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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해산하는 수고 (갈 4: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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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지금 놀았으면 놀았지 수고가 많은 일은 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수고가 많은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중소기업들은 우리보다 경제생활이 못한 외국인 근로자를 산업연수생이란 이름으로 수입해다가 그 자리를 보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병리적인 현상은 산업현장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신세대들은 결혼하고서도 해산하는 수고가 싫고, 자녀 기르는 수고가 싫다고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경우가 20%에 육박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수고 기피 현상이 성도의 신앙생활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수고스러운 일은 서로 맡아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편하게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교획가 어떤 교회냐 좋은 목회자가 어떤 목회자냐 하면 수고할 것이 전혀 없는 교회, 그리고 성도를 수고롭게 하지 않는 그런 목회자가 좋다는 것입니다. 안일무사가 최고의 가치처럼 여기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 힘들게 살다가 교회를 찾아왔는데 교회마져 이것 저것 머리 아프게 하고 수고롭게만 하는 것엔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세상적인 수고를 해야 사람노릇 하는 것처럼 교회에서는 교회적으로 영적인 수고를 해야 교인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해산하는 수고 없이는 기쁨도 없고 보상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은 서로 서로 수고스러운 일을 먼저 하시려고 다투시기를 바랍니다. 크게 싸움만 되지 않도록 그리고 지쳐 쓰려지지 않을 정도로 해산의 수고를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수고스럽게 땀흘려 일해주시는 모든 성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크신 위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해산하는 여인을 보면 옆에서 보고 듣기가 민망할 만큼 고통스러워합니다. 어떤 경우는 사경을 헤메이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고통이 있는 순간에는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작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곧 그 고통을 잊게 됩니다. 왜냐하면 해산의 고통이 크지만 자기를 빼닮은 자식을 품에 안은 여인의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수고는 해볼만한 수고 입니다. 영적인 산고 역시 해볼만한 해산의 수고입니다. 신앙을 위해서 수고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수고 없이 응답받는 즐거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상고하는 수고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즐거움도 없습니다.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직고하는 공통이 없이는 용서 받는 감격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수고 없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즐거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카네기 공대라고 하면 명문중의 명문입니다. 그렇다면 카네기 출신에게는 100% 성공이 보장된 것일까요? 답은 '아니올시다'였습니다. 물론 후광효과는 얻겠지만 학교가 출세까지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어느 집단에게도 그러하듯 그들 중에도 성공한 사람도 있는가 하면 실패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카네기 출신 중 성공인들을 대상으로 한 '성공비결'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전문 지식이나 기술은 성공하는 데 15% 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나머지 85%는 좋은 사람들에게서 얻는 힘에 있었다."
  뜻밖의 보고에 상당히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대목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특히 그들은 '세 가지 방문'을 잘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입의 방문', '손의 방문' 그리고 '발의 방문'입니다.
  '입의 방문'은 칭찬을 해서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용기를 주는 것이며 '손의 방문'은 편지를 써서 진솔한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의 방문'은 상대가 병들었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찾아가는 것입니다.
  성공의 비결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입품'과 '손품' 그리고 '발품'을 열심히 파십시오. 그러다 보면 내가 '명품'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갈라디아 교인을 위한 수고를 해산의 고통을 겪는 여인의 수고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미 갈라디아교인들을 위하여 영적인 산고를 겪은바 있습니다. 갈라디아교인들은 바울로 인하여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그런데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를 떠난 후에 유대인들이 와서 유혹하는 바람에 그만 믿음에서 흔들이게 되었습니다. 바울 당시는 목회자 정착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순회전도목회를 했기 때문에 교회를 세워놓고 다른 곳으로 또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태어나게 한 그 교회가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하는 데 있어서 수고 했던 것과 같이 이제는 다시 갈라디아교인들의 신앙성장을 위해서 영적산고를 자청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해산하는 수고는 처음 출생을 위한 수고가 아니라 이미 출생했던 생명을 품에 품고 성장시키기 위한 고통의 수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육을 위한 수고이며, 성장을 위한 수고이며, 성화를 위한 수고인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신앙 성숙을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성도의 즐거움은 수고하는 중에 오는 즐거움이요 또한 그 수고가 지나간 후에 오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어 구원받고 새사람이 되는 것은 단회적이고 일회적인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성화를 이루는 과정은 많은 시간과 노력과 자기 자신에 의한 고통의 수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실재적으로 여러해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여전히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로 남아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왜그렇습니까? 그것은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수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지 얼마 되지 않는 초보의 신앙인이 십수년 동안 신앙생활 해온 사람보다 더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한 여류작가가 자신의 저서에 써 놓은 무디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런 귀절이 있습니다.
  "무디 선생은 크리스챤이 되자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성경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그 말씀에 빨리 순종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무디 선생의 생활이 일부 믿는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적 성장은 여러해 동안 구원을 받았다고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주안에서 성장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주 교회에서 주님 안에서의 새로운 체험들을 교인들과 이야기 했습니다. 결국 오래 믿었다는 사람들이 무디 선생의 모범된 생활에 자신들의 체면이 손상 되는 것을 느끼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의 삼촌을 찾아가 조카를 잠잠케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의 영적인 풍성함과 끊임 없는 열정이 오래 믿었다는 사람들의 어린애처럼 엄지 손가락을 빨고 있을 때 무디 선생은 이미 그런 시절을 넘겼고 그들이 좌우로 기웃거릴 때 무디 선생은 그들이 다가올 수 없을 정도로 계속 성장했습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여류작가가 지적하는 것처럼 어미 손가락만 빨고 어린양 하며, 좌우로 기웃거리고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과 신앙 성장을 위해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합니다.
  죽어가는 영혼,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전도하여 믿음의 자녀를 낳는 행위는 영적인 해산의 수고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해산하는 수고 없이 되려니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 즉 산통을 느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죽어가는 영혼 즉 믿지 않는 영혼을 보면 산통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 중에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들을 위해서 산통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병든식구들, 어려움당한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산통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산통을 느끼며 기도하는 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본질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신앙 성장을 위하나 다른 이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 해산의 수고를 하는데 있어서 그 신앙 성장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입니다. 사람이 목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마음, 그 인격, 그 영혼, 그 삶속에 이루어지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계속해서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조금 했다고 멈추면 안됩니다. 주님을 날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우리도 주님처럼 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모든 일을 수고 없이 해치우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사람들도 차츰 수고 없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도 덜하고 감격도 그렇게 크질 못합니다.

      심프슨 목사에 대한 일화 :
        어느날 아침 심프슨 목사님 댁에 머물러 있던 한 손님이 서재쪽으로 갔다가 거기에서 그를 깊이 감동시킨 한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심프슨 목사님이 세계지도가 그려진 지구본을 양팔로 껴안은 채 책상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그의 양볼은 흘러내리는 눈물로 젖어 있었습니다.그는 죄악속에서 방황하는 세상사람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도 죄악 많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 고통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그리고 종국에는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의 산고를 통하여 인류를 다시 낳으셨습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그리고 나아가 전도한 형제를 위하여 다시 한번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맙시다. 이 고통 이 수고야 말로 성도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이요, 최고의 사랑이요,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송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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