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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떤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살전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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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데살로니가 전서 3:9)

어느 뜨거운 여름날 한 농부가 호두나무 그늘 밑에 앉아 쉬면서 호박넝쿨 에 매달린 큼직한 호박을 보았습니다. 농부는 혼자 중얼거리기를 “하나님도 참, 왜 저렇게 무거운 호박을 약한 넝쿨에 매어 달리게 하셨담? 넝쿨은 약하고 호박은 무거우니 땅에 닿지 않는가?”그러면서 머리 위 호두나무를 바라보니 더욱 하나님이 불공평해 보였습니다. 그 크고 튼튼한 호두나무 가지들에 겨우 작은 호도들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하나님도 참, 저렇게 커다란 나뭇가지에 작은 호두가 달리게 하시다니 쯧쯧”그러면서 나무 밑 에 누워 잠이 들였습니다. 그때“딱”하고 호두 하나가 떨어지면서 농부의 이 마를 때렸습니다. 깜짝 놀란 농부는 벌떡 얼어나서 아픈 이마를 만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아이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큰 호박이 이 나무에 매달려 있었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습니다. 하나님 저 호박넝쿨에 호박이 열리게 하시고, 이 호두나무에 작은 호두가 열리게 하신 것을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지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불평하며 불만족한 가운데 살게 됩니다. 우리가 감사하며 살아가느냐, 불평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나라의 경제가 어렵습니다. 정부는 나름대로 어렵게 살아가는 서민을 생각하여 분배를 위한 정책을 펴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도리어 빈부의 격차는 더 커지고 빈익빈 부익부(貧益貧富益富) 현상만 더 심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하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함이란, 상황이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1. 왜 이렇게 감사해야 할까요?
감사함은 은혜를 베푸신 분에 대해 지켜야 할 예의이기 때문입니다.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받은 은혜와 덕은 잊고 배신한다는 뜻이지요. 배은망덕한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인간의 타락 가운데 가장 무서운 타락이 배은망덕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그것은 질병이나 실패나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믿어지지 않는 불신앙으로,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는 막힌 귀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우울해 하고 불평과 불만과 원망으로 가득하여 감사한 마음이생기지 않는 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디모데후서 3:2)라고 하셨습니다. 말세에 타락한 인간에게 나타는 특징 가운데 한 가지가 은혜에 대한 감사함을 모르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류의 역사를 볼 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언제나“어려울 때만 찾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찾되 언제나 “자신의 욕구 충족의 수단”이었습니다. 자기가 바라는 욕구가 채워지면 하나님은 언제나 배신의 대상이었습니다.

나라의 경제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빈곤의식이지 절대빈곤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편리합니까? 생각해보면 그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선진 문명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누리고 있는 나라가 유럽의 선진국들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교회들은 텅텅 비어가고 있습니다. 웅장한 교회건물들이 구멍가게나 놀이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배은망덕(背恩忘德)입니다. 어려운 날은.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좋은 날은, 좋은 날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예의 바른 성도의 모습니다.


2. 언제 감사해야 할까요?

프랑스의 사상가인 파스칼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말 했습니다.“하나님과 무관한 인생, 하나님을 탐구하는 인생, 하나님을 신앙하는 인생”으로 분류하면서 이들을 각각,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은 어리석은 자, 하나님을 탐구하는 인생은 불행한 자, 그리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인생은 행복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은 감사와 무관합니다. 하나님을 탐구하는 사람은 감사도 자기 기준에서 탐구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은 감사에 풍성한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좋은 날 감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이러한 날의 감사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보다 한층 더 차원 높은 감사의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감사입니까?“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 전서 5:18) 하셨습니다. 범사란, 모든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좋은 날만 아니라 좋지 않는 날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잘 될 때만 아니라 잘 되지 않을 때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성공했을 때만 아니라 실패한 것 같은 날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넉넉할 때만 아니라 가난할 때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만 아니라 병든 날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좋은 날의 감사함은 이해가 되는데 좋지 않은 날의 감사함이란 이해하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축복의 계획이란 사람이 보기에 좋지 않은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생명이 갈망하는 한여름의 소나기는 언제 어떻게 내립니까? 천둥과 번개가 천지를 진동하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컴컴한 먹구름을 동반합니다. 푸른 하늘 밝은 날이 좋긴 하지만 그런 날에는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에디슨은 학교교육이란 3개월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열 살 때에 열차 신문팔이를 하며 자라났습니다. 젊어서는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감사하기를“내 귀에 딴 소리가 들리지 않으므로 연구에 도움이 되어 나는 1,300여종의 발명 특허를 받을 수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고난 중에도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고난 중에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화를 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셉은, 형들의 배신으로 애굽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누구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훗날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환경만 바라보고 성급하게 낙심하며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성도의 지혜가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삶의 지혜입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심한 근시였습니다. 그는 항상 두 개의 안경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하나는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돋보기였고, 하나는 멀리 있는 물체를 바라볼 때 사용하는 안경이었습니다. 루즈벨트는 무거운 안경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을 매우 귀찮게 여겼습니다. 한번은 루즈벨트가 밀워키에서 정치연설을 하고 있을 때 쉬렌크라는 청년이 그를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총알은 루즈벨트의 가슴에 정확하게 명중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루즈벨트는 약간의 부상만 입었습니다. 그는 정신을 차린 후 연설을 계속했습니다. 괴한이 쏜 총알은 루즈벨트의 양복 안주머니에 있던 강철 안경집을 맞고 방향이 굴절되어 다른 곳으로 날아갔던 것입니다. 평소 귀찮게 여겼던 안경집이 그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얼른 생각하기엔 감사할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불만족한 것들만 가득합니다. 그러나 욕심이 가득한 마음을 비우고 깊이 생각해 본다면 그 불평의 조건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감춰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3.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요?

첫째, 마음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의 원문의 뜻은“깊이 생각한다.”“숙고한다.”라는 것입니다. 깊이 숙고할 때에 즉 깊이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 깨달아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한 성도는 말하기를“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편 111:1)고 했습니다. 의식을 갖추어드리는 예배도 있어야 하고, 준비된 예물도 있어야 하지만 이에 앞서 깊이 생각하며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온 마음을 다해 하나하나 찾아 깨닫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자세입니다.

둘째, 시와 찬미로 감사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6의 말씀에“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하셨습니다. 즐거운 날 사람들이 모인 곳에 거의 빠짐없이 있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노래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음악과 노래를 좋아합니다. 아무리 미개한 지역의 사람들이라도 그들 나름대로의 음악과 노래는 있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음악과 노래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에베소서 5:6)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는 어디에나 찬송이 있습니다. 오늘 같은 맥추감사절은 더욱더 기쁨이 넘치는 찬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셋째, 정성된 예물로 감사해야 합니다.
시편 96:8의 말씀에“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시편 96:8)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6:16~17에는“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하셨습니다.

감사의 예물에 대하여 성경에 말씀하시기를“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9:6-9) 하셨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을 그 사람이 곡식을 땅에 심고 거두는 것과 같은 이치로 말씀하셨습니다.“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신명기 16:17) 하셨는데, 예물을 드려라 하신 까닭이 무엇입니까?“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9:9) 하셨습니다. 씨앗을 땅에 심으면 수십 배를 수확하게 되듯, 더 많은 것을 주시고자 함이라 하셨습니다.

인간 편에서 볼 때 예물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하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예물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주시고자 심고 거두는 씨앗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의 의미입니다. 감사함이 있는 곳에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은 땅위에서의 풍성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복음 6:19-21)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살다가 때가 되면 가야할 곳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향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곳에 갔을 때 상급으로 되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 한다면 보험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은 어떻게, 무엇에 쓰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 쓰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쓰입니다. 복음 증거를 위해 사용됩니다. 미전도 종족들이 살고 있는 지구촌의 오지에 선교사를 파송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됩니다. 사회복지를 위해 쓰여 지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학교가 교회에서 세운 학교(배제학당)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병원이 교회에서 세운 병원(광혜원,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 )입니다. 우리나라의 사회사업 대부분은 기독교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음으로 양으로 앞서간 국내외의 무명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린 예물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이 일을 우리들이 계속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토록 귀한 곳에 쓰이는 것이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입니다, 하나님은 이 거룩한 일을 위해 협력하는 성도들을 사랑하시며 이 땅에서와 내세에까지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생활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아픔과 슬픔을 많이 겪었습니까? 불의의 사고나 질명, 직장에서의 어려움, 믿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 뜻하지 않은 손해로 고통 받고 낙심한 적이 있었습니까?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까지 견디게 하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신 그 손길을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 중에 전투에 나갔다가 포탄에 맞아 두 활을 잃어 불구자가 된 헤럴드 러셀이라는 사람의 실화를 다룬 영화입니다. 그는 두 팔을 잃고 참혹한 좌절에 빠졌습니다.“나는 이제 쓸모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었구나.”그런 그가 하나님을 믿기 시작 하면서 차츰 잃은 것보다 가진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의사가 그에게 의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것으로 글을 쓰고 타이프도 치기 시 작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이야기는 영화로 제작되었고 그는 직접 불구자의 모습으로 출연하였습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연기했고, 그해 이 영화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어떤 기자가 찾아와 물었습니다.“당신의 신체적 조건이 당신을 절망케 하지 않았습니까?”그러자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아닙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나에게 도리어 가장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것을 사용할 때 잃은 것의 열배를 보상 받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림 것에만 눈을 돌릴 때 그곳에는 절망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불가능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잃은 것을 넘어 가진 것을 세어본다면 더 많은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려는 향상 잃어버린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남겨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며 새로운 힘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심령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심령에게 능력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심령을 도우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심령의 마음속에 기쁨이 있고 평안이 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되 범사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연작(燕雀)이 어찌 봉황의 뜻을 알랴”라는 말이 있는데, 하물며 미물 같은 우리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어찌 다 알겠습니까? 다만 감사할 뿐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이익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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