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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리를 불어도 (마 11: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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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를 단절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 단절은 언어와 가치관에서 뚜렷이 나타납니다. 어른의 말과 어른의 가치관은 젊은이에게 전해지지거나 이해되지 않습니다. 또한 젊은이들의 말이나 가치관이 어른들에게 전달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남성의 말이나 가치관이 여성에게, 여성의 말이나 가치관이 남성에게, 그리고 친구와 친구 사이에도 말이나 가치관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여 말은 많은데 대화는 없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당시의 시대 사람들, 특별히 매사에 비판적이고 비관적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놀이를 하는데 몇몇 아이들은 어떤 놀이를 해도 불만이 있어 보였습니다. 결혼식 놀이를 하자고 하고서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그러면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해서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모습이 바로 이 세대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피리를 불 때 춤추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피리와 춤은 기쁨을 표하는 방법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곡하는 것과 그 애곡에 맞추어 가슴을 치는 것은 슬픔을 표하는 대표적인 방법입니다. 맞장구가 필요합니다.
  옛날에 탈곡하는 방법 중에 도리깨로 탈곡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옛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도리깨질 할 때 구경군이 고개만 까닥거려주어도 훨씬 도리깨질이 수월하다고 하시고는 하셨습니다.. 진짜 그럴까 했는데 그 말이 맞습니다.
  마음을 갖이하면 훨씬 일이 쉽습니다. 마음을 갖이 할 사람 몇명이라도 있으면 세상살아가기가 훨씬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 일도 그래서 마음을 갖이 해 주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일하기가 쉽습니다.

  당시에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은 온갖  노력을 다해 피리를 불었으나  끝까지 춤추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애곡을 하여도 그 곡에 맞추어 가슴을 치치지 않는 이가 많았습니다.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하여 슬플 때는 함께 슬퍼하고 기쁜 때는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슬픈 것은 너의 문제지 나의 문제가 아니며 기쁜 것도 너의 문제지 나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식입니다. 무관심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사람과 애곡을 하여도 그 애곡 소리에 맞추어서 가슴을 치지 않는 사람을 깊이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왜 피리를 불 때 춤을 추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까?  왜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첫째로 그것은 나는 너희랑 같이 될 수 없다는 자만심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도 보면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함께 아멘할 수 없는 사람, 나는 함께 회개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취급하지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는 생각, 나는 저 사람들보다 낫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외적인 사람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자만심이 이렇게 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늘 교회생활을  예외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특별한 행동을 하려고 하고 특별한 대접을 받으려고 합니다. 함께하는 일은 자신의 지위와 격을 낮추는 것같은 생각에 하지를 않습니다. 아멘할 때 함께 아멘하면 체면이라도 손상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은 또 무슨 고약한 심보입니까? 이를 악물면 결국 이만 상합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눅 18:9~14)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지나친 개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나친 개인주의는 상대방을 생각하거나 배려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자기 편하면 되고 자기 이익에 합치되면 되고 자기에게 이로우면 되는 것입니다.
  남의 아픔이나 상처나 남의 불편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고 마음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남을 함부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부메랑처럼 언젠가는 자신에게 그 피해가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자신에게 아무렇지 않다고 해서 함부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국의 아이들은 자랄 때부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기의 자유를 누리는 법을 철저하게 배웁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아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든 말든 자신이 좋은 대로 사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교육할 때 철저하게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고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하고 그렇게 길러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자신도 그 패해 당사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은 서로 사는 것입니다. 나만 살자고하면 결국 다 죽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받아들어야지 믿음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 받아들이면 오해를 낳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는 것처럼 세례 요한의 금욕적인 생활에 대해서 "귀신이 들렸다"고 미치광이 취급하고 말았습니다. 세레요한의 생활을 믿음으로 보면 얼마나 고귀합니다. 그렇게 못한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귀신들린 것이라고 평가절하고 억울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런반면에 예수님이 먹고 마시며 죄인들을 가까이 하자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했습니다. 세속주의자로고 비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모두 비난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래도 나쁘고 저래도 나쁘고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업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요한의 금욕적인 생활도 꼭필요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늘 잔치를 베풀고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기는 기쁨의 생활 역시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전통에는 이 두 가지 강물이 함께 합해서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없이 보는 사람은 이래도 나쁘고 저래도 나쁜 것입니다. 매사를 믿음 없이 보는 사람은 아무리 귀한 것을 보고, 은혜되는 것을 보아도 소화를  해내지를 못합니다. 문제는 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피리를 불 때 춤추는 자가 됩시다. 애곡할 때 가슴을 치는 자가 됩시다. 바울도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12:15)고 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요 주님께 부요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피리를 불 때 춤추도록 지으셨으며 애곡할 때 가슴을 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피리를 불면 춤을 칠 때 건강하고 애곡을 할 때 가슴을 쳐야 건강합니다. 이것이 신채리듬이요 가정리듬이요 영적리듬이기 때문입니다.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수류탄 던지기 등과 같은 멀리던지기를 할 때 잘
던지려면 리듬을 타야 합니다. 뻣뻣이 서서는 절대로 멀리 던지지 못합니다. 몸을 쥐어짜서 그 리듬에 맞추어야 멀리던지기를 잘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피리를 불 때 춤 추고, 애곡할 때 가슴을 치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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