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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물질관 (마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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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경제를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에도 그 사람의 인품이 어떠한가 보다는 그 사람의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돈이 인격 노릇을 하는 기막힌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사실은 이러한 풍조가 교회 안으로 침투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도 물질에 흔들리는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적지 않습니다.

물질이 악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왕이면, 기독교인들도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선교사도 파송하고, 구제도 하고,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물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선의 도구도 되고 악의 도구도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만능주의 풍조에 물들지 않고 물질을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 성경에 근거한 물질관을 확립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성경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경적인 물질관을 갖고 살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에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매우 다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소생은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이나 되었습니다. 재산도 상당해서 양이 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급작스런 재앙이 닥쳤습니다. 아들 딸, 열 명이 맏이 집에 모여 잔치를 하는데 집이 무너져 몰사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강도떼가 급습해서 들판에서 가축을 치는 종들을 죽이고 모든 가축을 강탈해 갔습니다.

한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세요. 무슨 말로 욥의 심정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욥은 그 비보를 전해 듣고는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애통한 심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망연자실하지 않고, 경건한 마음으로 땅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라고 말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실직하거나 사업에 실패해서 비관 자살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누적된 카드빚을 갚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경제적인 파탄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으며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내 재산을 다 잃었으니 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잃은 재산이 내 것이 아니고 갚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자살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내 것을 잃었기 때문에 충격이 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들과 욥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유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은 그 많던 재산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가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무이자로 돈을 천만 원 빌려주어서 잘 사용하고 있는데, 어느 날 찾아와서 그 돈을 돌려달라고 해서 돌려주었습니다. 빌린 돈을 돌려주었으니 억울한 생각이 들까요? 돌려주는 것이 아까울까요? 좀 아쉽기는 해도 억울하거나 아깝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욥은 그가 살던 나라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사회적인 명망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 재산을 상실했다는 것은 그 때까지 쌓아올린 그의 모든 명예가 물거품이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원망은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봅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나와 상속재산을 공평하게 나누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청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상속 재산을 분배하는 일로 분쟁이 생기면 랍비를 찾아가서 중재를 부탁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보통 랍비처럼 생각하고 찾아왔나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셨습니다. 상속 분쟁을 해결하려고 했다면 그 사람이 예수님을 잘못 찾아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재산을 더 많이 갖고 적게 갖느냐 하는 문제는 예수님께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의 청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그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물질을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농사를 지었는데 대풍이었습니다. 소출이 너무 많아서 쌓아 둘 곳이 부족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궁리하던 그는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군.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어야겠다.’ 그리고는 자기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날 밤늦게까지 사업 구상에 몰두하다가 잠든 부자는 이튿날 아침, 사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결론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눅 12:).

부자의 말을 살펴보면, 그는 가진 재물을 다 자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심지어 그는 자기가 생명의 주관자라도 되는 양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 부자의 영혼을 불러 가시니 그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가 물질의 주인인 양 착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더구나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이 부자처럼 많은 재물이 자기들의 영혼에 만족을 줄 줄로 착각합니다. 그들은 돈이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줄 알고 돈을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언젠가 이 부자와 같이 돌이킬 수 없는 좌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은 욥과 같이 생명과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물질의 노예가 되면 안 됩니다.

어느 신문에서 이런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부자라는 개념이 잘못돼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부자 = 잘 사는 사람’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부자=돈 많은 사람’일 뿐이며 꼭 잘 사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서울 시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K 목사는 “부자는 단지 돈 많은 사람일 뿐이며 부자가 꼭 잘 산다거나 행복하게 산다고는 할 수 없다”며 ‘부자=잘 사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무조건 돈을 벌어야 사람 취급받고 잘 산다는 그릇된 가치관을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가난한 사람도 못 사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돈이 없는 사람일 뿐”이라며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은 돈이 많고 없음에 따라 일률적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돈을 어떻게 벌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과연, 우리사회의 실상을 적절하게 지적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저 사람은 잘 살아” “저 사람은 못 살아” 라고 말합니다. “잘 산다”는 말은 “저 사람은 부자야” 라는 말이고, “못 산다”는 말은 “저 사람은 가난해” 라는 말입니다. 결국,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순전히 돈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준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체할 수 없으리만치 돈이 많은 사람 가운데도 못 사는 사람이 있고,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 가운데도 잘 사는 사람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데 돈을 척도로 삼는 사회는 불의한 사회입니다. 그것은 돈에 노예가 된 사회를 말합니다.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은 돈에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섬기다”는 말로 사용한 ‘둘류에인’이라는 헬라어 단어의 뜻은 ‘누구에게 노예가 되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나온 ‘둘로스’는 노예를 의미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주인은 노예에게 일을 시킬 뿐 아니라, 돈을 받고 팔 수도 있고, 말을 듣지 않으면 매를 때릴 수도 있고, 병들면 내다 버릴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죽여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둘로스가 되거나 재물의 둘로스가 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든지, 아니면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든지, 둘 중 한편을 택해야 합니다. 노예는 자기 주장이 없으며 오직 주인을 위해,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 복과 생명을 누리게 되지만, 재물의 노예가 되면 결국 불행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돈 때문에 부모 형제가 원수 된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돈 앞에서는 부모 형제도 안중에 없습니다. 참신한 뜻을 품고 정치무대에 나섰으나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부패 정치인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살인강도, 절도, 사기, 횡령, 도박, 등등 돈 때문에 범하는 죄는 부지기수입니다. 몇 년 전에 초등학교 선생님이 단란주점을 운영하면서 가출 여중생 두 명을 접대부로 고용해 술시중을 들게 한 혐의로 경찰에 구속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도 처음 교육자로서 출발할 때에는 페스탈로치의 정신을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돈의 노예가 되고나자 이중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있다면 못 할 짓이 없다고 말합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면 된다”고도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근로자가 부족해서 외국 노동자들을 데려다가 일을 시킵니다 마는,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가 200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벌되 떳떳하고 깨끗한 방법으로 벌어야 합니다. 돈을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절대로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돈이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에 빠지면 안 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더니 놀라운 표적이 따랐습니다. 병자들이 낫고 귀신들이 쫓겨나갔습니다. 사마리아에 시몬이라는 유명한 마술사가 있었는데, 빌립이 행하는 이적을 보고는 압도당했습니다. 그는 마술을 버리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는 열심히 빌립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 얼마 후에,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았다는 보고를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했습니다. 이에 두 사도가 가서 사마리아 신자들을 위해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했더니 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마술사 시몬이 이 광경을 보고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조용한 시간에 시몬이 많은 돈을 사가지고 베드로와 요한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행 8:)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재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살 수 없습니다. 돈을 드려서 성령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없어질 금이나 은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써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버십시오. 그러나 돈 버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돈은 목적이 될 수 없고, 생활을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신 대로, 경제활동을 하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심으로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물질을 다스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재물에 대한 소유권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서두에서 말씀한 대로, 우리가 가진 모든 물질의 원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땀 흘려 수고해서 번 것이라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것을 가져다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에 보니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물질 뿐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 건강, 재능, 지혜, 지식 할 것 없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본래부터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충성된 청지기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내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데 참견하지 말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달란트의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14)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쌔 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22)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24)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 25:)

이 비유에 나오는 세 종은 우리 인생들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세 사람에게 각각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 각 사람에게 달란트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생명, 건강, 재능, 지혜, 배경, 인간관계, 재물 등이 다 달란트입니다. 먼 나라에 갔던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을 불러 결산을 보았듯이,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날, 우리는 주님 앞에서 이 땅에서 살아온 인생을 결산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물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도 결산을 보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혹 보면 돈을 모을 줄만 알았지 쓸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돈을 모으는 것이 돈을 버는 목적입니다. 통장에 저축이 늘어가는 것으로 사는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 사람들은 근면절약이 몸에 배어서 모아둔 돈을 써 보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합니다. 결국 그가 모아둔 돈은 자식들의 차지가 되고 맙니다. 이에 대하여 솔로몬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전 2:21)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버는 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 누릴 만큼 누리면서 살다 가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모을 줄만 아는 사람보다는 나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 역시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자기를 위해서만 물질을 쓸 줄 알았지 하나님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벌었더라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은 것은 최후의 심판날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과 같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는데 기부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드립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인재들을 양성하는 일을 위해 투자합니다.

100여 년 전에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이 한 푼 두 푼 선교 헌금으로 드린 돈이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데 사용되었기에 오늘날 한국 교회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서구 기독교인들로부터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로서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직접 선교사로 갈 수 없지만, 물질적으로 후원함으로서 선교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은 나만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에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선한 청지기처럼 받은바 물질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에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할 것이라’(딤후 3:1-2)는 했습니다. 이 예언은 오늘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져 있으며, 돈을 사랑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돈의 노예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므로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다투고, 돈 때문에 생명의 주님을 믿지 못하고 멸망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가 가까운 이 때에 성도들은 성경적인 물질관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아시고, 둘째로,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마시고, 셋째로,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세 가지 원칙에 입각해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서 이 땅에 사는 동안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물질을 지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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