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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온을 위해 흘리는 눈물 (애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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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눈물

흔히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는 말을 합니다. 그 세 번은 첫 번째 ‘태어났을 때,’ 두 번째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세 번째 ‘나라가 망했을 때’라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 남자 분들 여자들 앞이라고 부끄러워 말고 한번 솔직히 말해봅시다. 정말 남자가 태어나서 세 번 웁니까? 아니지요. 저도 세 번은커녕 삼십 번도 더 울었습니다. 아니, 삼백 번일 수도 있지요.

그러면 왜 이런 말이 생긴 것일까요? 그것은 남자들이 괜히 만들어낸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남자는 씩씩하고 굳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남자가 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남자는 여자와 달리 웬만해서는 안 운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런 말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자녀를 키우면서 딸이 울면 그런가보다 하지만 아들이 울면 “남자가 계집애처럼 웬 눈물이냐?”고 다그치지 않습니까?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봅시다. 왜 여자는 울어도 되는데 남자는 울면 안 됩니까? 슬플 때나 감격했을 때 남자 여자가 무슨 상관입니까? 아니, 어쩌면 애써 슬픔을 감추고 용감한 척, 씩씩한 척 하지 말고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더 남자답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한 남자의 눈물이 나옵니다. 이 남자는 처음에 남자가 세 번 운다고 할 때 세 번째 이유인 ‘나라가 망해서’ 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남자가 일생에 딱 세 번 운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남자는 시도 때도 없이(?) 하도 많이 울어서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까지 붙은 사람입니다.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지요. 예레미야라는 선지자를 성경에서 살펴보면 바벨론의 침략 앞에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겪던 남왕국 유다를 향해 하나님의 강력한 심판을 외친 강인한 선지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수차례에 걸친 핍박과 투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외친 놀라운 인내심을 가진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강인한 예레미야를 사람들은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습니다.

다같이 예레미야 9장 1절을 찾기 바랍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이 말씀처럼 예레미야는 한편으로는 강인하고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던 반면 또 한편으로는 천성적으로 동정심이 많고 온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는 다 양면적인 성격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두 가지 성격 중에 어느 쪽이 더 강하느냐 일뿐 누구나 두 가지 이상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특히 감성적이고 동정심이 많았고 이로 인해서 눈물을 많이 흘린 남자였다는 것이지요. 예레미야는 어떻게 하면 자기 머리가 물이 되고 자기 눈이 눈물 근원(샘물이 솟아나는 구멍처럼)이 되겠느냐고 호소합니다. 정말 마음껏 눈물을 흘리고 싶은데 너무 우니까 눈물이 메말라 버렸나봅니다. 이번에 연천의 군부대(제가 군목으로 근무한 곳) 사건도 정말 너무도 충격적이고 어이없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부모는 눈물을 흘리다, 흘리다 그 눈물마저 메말라버리는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레미야는 눈물이 메마르지 않고 주야로 마음껏 울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눈물 흘리기 원한 까닭은 이방인들에게 살육 당한 딸 내 백성인 유다를 위해 주야로, 밤낮으로 곡읍하기 위해, 마음껏 눈물 흘리기 위해서입니다. 쉽게 말하면 어떻게 하면 내가 내 백성을 위해 마음껏 울 수 있겠냐고 물은 것입니다.

에카!

이 말처럼 예레미야는 조국 유다와 예루살렘 성의 멸망 이후 예레미야애가를 짓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예레미야서 바로 다음에 붙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며 지은 노래입니다. 예레미야애가란 무슨 뜻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애가란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은 애가(哀歌), 즉 슬플 애(哀), 노래 가(歌) 자를 써서 ‘슬픈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자성경 중에는 그렇게 나온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애가’라는 말은 본디 한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에카,’ 즉 히브리말로 ‘아!’ ‘어찌하여’라는 뜻을 가진 낱말에서 온 것입니다. ‘에카’는 비통이나 놀람, 혹은 애도를 뜻할 때 흔히 쓰던 말인데 우리말로 치면 ‘아!,’ ‘저런,’ ‘어쩌다가’라는 뜻이겠지요. 저도 장례식 때 너무도 큰 슬픔에 잠긴 유가족을 보면 아무 위로의 말도 못하고 ‘아!’ ‘어쩌다가’ 소리만 하고 올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애통할 때 저절로 나오는 탄식 소리입니다. 그래서 이 예레미야애가는 온통 눈물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시온성, 즉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공격으로 멸망당해 완전히 파괴된 그 폐허 위에서 이 ‘에카’를 지어 부릅니다. 그래서 곳곳에 애통하고 비통하고 슬퍼하고 눈물 흘린다는 낱말들이 나옵니다.

여러분, 이렇게 예레미야는 눈물이 많은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훌쩍거린 심약한 남자는 결코 아닙니다. 그는 본디 가장 강인하고 가장 잘 참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정말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언제 강인했고 또 어떤 때 펑펑 울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강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전할 때면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자신이 핍박을 당하고 감옥에 갇힐 때면 꾹 참고 인내했습니다.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하고 강했습니다. 하지만 조국 유다의 비참한 운명 앞에서는 어김없이 울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 앞에서는 정말 많이도 울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무 때나 무조건 강하고 참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아무 때나 훌쩍거리며 울어서도 안 됩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나 그 사명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는 한없이 강해야 합니다. 끝까지 참아내고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처럼 조국의 비참한 운명 앞에서는 눈물을 감추지 말아야 합니다. 울어야 할 때는 우는 것이 맞습니다. 이 조국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그야말로 그 어떤 보석보다 더 가치 있는 귀한 눈물입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교훈

그러면 단지 이 예레미야애가는 한 남자의 슬픔을 표현한 노래에 불과한가? 단순히 멸망의 아픔만을 되새기는 것뿐인가? 아닙니다.

엊그제 우리는 여름방학에 들어가는 연합구역예배를 드리면서 6.25 금식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도 설교를 통해 말씀드렸지만 이제는 6.25가 비극을 되새기고 분노를 재 폭발 시키는 날이 아닌 것입니다. 과거에는 무조건 ‘처부수자 공산당’을 외치며 북한과 공산주의에 대한 분노를 뼈저리게 새기는 날이었습니다만 이 날이 그저 분노만 되새기는 날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화만 내고 분만 품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민족의 비극이 일어났는가? 이렇게 의미를 되새기고 교훈을 받아야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게 됩니다. 뜻하지 않은 실패를 겪었을 때 어리석은 사람은 화만 내고 분노만 차곡차곡 가슴 속에 쌓아둡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실패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그래서 확실한 교훈을 얻고 다시는 그런 실패를 겪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예레미야애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망했다고 마냥 슬퍼하고 실컷 울어보려고 이 노래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에카를 지은 것은 예루살렘이 왜 멸망당했는가? 그러면 그 멸망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분명히 되새겨보기 위해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이 단순히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유다의 죄악에 분노하셔서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해 유다를 치고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멸망과 심판의 원인을 분명히 깨달아 소망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눈물을 흘리며 애곡하며 ‘에카’를 지은 이유입니다.

예레미야애가는 모두 5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늘 집에 가셔서 한번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우리가 그동안 다른 성경은 몰라도 이 예레미야애가를 읽을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이 5장 가운데 1장은 화려하고 영화로웠던 예루살렘이 황폐해진 데 대한 고통과 슬픔을 노래합니다. 2장에서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긍휼을 구합니다. 3장에서는 동족의 비극을 마치 자기 자신이 당하는 비극인 것처럼 묘사하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합니다. 4장에서는 포위된 예루살렘이 겪은 참혹한 비극을 묘사하면서 이 비극이 바로 유다의 종교지도자, 정치지도자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선언합니다. 5장에 이르러 예레미야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눈물로 예루살렘의 회복을 간구합니다.

한국의 예루살렘

이제 잠시 예레미야애가에 나온 예루살렘 이야기를 접고 우리나라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온 것은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처음 상륙한 때로 봅니다. 그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와 조선을 복음화 하는데 앞장서는데 물론 이 선교사들이 조선의 전국 방방곡곡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지만 현재 남한에 속한 지역보다는 아무래도 북한에 속한 지역에 더 복음이 많이 들어간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평양이라는 도시는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조선에 처음 복음이 전해진 이후 평양 땅에는 산정현 교회, 장대현 교회 등 대표적인 교회들과 수백 개의 교회당이 세워지고 한국기독교의 수많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나아가 장로회신학교도 평양에 세워지고 평양 숭실 등 수많은 기독교학교들이 세워집니다. 이때로부터 평양은 조선 기독교의 대표적인 도시가 됩니다. 심지어 어떤 기록에 의하면 주일날에는 평양의 상점들이 철시하기까지 할 정도로 기독교의 영향력이 대단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제 때부터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까지 합니다. 평양뿐만 아니라 북한의 곳곳에는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오히려 남쪽보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큰 지역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국의 예루살렘과 같던 평양이, 복음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북쪽이 해방 후 어떻게 됩니까? 공산주의가 북한을 지배하면서 교회는 파괴되고 수많은 목회자와 기독교 지도자들이 박해받고 죽음을 당합니다. 그래서 고 한경직 목사님 등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고 특별히 6.25를 통해 출애굽 사건을 방불케 하는 신앙인의 대이동이 북에서 남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날 남한은 5만개를 넘는 교회와 천만 가까이 되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동방의 예루살렘이 됩니다. 하지만 평양을 비롯해 북한지역의 교회는 완전히 황폐화 됩니다. 한국의 예루살렘이 황폐한 성읍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1장 6절에서 처녀 시온, 즉 예루살렘의 영광이 떠나갔다고 말한 것처럼 한국의 예루살렘인 평양과 북한의 영광이 떠나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오늘을 북한선교주일로 정했습니다. 해마다 6월 넷째 주일을 북한선교주일로 지키면서 황폐화된 성읍 평양과 북한 전역을 다시금 복음으로 재건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평양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재건하고 무너진 북한의 제단을 다시 세워 ‘남북한평화선교통일’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이 더 흘려져야?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북한선교주일을 맞아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위해 어떤 자세로, 어떤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 다시 예레미야애가를 보십시오.

제가 조금 전 예레미야애가가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지요? 이 5장의 흐름은 오늘 우리에게 북한선교주일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예레미야는 1장에서  화려하고 영화로웠던 예루살렘이 황폐해진 데 대한 고통과 슬픔을 노래합니다. 눈물로 슬퍼합니다. 오늘 우리가 북한을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북한동포들과 무너진 제단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북한이 원수라고 생각하고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한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던 그곳에서 그 영광이 떠나가고 황폐해진 이 현신을 슬퍼하고 아파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눈물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2장에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긍휼을 구합니다. 오늘 우리도 북한의 교회가 황폐화 된 까닭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공산주의가 지배하고 김일성과 김정일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입니다. 3장에서 예레미야는 동족의 비극을 자기 자신이 겪는 비극으로 묘사합니다. 어쩌면 북한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가 이것이 아닐까요? 북한동포의 고통과 아픔을, 그 비극을 남의 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하고 함께 아파하며 함께 슬퍼하는 ‘공감’의 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TV 화면을 통해 북한의 어린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시장 통을 방황하다가 땅바닥에 떨어진 음식 찌꺼기를 주워 먹고 하수구에 걸린 국수 가락을 집어먹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아, 쟤네들 정말 안됐다, 불쌍하다”가 아닙니다. 그들은 바로 ‘내 자식’이며 나의 아들과 딸들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공감의 자세, 그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이해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4장에서 예레미야는 포위된 예루살렘이 겪은 참혹한 비극을 묘사하면서 이 비극이 바로 유다의 종교지도자, 정치지도자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선언합니다. 오늘 북한의 비극과 황폐함은 잘못된 지도자들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디 지도자들만의 책임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내 탓’입니다. 내 가슴을 치고 쥐어뜯으며 나의 책임을 통감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지막 5장에서 예레미야는 눈물로 예루살렘의 회복을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눈물을 요구하십니다. 북한을 회복하고 무너진 교회를 회복하며 나아가 진정한 평화통일을 통해 이 나라 이 민족이 하나 되고 동족이 만나 하나 되는 그 날이 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예레미야가 흘렸던 그 눈물, 그 눈물의 간절한 기도라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9장 41절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곧 멸망당할 예루살렘의 운명과 그 거민들의 완악함 때문에 흘리신 눈물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 나라의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 합니다. 왜 나라가 이 모양이냐? 정치인들과 모든 지도자들이 다 틀려먹었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안타까운 운명을 내다보며 안타까워 우신 것처럼 우리도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그 장래를 안타까워하며 눈물의 기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북한을 생각하고 북쪽의 동포를 생각하며 기도할 때 눈물을 흘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도시 포항의 영적각성을 위해 기도하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 없다면 우리는 감정이 메마르고 진실한 사랑이 메마른 영혼이 아닐까요? 오늘 조국을 위해 흘린 예레미야의 눈물, 예루살렘을 위해 눈물 흘린 그의 울음소리는 우리에게 진정한 조국사랑이 무엇인지, 진정한 동포사랑이 무엇인지, 나아가 진정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자녀를 위해 한번도 눈물 흘려보지 않은 부모를 참된 부모라 할 수 있을까요? 성도를 위해 한번도 눈물 흘려보지 않은 목회자를 참 목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번도 눈물의 기도를 드려보지 못한 성도를 참된 성도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입으로 북한선교와 평화선교통일을 말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눈물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통일과 북한복음화를 위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성도들의 눈물이 모아져야 할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성도들의 진실한 눈물을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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