를 잘 청취하시잖아요. 그리고 그 가운데 은혜를 받잖아요. 그리고 저는 주무시는 분들이 있을 때 더 큰 마음에 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이라는 것은 사실 마음이 편해야 오는 거잖아요. 마음 불편해 보세요. 그날 잠이 옵니까? 마음이 불편하면 불면이에요. 그러니까 예배시간에 잔다는 것은 은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배시간에 초반에 자는 사람들은 한마디에 은혜를 다 받은 거예요. 말씀 초반에 다 받아버리고 이제는 ‘나는 됐다’ 그러니까 마음이 너무 편안해 져서 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보면 아, 내가 오늘 설교를 괜찮게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이 들면서 아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설교시간에 이래도 저래도 은혜가 되잖아요. 말씀을 깨서 잘 듣던지 아니면 하나님께 은혜 받아서 자든지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잠도 안자고 은혜도 못 받고 마음이나 볶고 있으면 그건 별로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항상 기쁠 수 있는 은혜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내가 왜 기뻐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은혜로 기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항상 기뻐한다는 것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내 기쁨이 일치 된다는 것입니다. 내 모든 삶은 하나님에 의해서 섭리되고 움직여집니다. 그런데 항상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심과 나의 원함이 일치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내 기쁨이 일치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 있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기쁨과 우리의 기쁨이 일치되는 성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서 하나님의 기호와 우리의 기호가 일치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죄를 추구하고 전에는 내 방법을 추구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선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순서와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추구하게 되니 이제는 모든 일이 항상 기뻐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잘돼도 안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우리는 로마서 8장 28절처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책상 앞에 적어놓고 늘 마음속에 적어 놓고 생각하는 문구가 있는데 한번 따라해 봅시다. ‘내 마음하나 이기지 못하고 어찌 기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내 마음하나 이기지 못하고 어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항상 기뻐한다는 것은 내 마음의 문제입니다. 내 마음에 어떻게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받아들이고 확신하는가 입니다. 우리는 그 마음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기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축복에 대한 의지를 확인함으로 말미암아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기대함입니다. ‘기도는 기대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2장 23절을 보면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것을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늘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는 말씀에서 ‘쉬지 말고’라는 수식어를 생각해봅니다. 늘 언제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역을 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한시도 쉬지 않고 입을 열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호흡과 언어 자체가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 이루어지는 기도와 같아야 합니다. 내가 사람에게 말해도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 삶의 움직임이 기도가 돼야 합니다. 음성뿐 아니라 삶의 행동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리와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나, 이리와 보세요라고 손짓하는 것이나, 종이에 글씨로 써서 ‘이라 와 보세요’라고 보여드리는 것이나 똑같은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음성이나 행동이나 문자나 결국 같은 내용을 전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의사표현 되어지면 그것이 모두 기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끊임없이 연결되고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수시로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제게 좀 나쁜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상당히 게으른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특별히 물건을 사는 것을 굉장히 귀찮아하고 그 면에서는 게으른 것 같습니다. 가끔 어떤 분이 취미에 ‘쇼핑’이라고 쓴 분들을 보면 굉장히 존경스럽습니다. 물건을 사는 것을 왜 싫어하는가 하면 첫째는 뭔가 비슷한 것 중에서 골라야 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비슷비슷한데 어떤 것을 고른다는 것이 상당히 어렵고, 또 그것 사고 나면 대부분 사람 보면 한번씩 안 바꾸면 마음이 성치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 산건가 못 산건가 마음에 드는가 안 드는가 갈등도 해야 되고 또 주고받고 돈도 내야하는 것들도 있고, 제일 또 안 좋은 것이 들고 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건 사는 것에 별로 취미가 없습니다. 제가 그래서 혹시 어디 다녀올 기회가 있을 때, 죄송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참 사람이 빡빡하고 못됐던 것 같습니다. 제가 좀 인정이 많잖아요. 안 믿는 것 같은데 믿어보세요. 그런데 제가 물건 사는 것은 취미가 없어서 어디 가서, 물건을 단 한 개를 안 사왔습니다. 몇 년을, 아주 오랫동안, 최근 얼마 전까지도 물건을 단 한개도 아니 단 1$짜리도 안 사왔습니다. 그러니 저는 물건을 하나도 안사는 사람으로 당연히 생각이 됐습니다. 그리고 사는 것도 머리 아프고, 또 그것을 들고 다니고 상당히 어렵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언젠가부터 그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크니까 아이들이 갔다 오면 기대하는 기색이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이길 어른이 없잖아요. 그런데 아이들만 크는 것이 아니라 어른도 크잖아요. 그래서 요즘에는 어디를 가게 되면 나올 때는 간단한 기념품이라도 하나 사서 들고 들어옵니다. 저는 그때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생각이 납니다. 아이들이 부모가 멀리 갔다오면 ‘손만 바라본다’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 부모의 손이 무엇이 들려있나, 무슨 선물이 들려있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빈손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빈손 가지고 ‘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라고 말씀하시기 대단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생각하면 기도라는 것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들이 성화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죠? 기도는 그냥 내가 중얼거리거나 생각을 하거나 아니면 글씨를 써서 하나님께 기도문을 작성한다거나 어떤 종류든지 기도죠? 그런데 아무 행동도 없고 하나님 앞에 가만히 기도만 하는 것 같은데 그 사이에 우리가 성화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기도는 하나님을 끌어내려 내 마음에 있는 소원을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끌어당겨서, 내 쪽으로 끌어당겨서 내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 짊어지게 해서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라는 것은 간절히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점점 내가 하나님 앞에 다가가 마침내 내 마음을 열어드려 내 마음을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내 쪽으로 끌려오는 것이 아니라 점점 기도할수록 내가 하나님 쪽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정말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 면케 하옵소서.’ 그러나 점점 기도하시면 기도하실수록 점점 열심히 기도하면 기도하실수록 ‘아버지여,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하나님과 점점 뜻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내 마음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면, 기도하면서 우리가 점점 성화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어떤 결과가 있어져서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이에 우리는 성화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도라는 것은 결국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대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마음에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쉬지 않고 주님을 닮아가고 쉬지 않고 주님께 가까이 가고 쉬지 않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사랑과 우정도 시간이 지나면 익어져 가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식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성숙해저가고 깊어져야 합니다. 이제는 잊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늘 의식하고 그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라’ 여호와께 구하라는 뜻입니다. 낙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대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대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세상에 다른 길이 있어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세상에 다른 길 있어 그 길 먼저 찾으면 하나님이 그 길을 막으셔서 하나님부터 찾게 하십니다.

맞는지 틀리는지 보십시오. 우리가 간절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집니다. 더 욕심이 나면 다른 사람보다 내가 가장 그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 앞에 정말 큰 은혜요, 큰 능력이요, 큰 역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쁘게 해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기쁘게 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악 가운데 달려가면 우리가 가지 못하도록 그 길을 막으시고 세상의 것들로 기뻐하게 되면 우리 하나님이 그 길을 막으셔서 하나님으로 기뻐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은 다 공허해집니다.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합시다. 우리의 관계 속에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합시다. 이런 것 같아요. 집이 아주 잘 지어졌어요. 좋은 집이에요. 그런데 그 집엔 가구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죠? 말을 하면 ‘웅웅웅’ 울려서 이것이 메아리 되어서 울리게 될 것입니다. 혹시 그 집에 가구도 가득 있다고 합시다. 사람 사는 기색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왠지 모르게 차가운 냉기가 흐르는 것 같아요. 이것이 사랑을 잃어버린 상태와 같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잃어버리면 공허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가정도 공허해집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인간의 관계도 공허해지고, 사랑을 잃어버린 그룹의 모습도 공허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어떤 가시적인 일을 하고 업적을 쌓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이 표현되어지고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 속에 서로 교류되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대한 관계 표현과 우리의 갈급함이 하나님께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까? 기뻐도 슬퍼도 우리는 상황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어도 보다 온전한 하나님의 작품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과 지시와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조심해서 하는 것과 대강하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작품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삶이 주어졌을 때 정말 캔버스 하나 있는데 우리는 그림을 그려서 하나님께 우리의 작품을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진정한 작품은 어떤 것을 드리는가 좀 더 생각해 봅시다. 우리 앞에 이만한 돌멩이가 있어요. 그것을 우리가 잘 이렇게 정진을 해서 하나님께 작품을 드린다고 합시다. 그런데 진정한 작품은 우리가 만든 그 조각품이 아니라 조각품을 만드는 사이에 만들어지는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께 드리는 작품입니다. 진정한 작품은 내 앞에 있는 어떤 물체가 아니라 내 앞에 있는 어떤 작품이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사이에 만들어진 내가 하나님께 드려질 작품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기도하면서 깎여져 나가고 기도하며 만들어져 나가고 기도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모습으로 있어져야 합니다.

마지막 ‘범사에 감사하라’ 세 번째 말씀합니다.

기쁘고 기대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백성의 축복과 은혜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저는 감사라는 것은 인식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감사라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깨달음입니다. ‘아! 정말 이것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여기 많은 이러저러한 일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감사할 일, 기쁠 일, 좋을 일, 정말 감사할 일 많이 써져 있어요. 그런데 전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무슨 글씨가 써있는지 읽을 수가 없고 깨달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어요. 그래서 기쁘고 감사할 일인데 그냥 지나쳐가는 것입니다. 스쳐가는 거예요. 기쁜 일 아무것도 없어. 내 마음을 기쁘게 할 일 아무것도 없고 감사할 일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의 언어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아! 이것이 기쁜 일이구나. 이것이 감사할 일이구나. 내 옆에 이렇게 기쁘고 감사할 일이 지천으로 깔려있구나.’ 그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꺼내보며 ‘아! 맞아 이건 감사할 일이야, 기쁠 일이야. 감사할 일이야, 감사할 일이 이렇게 많네, 전에는 왜 몰랐을까?’ 우리가 믿음 없이 살 때에는 감사할 일이 우리 주변에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우리는 그것이 감사할 일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영안을 열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우리 주변에 널려있음을 깨달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전에는 감사할 일도 없고 기쁠 일도 없고, 삶이 지루했습니다. 왜 이렇게 내 삶이 지루할까?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삶이 지루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이 기쁜 일, 감사할 일, 즐거운 일 누리기에도 우리의 삶의 시간이 짧다는 것입니다.
역대상 16장 34절을 보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감사할 일을 주셨으니까요.

범사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감사할 일은 제한된 어떤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모든 세상 전체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의 근본 색깔이 감사라는 것입니다. 정수기는 탁한 물을 맑게 정화시켜서 우리들이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공기청정기라는 것은 탁한 공기를 깨끗하게 해서 숨쉬기 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통과하면 뭔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하나님의 지체를 통과하면 우리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조를 통과하면 모든 것이 기쁘고 모든 것이 감사할 일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재료든 누구의 손에만 들어가면 맛있는 음식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을 뭐라고 부르죠? 훌륭한 요리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무슨 일이든지 그 성도를 거치기만 하면 기쁘고 감사한 일이 돼요. 다른 사람은 그것 때문에 눈물 흘리고 다른 사람은 괴로워하고 가슴아파하지만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것을 마음속에 접수하는 순간 그것이 감사한 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목사에게는 모든 사물이 설교의 재료가 되며, 과학자에게는 과학적 원리발견과 응용의 재료가 됩니다. 예술가에게는 예술의 도구와 아이디어 그리고 작품거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우리 삶의 한 순간이나 모든 사항이 다 감사할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그리고 찬송, 기도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의 시간도 우리가 모두 드리는 예배의 시간 전체가 하나님께 감사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난 찬송을 잘 못 불러.’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이 부르는 찬송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찬송의 분위기 속에 있는 것이 가슴의 벅참이 있지 않습니까? ‘나 기도 잘 못해’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이 기도하는 것 듣고 동참할 수 있고 그냥 기도하는 시간 자체가 내 마음속에 평안이지 않습니까? ‘아, 나는 물질이 없어서 헌금을 못 드려.’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기회가 되고 은혜가 되면 또 하나님께 드릴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아직 설교를 깨닫지 못해. 무슨 소리인지 잘 못 알아듣겠어. 아직까지 나와 언어적인 느낌이 나에게 와 닿지 않아’라고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언젠가는 들려지게 되겠죠. 내가 예배드리는데 마음에 감동이 없었어, 괜찮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감동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우리는 이미 감사할 일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하라.’ 감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인정입니다. 감사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내 마음의 인정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는 우리의 마음의 표현이며 실재로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감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그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입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됩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기쁨이 일치되듯이 내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일치되니 나는 내 마음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에게는 슬퍼보여도 나는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결국 깨달음입니다. 감사하는 것은 나에게 어떤 상황이 새롭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입니다. 전에 글씨 몰랐을 때 우리 길거리에 쓰여진 간판보고 무슨 뜻인지 몰랐잖아요. 음식점, 아니면 문방구, 아니면 목욕탕, 이발소, 늘 이런 말씀드리지만 그것이 무엇을 하는지 몰라요. 글씨를 배운다는 것은 그 글씨와 더불어 포함되고 있는 개념을 배우는 것입니다. ‘아, 식당은 밥 먹는 데야, 이발소는 머리 깎는 데고, 목욕탕은 목욕하는 데고, 문방구는 노트를 사는 데야.’ 우리는 글자와 더불어 글자가 포함하고 있는 개념을 숙지하면 그 다음부터 알게 되지 않습니까? 전에는 몰랐어요. 아무리 봐도 몰라요. 기쁨이 있는지, 감사가 있는지, 그냥 스쳐지나 가는데 이제는 주변이 다 기쁨과 감사입니다. 이렇게 감사한 일이 많네. 기쁜 일이 많네. 마음속에서 연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기뻐요, 너무 좋아요.

왜 예수 믿고 은혜 받으면 왜 이렇게 얘기하는 줄 아십니까? 안 보이는 것들이 보여지게 되고 깨닫지 못했던 언어들을 해석하니 그 언어로 쓰여진 내용을 우리는 파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여쭤볼게요. 감사하십니까? 기뻐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와 기쁨이 우리 마음속에 기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살아가면서 마음에 요구되는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필요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면서 느끼는 것이 있잖아요. 우리의 마음도 점차 조금씩 익어져 가는구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 마음에 많은 필요의 것들이 내게 있어서 불만의 요구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의미로 받아들여 질 때가 있습니다. ‘아, 내게 이것이 필요해. 나는 이것이 있어야 돼.’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 ‘아하, 그것이 없어도 또 있어도 나는 감사해.’ 하는 마음의 깨달음이 우리들에게 들어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조금씩 점점 더 성숙해져가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제는 감사가 많아지는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하나 감사치 않은 것이 없습니다. 눈을 떠도 감사하고 감고 있어서 감사하고 앉아도 감사하고 일어나도 감사하고 생각을 해도 감사하고 잠을 자도 감사하고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오늘 이 말씀 마음에 잘 새기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생기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첫째 삶의 힘이 생겨요. 기쁨은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기뻐지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줄 수 있어요. 제가 늘 말씀드리죠. 자신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늘 목사가 행복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목사가 행복하지 않으면 강단에 올라와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 인생은 괴로운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일주일마다 와서 한두 번도 아니고 날마다 들으면 여러분은 '아, 인생은 괴로운 거야.’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기뻐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되면 어떻게 되죠? 기대가 생겨요. 슬픔과 아픔을 참고 이기게 되고 새로운 은혜를 바라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감사하게 되니 어떤 일에 이르죠? 하나님께만 감사할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니 마음에 평안이 생깁니다. 감사가 주는 가장 큰 두 개의 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 마음에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람에게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큰 두 가지 선물이 있습니다. 바로 용서함과 겸손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고 내 마음이 다른 사람들에게조차 감사하면 그때부터 우리에게 생기는 것이 용서함이에요. 정말 감사하다. 내가 부족했고, 내가 잘못했고, 내가 연약했고 내가 여러 가지 그릇됨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은혜를 입었는데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이 그 무엇이냐, 잠시 잠깐 마음에 이러저런 생각이 들 수는 있지만 곧 시간이 지나서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감사를 느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전유물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한 사람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받았고,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 용서할 수 없습니다. 늘 판단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늘 판단만하고 탓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바로 겸손함입니다. 내가 감사하니 내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부족함에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나에게 은혜를 입혀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 볼 때 어떤 사람이 좋아 보이고 마음이 흐뭇해집니까? 겸손한 사람 보면 우리는 괜히 향기로운 꽃을 보는 것 같죠? 아름다운 수목을 보는 것 같아요. 마음이 신선해집니다.

내가 겸손해질 때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내 마음에 용서해주고 겸손해질 수 있으면 큰 웅덩이를 파는 것 같아요. 하나님의 은혜를 거기로 다 쓸려 와요. 늘 말씀드리죠.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요.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곳으로 흐르게 됩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께 한번 제가 여쭤 볼게요. 제가 한번 여쭙니다. 첫째 여러분 지금 기쁘십니까? 여러분 기도하십니까? 감사합니까? 이 세 가지가 마음속에 확신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그렇지 못하면 빨리 치료받고 또 하나님 앞에 은혜를 더욱더 체험해서 충만한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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