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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할례의 언약 (롬 4: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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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받은 복을 세워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지난 한 주간 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말씀이자 찬송입니다. 하나님 앞에 받은 복이 많음에도 남보다 더 많은 복을 받지 못한 것 같은 비교의식에 정작 감사와 기쁨이 없음을 우린 때론 알게 됩니다. 남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앞에서 받은 복을 세워보니 너무 많음을 알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본문 9절의 말씀처럼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여기서 행복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행복은 로마서 강해 스물 네 번 째 시간 ‘다윗이 말하는 축복’에서 언급하였듯이 다윗이 말한 축복입니다. 7절에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는 다윗의 말입니다.

나는 행복한 자인가?

다윗이 말 한 바 가장 복 있는 사람은 세상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아닌 죄 사함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다윗은 한때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복자가 되어 수많은 전쟁 중에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큰 부자 중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다윗을 두고 마음에 합한 자라 인정하셨습니다. 사람 앞에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국기에는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을 짓고자 원했습니다. 그의 삶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많은 흔적을 남기길 원했습니다. 이런 다윗이 나이를 먹어 늙어 가면서 한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걸음마다 죄밖에 없음을 죄의 흔적 밖에 없음을 안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인생이었고 고백이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라는 것이요 인간의 가장 큰 축복은 용서 받은 자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4장 6절에 “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하여 사하셨고 가리워 주셨고 그 죄를 인정치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축복이 무엇으로 임하는 것입니까? 바로 믿음으로입니다. 이런 엄청난 복이 할례자? 무할례자? 임의 여부에 따르지 않음을 바울은 다윗이 말한 축복을 근거로 하여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와 귀와 영화는 하나님앞에서는 어떤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 죄에 대해서는 다릅니다.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앞에서 바로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찌 죄 앞에서 스스로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것도 죽음으로 말입니다. 바로 내 내신 십자가에 지신 것입니다. 이를 두고 신학적으로는 ‘죄와 의의 전가’라고 표현합니다. 전가의 행위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로 전가하시니 예수님을 죄인으로 간주하시고 형벌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대가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죄인 된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의인의 보상을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행복이 어떤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입니까?

할례자인가 무할례자인가?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신앙의 기준에는 할례의 여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할례받음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할례받지 않은 사람을 아주 냉대하였습니다. 랍비들은 “너희는 몸에 아브라함의 표를 곧 할례의 표만 갖고 있으면 그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자녀는 구원얻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믿어 온 것입니다. 즉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자 구원의 표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할례를 받아야만 의로워 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만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바울의 선언을 유대인들은 소화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을 이야기 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할례를 받은 후인가? 아니면 할례를 받기 전인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무 할례시 곧 할례를 받기 전이라는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오직 믿음으로 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할례를 받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11절에 잘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를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여 하심이라” 아브라함으로 할례를 받게 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이미 의인되었을 음을 인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 해 볼까요?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있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증명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할례는 구원이나 의롭다 함의 여김의 조건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음을 인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교회에서 받은 세례의 의미와 동일한 것입니다.

율법안에 있는가? 율법밖에 있는가?

유대인들의 신앙에 가장 중요한 기준 또 하나는 율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에 기준 중 율법안에 있느냐? 율법밖에 있느냐는 아주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이 또 강조합니다. 인간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율법의 요구 또한 주님이 만족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구원 율법과 의롭다 함은 관계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요구를 외면행도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14절에 보니 “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축복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율법을 어떤 사람들에게 주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적 사람입니다. 즉 율법시대 이전에 의롭다 함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입니다. 곧 이것을 지켜라 그리하면 내 백성이 될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백성 된 자들에게 이미 구원 얻은 자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니 율법은 이방인에게 지켜 구원의 백성이 되라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그리고 받은 복을 세어보십시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행위가 아닙니다. 조건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요 구원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내안에서 이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내가 믿는다 하여 교회 문이 열렸다하여 아무나 와도 좋소하며 노래한다해도 모든 사람이 언제든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받은 복을 세어 보십시오. 그 어떤 것보다 우리의 죄 사함에 있어 의롭게 되었다는 것과 구원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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