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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름 값을 하는 사람 (행 7:5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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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씩씩거리며 집에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아빠! 내 이름 당장 바꿔 줘!”하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입니다. 얘가 왜 이러나 싶어 잘 달래면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동네 아이들이 자기 이름(홍보석)을 갖고 자꾸 놀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아니, 네 이름이 어때서 ... 아빠가 성경 읽고 기도하면서 제일 좋은 이름으로 지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랬더니 “좋기는 뭐가 좋아? 중국집 이름이라고 놀리는데 ... ” 그래서 “네 이름은 하늘나라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 중에 여섯 번째 보석인 ‘홍보석’이란 말이야.(계21:20) 네가 그렇게 존귀한 사람이 되라고 지어준 건데 ... ” 이러면서 달래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나중에 수그러들자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해 줬습니다. “야, 딴 생각하지 말고 그 좋은 이름값이나 해라!”

우리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범은 가죽을 남긴다.” 그렇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와 인격,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생애 전체를 반영합니다. 예를 들어 “아무개!” 하면 그 사람에 대한 그림(Image)이 그려집니다. 그런 점에서 이름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름을 지을 때 좋은 이름으로 지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 작명소에 가서 돈을 많이 주고 이름을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게 있습니다. 좋은 이름을 짓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설사 이름이 좋지 않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살면 그 이름이 저절로 좋은 이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모세!” 하면 어떤 이미지가 연상됩니까? 출애굽의 영웅, 그리고 구약 시대 대표적인 인물, 하나님이 아끼고 사랑하는 종, ... 정말 훌륭한 신앙인의 모델입니다. 그래서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선교사님은 아드님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이름이 본래 무슨 뜻입니까? ‘물에서 건져낸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 부모가 당시 애굽의 압제 하에서 어린 모세를 숨기다가 도저히 숨길 수 없어서 갈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띄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바로 왕의 공주가 발견했고, 양자로 삼습니다. 무슨 이름으로 지을까 생각하다 물에서 건졌으니 ‘모세’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 유래를 알면 이름치고는 평범하다 못해 유치한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위대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영광스런 이름, 아름다운 이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렇게 정리하십시오. 여러분이 좋은 이름을 갖고 계십니까? 그 이름에 합당하게, 부끄럽지 않게 사십시오. 혹시 평범하거나 별로 좋지 않은 이름을 갖고 계십니까? 괜찮습니다. 인생을 열심히 아름답게 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이름이 나중에는 빛나는 이름이 될 줄로 믿습니다.

본문에 보니까 좋은 이름도 가지고 있고, 훌륭한 인생도 살았던 사람이 나옵니다. 여러분, 누굽니까? 예, 스데반입니다. 그래서 그를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 이름값을 한 사람! 이 시간 스데반의 생애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도 그런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름값을 하는 사람, 그리고 이름을 빛내는 사람!

[1] 스데반의 이름 : 면류관

스데반이란 이름은 헬라어로 ‘스테파노스’(Στεφανος)입니다. 이 단어는 ‘면류관’이란 뜻입니다. 면류관은 본래 왕관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심판 때에 승리한 성도들에게 씌워주시는 관(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헬라식 이름이데, 그것으로 봐서 그는 아마 헬라파 유대인이었을 겁니다. 주후 1세기의 초대교회 당시에는 성도들의 분포가 대개 두 부류,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본토 에스라엘에 계속 거주해오던 유대인입니다. 반면 헬라파 유대인은 외국에 나가 거주하다 돌아온, 쉽게 말하면 외국물을 먹은 유대인입니다. 헬라파 유대인 중에는 식자층이나 엘리트가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스데반은 아마 그런 류의 사람이었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도 그렇지만,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 대한 기대와 소원을 담아 이름을 짓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이런 생각으로 그의 부모가 이름을 지어주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얘야, 앞으로 신앙생활 잘 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해서 하늘나라에 갈 때 면류관을 받는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이렇게 생각해볼 때 스데반은 정말 좋은 이름입니다. 부모의 신앙과 소원이 담겨져 있는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좋다고 스데반의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닙니다. 만일 스데반이 인생을 엉터리로 살았다면 그 이름은 우스꽝스런 이름이 되고 말았을 겁니다. 사람들이 조롱했을지도 모르죠. “뭐, 스데반? 웃긴다, 웃겨! 면류관은 커녕, 개털 모자도 못 쓰겠다!” 아마 이랬을 겁니다. 다행히 스데반은 그 이름이 어울리는, 아니 그 이름대로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2] 스데반의 인생 : 면류관을 얻은 생애

스데반은 정말 그 이름 그대로 ‘면류관을 받은 인생’이었습니다. 본문 7:54절~60절 보면 그의 최후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교자의 모습입니다. 그는 기독교회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혹자는 순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무섭고 비참하고 고통스런 것으로 오해합니다. 물론 겉 보기에는 그렇죠. 하지만 순교는 신앙인으로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또 순교의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셔서 그 고통을 충분히 이기게 해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순교자를 통해 큰일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회는 순교자의 교회이다!” 교회의 융성은 순교자들의 피로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2천년 기독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기독교회는 순교의 피로 세워져왔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사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짧은 기간에 그만한 부흥을 이룬 교회는 유례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가능했을까요? 초기 선교사들이 흘린 순교의 피, 초대 성도들이 흘린 순교의 피 때문입니다.

수년전 우리 교회에 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세미나 후 질문 시간에 한 여자 교수님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왜 한국교회는 선교 역사가 그렇게 짧은데(태국은 거의 두 배 되는 선교 역사를 갖고 있음) 태국교회에 비해 엄청난 성장을 가져왔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순교의 피가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공감을 하셨습니다. 태국교회에는 순교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영광스런 것입니다. 우리가 일부러 순교할 수는 없지만, 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넉넉히 감당할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사람이 한번 왔다가 어차피 한번 죽는 법인데, 천국이 있고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 게 확실하다면 순교보다 더 아름답고 멋진 죽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스데반은 그렇게 영광스런 모습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입니다.

그가 임종할 때 어떤 영광스런 장면이 펼쳐지나 살펴보십시오. 54절~56절. 공회의원들이 스데반의 설교(십자가와 부활 증거)를 듣고 발악을 하지만, 그는 영안이 열려 하늘의 영광을 봅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예수님)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알고 있나요? 사도신경 고백할 때 뭐라고 합니까? “ ...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 ”
그러면 어떻게 짐작해 볼 수 있을까요? 앉아계시던 예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종 스데반이 순교하며 천국에 입성하는 그 순간 앉아 계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쁨으로 영접하는
장면입니다. 어쩌면 그의 손에는 스데반에게 씌어줄 면류관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한 인생이 왔다가 천국에 들어갈 때 이런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마라토너가 마지막 결승점의 테이프를 끊고 감독과 코치의 품에 안기는 장면이 얼마나 멋집니까? 마치 그런 식입니다. 스데반은 그런 감격적인 장면을 연출하며 인생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목표를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해야 됩니다. 언젠가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이런 감격적인 장면을 맞이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하늘의 상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상(賞) 때문에 신앙 생활 하나? 그런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누누이 상을 바라보며 살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예수님이 재림 하는 목적도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불신자들은 정죄의 심판을 받고 지옥의 형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상급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실이 언급된 구절을 읽어드리죠.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마16:27 “인자(=예수님)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심지어 우리의 믿음이 이래야 온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살아게신 하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온전한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목표를 갖고 살았습니다. 빌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은 하날의 상을 위해 열심히 살앗습니다. 그러다가 영광스런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그의 최후 진술을 들어보십시오. 딤후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저와 여러분도 이런 목표를 갖고 열심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스데반의 신앙과 삶 : 성화된 인격, 사랑의 실천, 복음 증거

그러면 하나님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우리에게 상을 주실까요? 성경을 연구해 보면 다음의 세 가지 기준으로 인생을 평가합니다. 스데반은 그 기준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① 성화된 인격 : 하나님은 고난과 환란이 많은 세상에서 인내하며 성화된 성도들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이후에는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아직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시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겁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되어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천국에 들어오기를 기대하십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가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 얼마나 아름다운 인격의 모습으로 가고 있는가! 그가 공회에서 설교할 때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행6:15) 그리고 유대인들이 흥분해서 그를 개처럼 질질 끌고 성밖으로 나가 돌로 쳤지만, 그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행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천사를 넘어 예수님과 흡사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남긴 가상칠언 중 기도문이 있죠. 그와 비슷한 기도를 드리며 운명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스데반에게 면류관이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② 사랑의 실천 :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받은 대로 실천하기를 소원하십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주고 받는 조건적 사랑만 가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건을 초월해서 사랑을 주십니다. 죄인들에게 독생자를 주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고 이웃에게 실천해야 됩니다. 그게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일일이 기억하셨다가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냉수 한 그릇이라도 진정한 사랑으로 한 것이라면 분명히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상을 주십니다.

스데반은 이런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친 사람입니다.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그는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자신을 불살라드린 사람입니다. 이런 스데반에게 하나님이 면류관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③ 복음 증거 :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 감당할 사명은 복음 증거입니다. 나를 구원한 십자가 복음이라면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도 전파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무이자 우리의 특권입니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고 하늘의 상을 주십니다.

바울은 그가 복음을 증거하고 양육한 성도들을 ‘자랑의 면류관’이라 부릅니다. 살전2:19~20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여러분, 주님 앞에 설 때 내새울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모든 것은 명함도 못 내밉니다. 오직 우리의 증거로 천국에 간 성도들이 나를 위해 면류관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어린 딸과 부모님, 이렇게 세 식구가 살던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딸은 비록 어리지만 신앙 생활을 아주 잘 합니다. 어머니는 보통으로 신앙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주변에서 아무리 전도해도 믿지 않고 버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 아이가 열이 펄펄나며 쇠약해져갑니다. 검사 결과 급성 백혈병이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 아이는 얼굴이 핼쓱해지고 눈이 쾡하게 들어갔습니다. 치유될 사망이 없어 보입니다. 아버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딸 아이의 병상을 지킵니다. 딸 아이가 조용히 아버지를 부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저도 조금 후에 죽을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이죠.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어요. 주일학교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천국에 가면 주님이 면류관을 주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해서 면류관에 별이 달리지 않을 것 같아요. 아빠가 제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으시면 안 돼요? 그러면 제 면류관에도 별이 달릴 텐데 ... ”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즉시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딸 아이는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결국 천국에 갔습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주일 예배에 그 부모가 참예했습니다. 그 교회는 예배 중에 간증 순서가 있었는데, 누구든 손을 들고 나가서 간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앞으로 나가 간증합니다. “여러분, 제 딸은 천국에 갔습니다. 그리고 면류관을 쓰고 있을 겁니다. 그 면류관에는 분명히 별에 달려 있을 겁니다. 그 별이 바로 접니다.”

스데반은 살아 생전에도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순교한 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먼저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58절 보면,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사울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행8:1에서 보는 대로 살기등등하고,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후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사도행전 9장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 예수님을 보고 뒤집어집니다. 그런데 미리 스데반을 통해 충격을 받은 상태여서 그게 가능했습니다. 사울은 겉으로 거부했지만, 그의 영혼 깊은 곳에는 스데반의 기도 소리가 비수처럼 꽂혔을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천국에 대해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원수들은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있던 사울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면서 완전히 변화 받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스데반의 순교가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킨 셈입니다. 그래서 고대 신학자인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회는 스데반의 기도 덕분에 사도 바울을 얻었다!”

더 나아가 복음이 넓게 넓게 확산되어 감을 볼 수 있습니다. 행8:1(하) 보면, 큰 핍박으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흩어집니다. 행8:4 보면, 그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11장에 보면, 안디옥까지 복음이 들어가 교회가 생기고, 13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최초의 선교사 바울과 바나바가 파송됩니다. 그후 바울의 선교팀을 통해 소아시아, 유럽, 로마로 복음이 전파됩니다.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이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많은 사람을 도전하고,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런 스데반이 어찌 하나님이 면류관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4] 스데반처럼 사는 비결 : 성령 충만

여러분, 우리도 스데반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게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본문 55절 보면 그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 ” 우리가 기도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이런 삶이 가능해집니다.

가만히 생각 보면 우리도 좋은 이름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행11:26),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성도, 거룩한 사람 즉 성자(Saint)라는 칭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종, ... 여러 가지 이름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외에 직분도 있습니다. 장로, 권사, 집사, 교사 등 ... 우리는 과연 이 모든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계3:11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세상을 따라가다 보면 다 놓치고 맙니다. 세상 것은 본래 놓치는 것이고 우리를 위해 예비된 면류관마저 놓치게 됩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야기입니다.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간직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 말년에 자신의 생애를 회고해 보니 자기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삶이 아니라, 황금을 마음에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눈물로 회개하고 부모가 지어준 이름에 걸맞게 살겠다고 결단합니다. 그후 그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침내 그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난 14년 동안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그 기간이 내 인생 중 가장 행복하고 보람있는 시기였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다 사라집니다. 사라지는 것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일입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십시오. 스데반처럼 천국을 소망하며 하늘의 면류관을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이름을 빛내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스데반처럼 주님의 영접을 받으며 천국에 입성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우리의 이름 때문에 후배들이 도전받고 격려받아 뒤따라올 수 있는 모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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