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전 1:1~10)

  • 잡초 잡초
  • 551
  • 0

첨부 1


영감 받은 사도 바울의 전도여정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바울은 제 2차 전도여행(주후 53년경)에 실라와 디모데를 데리고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는 교회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인들 중에 바울 사도의 가르침에 대해 의심하는 자도 없지 아니했습니다. 이 교회는 바울과 실라가 이곳에 3주 동안 머물 때 성경을 가르치면서 개척한 교회입니다.
당시에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그곳 형편은 유대인들이 악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과 실라를 쫓아내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환난 때문에 결국 바울의 일행은 그곳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바울이 떠난 뒤에도 데살로니가 교회에 핍박은 계속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한번 데살로니가에 가려고 생각했으나 사정이 허락되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대신 디모데를 그곳에 보내어 사정을 알아본 결과 디모데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 중에서도 신앙의 동요를 받지 아니하고 바울의 가르침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애와 특별히 바울을 향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근심거리는 도덕적인 타락과 교직자를 존경하지 아니한 것과 게으른 것과 재림에 대한 문제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고린도에 가서 있다가 데살로니가로부터 돌아오는 디모데와 실루아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돌아온 직후에 이 서신을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고린도에서 쓴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위에 있는 아가야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 이 같은 데살로니가의 저력은 그들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 즉, 실루아노와 디모데의 이름을 같이 사용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에 인사를 했습니다. 여기 실루아노(Siluanus)는 실라(Silas)의 로마식 표기입니다. 실라 역시 바울과 같이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과 함께 세 사람의 이름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인사의 첫 마디가 축복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Ⅰ.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택자들을 향한 축복입니다.

본문 1장 4절에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구원받기로 이미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바울은 『형제들아』(아델포이, )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여기 성도란 말이 하나님과 관계된 표현이라면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인간관계적 차원의 공동체의 멤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고 한 말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창세전에 이미 구원받기로 예정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택하심을 입은 것은 갑자기 된 일이 아니고 이미 창세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택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1) 그들에게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믿음).
본문 1장 3절에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희몬 투 에르구 테스 피스테오스, )에서 '에르구'( )는 '역사', '사역', '과제' 등을 의미합니다. '테스 피스테오스'( )는 믿음에 의해서 영감 된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한 행위가 따르는 믿음입니다.
바로 믿음과 행위의 일치의 역사입니다. 신행일치의 신앙사상은 곧 하나님의 주권사상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곧 위대하신 하나님 사상입니다. 이러한 신앙사상 체계가 이른바 개혁주의 신앙사상체계입니다.

2) 그들에게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사랑).
본문 1장 3절에 『…사랑의 수고와…』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투 코푸 테스 아가페스, )는 '절단하다', '채찍질하다', '애쓰다', '부수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랑의 기쁜 마음으로 수고하고 넘치는 수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수고로운 봉사를 거절하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소유한 자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성도는 기쁜 마음으로 수고하기를 즐겨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익숙해진 어쩔 수 없는 고집입니다.

3)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인내가 있었습
니다(소망).
본문 1장 3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않고 기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소망의 인내를』테스 휘포모네스테스 엘피도스( )라는 말은 '소망으로 충만한 인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인내는 자기의 바라는 것이 이 땅에서 영원히 오지 않는다고 해도 소망으로 인하여 낙심하지 아니하는 인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나타나는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음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수고하고 소망 가운데 인내합니다. 이것은

Ⅱ. 주를 본받는 자들을 향한 축복입니다.

본문 1장 6절에 『또 너희는 많은 환난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는 자가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본 받는 자』미메타이( )는 '모방하다', '따르다'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말은 직역하면 너희가 우리의 모방자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는 주님을 따르는 자라기보다는 주님을 본받는 자로 신약에서 6회나 사용된 단어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 사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바울을 본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종으로서의 바울의 행위를 본받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고전 4::16).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빌 3:17)..

출애굽기 24장 3절에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일에 앞서서 달리는 주의 종을 따르는 것은 성도들이 받은 큰 은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맥락에서 '주를 본받는 것'과 '우리를 본받는 것'을 일치시켰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가운데서도 주와 사도의 가르침을 본받는 것은 축복받은 교회의 특징적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의 일행과 주님을 본 받는 자들이라고 하는 소문이 각처에 퍼졌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본』(튀폰, )은 찍어서 생겨진 표식 또는 원본을 찍을 모형을 의미합니다. 요즈음 말로 '복사판이다'라는 말입니다. 교인들은 목사의 신앙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해석과 기도하는 것과 모든 신앙생활이 저희 목사와 닮게 됩니다. 이것은

Ⅲ. 믿음의 소문이 퍼지는 교회를 향한 축복입니다.

본문 1장 8절에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고 했습니다.
잘 믿는다는 소문이 나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마가복음 2장 1절에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소문이 나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에게 있는 믿음의 열매로 말미암아 소문이 나게 됩니다. 그 소문은 신행일치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론적 소문입니다.
기독교는 은닉되고 감추어진 어두움의 종교가 아니라 공개되고 많은 사람 앞에 자신의 정체가 분명히 드러나는 밝음의 종교입니다.
어떤 소문입니까?

1) 각처에 퍼지는 소문입니다.
본문 1장 8절에 『…너희의 믿음의 소문이 각 처에 퍼지므로…』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정치적으로나 상업적으로 각처에 소문이 퍼지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선행들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소문은 데살로니가 교회정도가 아닙니다. 발달된 통신문화와 각종 매스컴과 대중정보매체를 타고 실시간으로 전달됩니다.
지금 우리는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소문이 나기에 너무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좋은 소문이 날 수 있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투명함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어떤 소문입니까?

2) 여러 교회에 자랑할만한 소문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에『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환난 중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수준을 여러 교회에 자랑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하는 환난과 핍박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계속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고 했습니다(딤후 3:12). 반대로 경건하게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핍박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핍박이 많은 개인이나 교회는 그만큼 경건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 아무런 핍박도 장애도 받지 아니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성도가 가질 자세가 아닙니다.
축복받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택자들이 모여서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교회입니다(믿음). 사랑의 수고로 풍성한 봉사가 있는 교회입니다(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인내로 충만한 교회입니다(소망).
축복받은 교회는 주를 본받는 자들이 있는 교회입니다. 저희 목사를 본받는 교회입니다. 축복받은 교회는 일하는 교회입니다. 축복받는 사람은 일하기 좋은 환경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변하여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자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 양심의 본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 윤리의 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매력을 던져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축복받은 교회는 믿음의 소문이 나는 교회입니다. 각처에 퍼지는 소문입니다. 종들의 몸과 마음을 통하여 각처에 자랑으로 전해지는 소문입니다. 개인이나 교회가 잘되려고 하면 소문이 잘 나야 합니다. 사람이 망하려고 하면 이미 소문이 잘못 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순리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올 때는 그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한 핍박과 환난을 피한다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앞서간 신앙의 조부들은 예외 없이 핍박과 환난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이 길을 가야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지혜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마십시오(롬 12:2). 믿는 자의 본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살전 1:7).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아야 합니다(약 5:10).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마십시오(히 4:11). 그의 죽으심을 본받고 부활을 본받아야 합니다(롬 6:5).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야 합니다(롬 8:29).
우리에게 있는 소문이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무슨 소문을 가지고 다닙니까? 저와 여러분은 무엇으로 본이 되려 하십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일하는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선언하시는 성령님은 곧 우리의 영광의 영입니다.
(강구원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