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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어의 상처를 치유하라 (약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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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운명은 거의 입으로 결정합니다. 입은 말을 합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요, 삶이요, 사상이요,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말하는대로 그 인격이 형성되고 말하는대로 그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말을 마음에 담으면 사상이요, 말이 고정되면 뜻이요, 말이 행동으로 표출되면 행동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쓰고 있는 말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됨을 나타내게 됩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도 그 언어의 사용여하에 따라서 결정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운명을 바꿀 때 생각을 바꾸고, 말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라고 말합니다. 생각이 그 사람이고, 또 그 말이 그 사람이며, 그 행동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만 언어의 특권을 주셨습니다. 모든 만물이 다 말을 못합니다. 오직 사람에게만 말을 주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특권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각과, 사상과,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의 표현이 자기 자신을 유익하게 할 수도 있고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2절)

이 세상에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말에 의한 죄만큼 범하기 쉬운 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에 실수를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잠언서에 보면 말에 대한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잠 6:2) 다시 말하면 말로 자기 운명, 자기 모든 인간됨을 얽어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잠언의 모든 교훈들은 말에 죽고 사는 권세가 있고, 또 말로 은혜도 받고 저주도 받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가 하고 있는 말들이 남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는지 아니면 상처를 내고 인격적으로 손상을 입혔는지 한번 반성해 보십시다. "채찍으로 때리는 것은 몸에 자국을 남기나 혀로 때리는 것은 뼈를 깍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에 생기는 상처는 고칠 수도 있고 쉽게 가실수도 있지만 말로 받은 상처는 그 기간이 오래 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구적입니다. 육체의 상처는 쉽게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로 받은 상처는 쉽게 치유가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칼날로 죽었으나 혀로 인하여 멸망한 사람의 수가 더 많습니다.
첫째, 말은 무서운 상처를 남깁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6절)

불은 유익하지만 붙어서는 안될 산에 붙으면 삽시간에 산을 태워버립니다. 산에 불이 나면 나무와, 짐승과, 인간의 가옥까지 불사르기 때문에 이것은 엄청난 피해를 주고 전 생태계가 몸살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혀를 잘못 사용하면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됩니다. 마치 불이 온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처럼 언어라는 것이 한번 잘못 사용되면 수많은 사람들의 인격을 파괴하고, 가정을 완전히 불행하게 만들고, 사회를 어둡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잘못 던져진 말 한 마디가 다른 사람 가슴에 상처를 안겨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언어의 상처를 언어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폭력' 하면 주먹을 휘두른다든지, 칼날을 휘두르는 것만 생각하지만 실상은 언어의 폭력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칼날은 앞에 있는 사람 하나에게만 상처를 입히지만 언어는 공간과, 시간에 제한없이 미치기 때문에 언어의 폭력은 그 상처가 큰 것입니다.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잠 17:20). 혀를 함부로 놀리는 자는 사공이 배의 키를 함부로 놀리는 것과 같이 위험하다는 내용입니다. 거짓말 하는 혀는 항로의 방향을 어긴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거의 다 언어의 상처에서 유발된 경우가 많습니다. 언어의 폭력으로 받은 상처는 마음과 육체를 병들게 하고 그것이 오래 가기 때문에 치유가 힘듭니다.
일반적으로 병은 상처의 한 현상입니다. 상처받은 것이 낫지 않으면 병이 됩니다. 인간은 모두 다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게 말한다면 영혼의 병인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건강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기쁘게 살아야 할 인간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병입니다.

우리가 감정의 상처가 있는데 열등의식이라든지, 우울증이라든지, 또는 의기가 소침하다든지, 삶의 의욕을 상실하는 것은 다 병적인 요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있게 살지 못하는 것도 병입니다. 이것이 다 어디에서 왔느냐? 언어의 상처에서 온 경우가 많습니다.
육체의 병은 병원에 가서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병은 병원에서 못고칩니다. 육체적인 병은 병원에 가면 보통 일주일이면 낫고, 길어야 몇 개월이지만 마음의 병, 영혼의 병은 영구적입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고칩니다. 그래서 교회는 병원과 같습니다. 우리는 매주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으면서 치유를 받는 것입니다.

둘째, 언어의 상처는 인격을 병들게 합니다.
언어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불행을 알아야 됩니다. 병을 알아야 고칠 수 있습니다. 상처를 알아야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병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언어를 정상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벌써 언어에 대한 상처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남을 공연히 기분 나쁘게 한다든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든지, 혈기를 낸다든지, 분노를 터뜨린다든지, 남의 험담을 한다든지, 이런 것은 일종의 자기 자신의 병적인 상태를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이 들었기 때문에 아파서 그러는것입니다.
자기 자식이라고 함부로 내뱉은 언어의 폭력이 어린 자식의 인격에 상처를 내고 불행하게 만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서울역에 있는 노숙자를 상담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언어 폭력이 그를 노숙자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빌어먹을 놈'이란 어머니의 폭언을 듣기 싫어서 가출한 것이 결국 자기로 하여금 빌어먹는 거지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매춘부의 고백입니다. "저는 어릴적부터 가출하기까지 아버지로부터 이유없는 욕설을 들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화가 나면 저보고 개같은 년이라고 욕했습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집을 나온 제가 지금 매춘부가 되었으니 아버지의 말대로 된 셈이지요."

대개 가정생활이 불행한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부모님의 친절과 사랑의 말을 듣고 성장한 아이들과 부모의 폭군적이고 거친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그 인격이 다릅니다.
옛날에는 이 나라의 말이 거칠고, 살기차고, 악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 살기가 어려워서 그렇게 폭언을 많이 했는지 거의 다 욕을 먹고 자랐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했기 때문입니다. '빌어먹을 놈' 그렇게 욕을 먹었는데 빌어먹는 나쁜 길로 간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 빌어먹게 되었습니다. '썩을놈' 썩는다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입니까 그런데 한알의 밀알이 썩어지면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이 축복을 믿음으로 받은 것입니다. '육시할놈' 이 말은 여섯 토막을 내서 죽인다는 말인데 예수 믿고 순교하라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너는 순교자가 되라"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어렸을 때부터 받은 언어의 상처를 축복으로 바꾸었습니다.

셋째, 상처받은 인격을 치유해야 합니다.
혹시 부모님으로부터 상처받은 언어로 인하여 내 마음에 응어리진 것이 있으면 은혜로 푸십시오. 절대로 부모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부모님들이 몰라서 그랬으니 부모님을 용서하십시오.
우리가 개를 길러가면서도 개를 때리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러면 개가 물어버립니다. 그런데 개를 쓰다듬으면서 "이 나쁜 새끼같으니라고" 욕을 해도 개는 꼬리를 칩니다. 언어가 부드럽고 좋기 때문입니다.
얼마전에 어떤 자매님은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세상을 살 의욕을 잃고 밤잠을 못잤다고 했습니다. 남편의 언어의 상처, 자기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그래서 그는 우울증이 올 정도로 먼 산을 보게 되었고, 삶의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 자매의 얘기를 들으면서 저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 이것을 어떻게 치유하나'

이런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상처를 은혜로 치유해야 됩니다. 상처를 치유하지 않으면 결국 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부모로부터 욕설을 들으며 자란 아이는 장성해서 결혼한 후에 자기 아내와 자식들에게 똑같은 언어 폭력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어렸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이렇게 폭언을 듣고 자랐으니 나는 결혼한 후에 내 자식들과 아내에게 잘해야지' 그런데 이런 마음을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살다보면 자기 본색이 나옵니다. 악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악한 생각을 가지고 하는 언어도 있지만 본래는 선한 사람인데 무의식중에 그런 말이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어렸을 때 받은 상처가 표출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럴 때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이해하고 치유를 해야 합니다.
대개 일반적으로 성장 과정에서 말의 상처를 받은 사람은 자기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자기도 모르게 표출하는데 아내나, 자식이나, 직장 부하나, 군대 부하, 이런 사람들에게 표출합니다. 이것은 곧 상처받은 언어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넷째, 좋은 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3-4절)
마부가 달리는 말의 입에 재갈을 먹여서 그를 어거하듯이, 큰 배가 사공의 작은 키로 조정되어서 방향을 정해서 가듯이 내 입의 언어도 조정되어야 되는데 조정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7-8절)
혀를 길들일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짐승은 사람이 길 들여서 쓸모있게 만들어가지만 우리 혀는 내가 길들여서 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혀를 누가 길들일 수 있느냐? 예수님이 내 안의 주인이 되셔서 내 혀를 길들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유순한 언어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4)
온량한 혀란 '부드러운 말, 따뜻한 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온량한 혀는 다른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을 살려주는 말은 생명나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상한 심령을 살려주고, 인격을 살려주고, 병든 육체까지도 살려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를 사용할 때 부드러운 언어를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런데 패려한 혀는 험담하고, 거짓말하고, 비난하는 혀는 남의 마음도 상하게 하고, 육체도 상하게 하고, 인격도 파괴합니다.
여러 사람이 모였을 때 내 언어가 다른 사람을 살려주고 있는가 죽이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시돋힌 말로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만 골라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됩니다. 유순한 말은 평화를 창조하는 언어입니다.

2) 격려하는 말로 바꾸어야 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말은 씨가 됩니다. 그러므로 말은 심는대로 거두게 됩니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격려와 용기를 주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고 주님의 뜻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언어를 쓰도록 해야 합니다.
많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상처를 받고 묵묵히 참고 사는 것이 별세한 신앙의 큰 미덕으로 알고 아픈 상처로 가슴이 멍들고 한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것이 못됩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인격적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을 수십년 그대로 습관되어 살면서 더욱 불행해지고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자매가 남편이 수십년동안 언어로 상처를 주었는데 참고 살아왔다고 하면서 나보고 그래요. "목사님 별세하느라고 참 힘듭니다. 목사님이 별세를 알려주셨기에 날마다 나를 죽이면서 남편의 폭력적 언어를 참고 살았습니다."

상처를 받고도 묵묵히 참고 사는 것이 별세한 큰 신앙의 미덕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참는 것이 은혜라고 생각하고 참기만 했죠."  "참는 것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남편을 치유해 주어야 됩니다." 폭력적 언어를 쓸 때는 같이 대답하면 싸움이 되니까 그때는 가만히 있다가 남편이 기분 좋을 때 '여보, 우리가 수십년 살아오면서 당신이 이럴 때는 이렇게 말해주면 좋지 않겠어 반찬이 마음에 안들 때 "이것도 음식이라고 해왔어?" 그러지 말고 생선이 먹기 싫으면 생선 먹기 싫으니까 고기국 달라고 한 마디만 해줘요. 그러면 내가 잘해줄께 그리고 "그것을 옷이라고 입었어? 동네 사람들 다 웃겠다." 그러지 말고 "여보, 이런 때는 이런 옷이 더 낫지 않을까" 이렇게 한마디를 해주면 얼마나 좋겠어요. 나는 당신 아내잖아요. 당신하고 평생 살 사람이고 당신이 병들었을 때 그래도 내가 옆에 있었잖아' 이렇게 얘기하면 남편이 즉시 깨달을 겁니다. '아!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구나' 그러면서 다음부터 고치기 시작할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더니 정말로 남편의 폭언이 사라졌습니다.

시어머니의 언어의 상처도 참는다고 좋은 것 아닙니다. 시어머니 기분 잘 맞춰드린 다음에 "어머니, 제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죠. 그러나 어머니 며느리 아닙니까 어머니 돌아가시면 그래도 제가 울어줄 사람이고 또 시제 모실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저를 사랑해 주는 마음으로 이런 때는 이렇게 해주시죠. 어머니는 훌륭한 분 아닙니까 이렇게 해 주시죠." 하고 얘기하세요. 그러면 시어머니가 고칠겁니다.

교육 심리학자 벤자민 블름이라는 사람은 가정환경을 물질환경과 언어환경으로 구분했습니다. 물질 환경이란 안락한 의식주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다 주면 물질 환경이 좋아집니다. 아이들에게 용돈을 많이 주면 물질환경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어 환경입니다. 얼마나 친절하고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말을 주고 받으며 사느냐에 따라 행복이 좌우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돈을 갖다 주면서 "다시는 돈 달라고 하지 말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물질은 주었지만 언어환경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보, 내가 많이 못벌어 미안해 앞으로 많이 벌어 잘해줄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언어환경을 이룬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마음을 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말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해지면 온유한 말을 합니다. 마음이 화평하면 화평케 말합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독한 사람은 독한 말을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면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오고, 그리스도의 생각이 나오고, 그리스도의 언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모든 생활 속에서 언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면 어린시절부터 병든 상처의 원인을 분명히 규명하고 이 병의 요소를 알아서 이것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별세의 신앙으로 고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짧은 인생 사는 동안 모두 다 평화, 자유, 행복을 누리면서 건강한 가정, 건강한 사회, 건강한 교회, 건강한 인격을 이루어 사시기 바랍니다.

말은 잘하면 남을 살리기도 하고, 국가도 살리고 유익도 주지만 말을 잘못하면 가정을 파괴하고, 자녀들을 병들게 하고, 교회를 소란케도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일생동안 좋은 말로 서로 격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중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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