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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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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기도 Pastoral Prayer
은혜의 주 아버지 하나님. 죄 많은 저희들이 주님의 전에 나아와 주님께 경배할 수 있게 된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상한 심령을 치유하시는 주님, 저희 중에 마음에 고통을 받아 하루하루 견디기 어려운 성도가 있습니까? 온전하게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육체의 질병으로 고생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주여, 간구하옵나니, 저들이 병에서 놓임 받게 하옵소서. 사랑이 필요한 어린 아이들이 있습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사, 주님의 은총을 내려 주시옵소서. 이 시간 드리는 예배를 받아 주시옵고,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I have come to fulfill them"

"율법”이나 “선지자”는 곧 “구약성경 자체”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율법”을 선포하시니까, 그것이 마치 “규약의 파기”처럼 오해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을 염恝?두신 말씀입니다. "The Law" and "the Prophet" mean "the Old Testament" itself. As Jesus proclaimed the new teaching, some might have misunderstood him. Therefore, Jesus clarified his ministry that he fulfilled the Bible, not demolish it.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을 다 ‘이루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Jesus came to fulfill all the prophecies in the Bible.

구약의 모든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로 집중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예언을 모두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 죽으심, 그리고 부활로써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All the prophecies of the Old Testament are focused on Jesus the Christ. Jesus Christ fulfilled them all. Through the life, death, and resurrection, Jesus fulfilled all the sayings of the Old Testament.

구약에는 이미 예수님께서 어떻게 오실 것인지, 어떤 삶을 사시며, 어떻게 죽으실지, 그리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다가 다시 오실 것, 이 모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예언을 낱낱이 아셨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셨습니다. In the Old Testament, the coming of Jesus, the life of Jesus, and the death and the second-coming of Jesus are written. Jesus knew them all, and lived following the teachings.

지난 몇 주일간 나는 주일예배에서 “산상수훈”을 강해하고 있습니다. 듣기에 따라서 “너무 어렵다,” 혹은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죄인 아닌가? 부담스럽다” 할 수 있습니다. I have preached previous Sundays about the Preaching on the Mount of Jesus Christ (Matthew chapters 5-7). Some may say, "The teachings are too hard for we sinners to follow."

그러나, 산상수훈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것 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지적한 것입니다. But the teachings of the Matthew 5-7 points what we can do living in Jesus Christ as well as pointing the fact that we sinners can do nothing something good.

누구나 산상수훈을 읽으면 첫 인상은 “패배감”입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삶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거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얻을만큼 평화를 위해 일하거나, 예수님을 위해 핍박을 당하거나 하는 여덟 가지 복은 참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이나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도 우리에게 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The first impression in reading the Matthew 5-7 is generally sense of failure. "This kind of life seems not to have something to do with me." The beatitudes for those who are the hungry for the righteousness, the peacemakers who could be named 'the sons of God,' and those who are persecuted in Jesus' name are likely far from who we are. The sayigs like, "You are the sale of the world," and/or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seem not to be anything to do with us.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도 그런 느낌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5:27-32에 기록된 것처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마음에 간음했다”면, 그로서는 피해나갈 도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카터 대통령만의 고민은 아닐 것입니다. Jimmy Cater, the former President of the US, could not discard such a sense of failure. He said, as written in Matthew 5:27-32, if anyone who sees woman and commits adultry, he does not have any path to escape such a sin. This may not a painful confession only for Mr. Carter.

그렇다면 산상수훈은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기보다는 “부담스러운 소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죄인 된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이라면, 그건 결코 기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If it be so, the Sermon on the Mount (Matt 5-7) may not be a "good news" but a message of stress. No matter how it sounds good, if we sinners cannot handle it, it will never be a good news.

산상수훈은 “성경의 일부”입니다. 그 말은 “산상수훈은 성경 전체의 특징을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산상수훈이 부담이라면, 성경 자체가 부담입니다. 성경은 수도 없이 반복하여 “성도들의 완전함”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함은 다른 말로 “거룩함”입니다. 어떻게 죄인인 한 사람이 ‘완전하고 거룩할 수’ 있을까요? The Sermon on the Mount is a part of the whole Bible. It means the Sermon on the Mount includes the features of the whole Bible. If the Sermon on the Mound is an obstacle, the Bible itself would be the same. Because the Bible continually ask Christians be perfect. Perfection is holiness. How a sinner be perfect and holy? 

우리가 ‘성도’라고 부를 때, 그 말은 “거룩한 무리”라는 뜻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거룩한 무리라고 불린다는 것 자체가 부담 아닙니까? When we call us saints, we are to be holy people. If so, what we call ourselves as a Christian community is a burden. Isn't it?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성도는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 받은 무리”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부르셨습니다. To say conclusion first, saints are those who were called as the holy people. It was not because we are holy. It is God who separated us and called us to be holy.

“의롭다”는 것은 우리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하나님께서만 내리실 수 있는 판단입니다. 우리 눈에 아무리 의로와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면 그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To be righteous" is not our ceriterion. It is God's judgment. Only God can judge anyone righteous. Even a man people do not recognize as righteous, with God's recognition, he is righteous.

그렇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구나!” 하시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의롭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 마련된 ‘기준’이 있습니다.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Nevertheless, we cannot live as we want. We have the Bible. God already showed us his will in it. We have a ruler to be judged righteous. It is the Bible. 

그러나, 성경 전체가 ‘산상수훈’과 같은 수준이라면,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그 말씀을 지키겠습니까?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하신 주님이시라면, 우리 죄인들이 천국 가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고 하실 것 아닙니까? But if the Bible is as high standard as the Sermon on the Mount, who can follow the teachings? When Jesus said, "The rich's getting into the Kingdom of God is harder than a carmel' passing through the ear of a needle," will he n ot say to us sinners to be hard to get into the Kingdom of God?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행위대로”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입니다. 우리 행위는 따라가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회개하고 주님께 나아가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거룩함의 길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삶입니다. No, it is not true. The Lord does not judge us according to our deeds but to faith. Even though we can not follow the Word perfectly, we do believe. We believe that even if we are sinners, if we confess our sins and go forward to God, God would forgive us and welcome to his House. This is what faith is about. This is the path to holiness. This is the life of perfection. 

우리가 소금이요 빛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고, 주님께 무릎꿇는 삶입니다. The life of the salt and light of the world is the life confessing to the Lord that we are nothing without him and kneeling down.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죄인입니다.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이 사실을 마귀는 가장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정체를 밝힙니다. Who are we? We are sinners. We have betrayed the Lord. The Satan sticks to this point seriously. He identifies ourselves clearly.

그러나,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 외에 또 다른 질문을 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오시기 위해 가시덤불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We, however, have another question besides "Who are we?": Who is Jesus? Jesus is the Lord of love. He did not mind passing through the throne-piercing valley for the purpose of getting a lost sheep.

우리가 “나는 누구인가?”에 집착하면,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진지하게 묻는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짐을 대신 지셨습니다. 우리의 슬픔과 고독을 대신 끌어 안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 문제를 혼자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슬픔으로 혼자 슬퍼하며 고독해 할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If we stick to the question, "Who am I?", we cannot have any hope. But if we ask "Who is Jesus?" seriously, the hope comes to us. Jesus takes our weakness on his shoulders. He took our burdens of sin. He got our sorrow and solitude for us. If so, we do not have to worry about our sins. We do not have any reason to suffer from the sins.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께서 나에게 무엇이 되시는가? Who is Jesus to us?

은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은혜 안에서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받아들여짐’입니다. 자격이 없지만, 끌어안으시고 “그래, 괜찮다. 너의 이 모습 이대로 내가 받아들인다” 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It is grace. We become perfect within the realm of the grace. Grace is what be welcomed. It is the love of the Lord who welcomes us, who are not qualified, and says, "You are OK. I welcome you as you are." 

온전하고 완전한 사람은 자기가 가장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참 사랑의 구주임도 깨닫는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올 때, 우리는 “은혜” 안에 서게 됩니다. The perfect person is he who recognizes himself most imperfect. But he does not stay there. He recognizes Jesus to be the Lord of the true love.

따라서, 과거의 실패 경험이나, 현재의 불만족스러운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망”을 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 주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참된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참된 소망의 내용은 “완전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Regardless of our painful failure in the past, and of our current unhappy life, we bear the hope; our future depends on the hands of Jesus. As long as he loves us, we have the true hope. The hope will not makes us shameful. The true hope leads us to the perfection.

처음부터 실망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지금은 죄인으로서 고통당하고 있더라도, 우리 주님의 ‘사죄하심’의 은총을 기대하고 믿습니다. We do not disappoint from the very beginning. Even if today we are nothing, suffering from sins, we do believe God's grace of forgiveness.

John은 백인 청년입니다. 20대 후반쯤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중에 나는 그를 만났습니다. 중고등부 수련회 장소로 결정된 Santa Cruz 미군부대에서였습니다. 산타 크루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엄청나게 좋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농구장 full-court 되는 대단히 좋은 체육관을 포함, 여러 작은 방들을 달고 있는 본부 건물은 “아!” 하는 탄성을 자아낼 만큼 훌륭했습니다. 아이들은 짐을 풀기도 전에 이리저리 뛰면서 농구를 시작했습니다. John is a white young man, late twenties. I met him last week, at the US Army Camp in Santa Cruz where our youth group had summer retreat. The camp was located on a hill looking down the Santa Cruz bay. The main building, with a full basket ball court and some sub-rooms, was excellent. The kids started playing basketball as they arrived at the gym.

거기서 나는 중고등부 학생들, 인도자 백 목사님, 이동열 선생, 그리고 음식 봉사자로 수고한 아내와 형주-영덕이 어머니 등과 함께 그 부대에 3박4일간 머물렀습니다. 신동은 집사님 가정은 첫날과 마지막 날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I stayed at the camp three nights and four days with the kids, Rev. Baik, teacher DY Lee, and couple of volunteer members who served cooking (my wife and Young-Duk's mother). Deacon Shin's family helped us in the first and the last day of the retreat.

첫날 저녁에, 바다를 내려다보는 잔디밭에 군용 텐트를 쳤습니다. 열 여섯 명은 족히 누울 수 있는 큰 텐트였습니다. 토마스 집사님을 도와 기둥을 세우고 말뚝 박는 일을 한 사람이 John이었습니다. 그는 키가 185쯤 되었습니다. 날씬했습니다. 얼마 전에 이라크에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불붙는 사막에서 전쟁을 치른 사람치고는 참 순박해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On the first evening, we built a huge tent, good for 16 people. John helped Deacon Thomas Burch, stretching the tent. He was about 185cm, skinny. He came back from Iraq recently. He fought the war in the burning desert, but he seemed to be nice and kind. 

같이 저녁 식사도 두 번 했습니다. 그는 부대에 딸린 어떤 방에서 잤습니다.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군인 한 사람이, 그것도 이라크 참전용사가 같이 있다고 생각하니 참 마음이 놓였습니다. He and I had two dinners. He slept a room in the main building. We felt safe sleeping with a soldier, protecting us.

그런데, 토마스 집사님으로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Santa Cruz 지역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랐습니다. 그는 입대하기 전에 해변 수영장 life guard 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몸매가 ‘물개’처럼 생겼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4년 전, 휴가로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을 포함한 식구들이 이사를 가고 없었다고 했습니다. 관계를 단절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And I heard something about him from Deacon Thomas Burch. He was born and raised in Santa Cruz area. Before Army service, he worked as a life guard at the Santa Cruz shore. His career reminded me of a sea lion. Four years ago, when he came home with vacation, his family moved out to an unknown place. They broke relationship with John.

그래서 포탄의 불바다, 이글거리는 사막, 이라크를 지원한 것은 아닌가? 그렇게 추측해 보았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이라크에서 돌아왔다는 그의 얼굴은 믿기 어려울 만큼 순박해 보였습니다. I guessed that's why John applied for Iraq, the burning sea of bombs, hot desert. But his face was so good. 

그는 나에게 농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특히 한 손으로 슛 하는 방법을 몇 차례에 걸쳐 실습하게 해 주었습니다. 두 번째 날 저녁이었습니다. 나는 시간을 내어 그에게 복음을 전하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He taught me of basketball, especially how to shoot with one hand.

조금만 조금만 하다가, 그날 밤 기회를 놓쳤습니다. “내일이 있지.” 하는 맘으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튿날 오전, 그는 내게 손을 내밀면서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친구 집인가 어디로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를 붙들고 조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나가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왠가고 물었더니, “교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참 어렵다”고 했습니다. 순간, 식구들에게도 버림받은 그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습니다.

“교회가 열 개라면, 열 개 교회는 모두 다르다. 어떤 교회는 크고, 어떤 교회는 작다. 어떤 교회는 나와 잘 안 맞지만, 어떤 교회는 잘 맞는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좋은 교회를 찾아보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게 되었으니, 나와 계속 연락하면서 좋은 관계로 지내자고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더 할 듯하던 John은 약속시간이 다 되었다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토마스 집사님은 그에 대하여 ‘아쉬운 마음’을 달리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life guard 로 일하는 그런 것 말고, 대학을 다니고, 보다 전문적인 일을, 나이 들어서도 계속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는 몸이 건강합니다. 젊습니다. 본토 출신 백인이니, 영어 같은 것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 나이에 커뮤니티 칼리지부터 시작해서 4년제 대학을 졸업할 수 있는 가능성은 대단히 높습니다.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전문직에 취직하던지, 사업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그렇게 높은 ‘가능성’이 ‘현실화’될지 여부는 참 쉽게 알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현재의 문제만 들여다 보고 있다면, 그렇게 쉬워 보이는 문제도 마음처럼 시도조차 해보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함에 이른다는 것, 혹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함에 이른다는 것’은 참 성취하기 어려운 문제일 수 있습니다. 지난 날들의 실패를 돌아보거나, 현재의 부족함에 집중하고 있는 한, 성경의 요구는 말하자면 “지나친 요구”일 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야겠습니다. "네 자신을 알라!“고 설파한 소크라테스 이래, 인류는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아는 데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를 만드시고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결코 자기를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이해하기만 하면, 우리는 ‘온전함’과 ‘거룩함’의 가능성을 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족한 죄인이 온전함과 거룩함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된 것은 그 자체로 ‘은혜’입니다. 은혜는 완전함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족함으로 고민하던 사람이 끝내 주님 앞에 무릎 꿇었을 때,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써 환영 받은 자리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교회’입니다. 교회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나온 모든 사람들이 주님 앞에 회개할 때, 주님께서 영접해 주십니다. “탕자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둘째 아들이 무조건 환영받은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는 “은혜교회”입니다. 처음 교회 기초를 놓을 때 미국교회 성도들은 이 교회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우리는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야 합니다. 교회 계단을 오를 때,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우리의 죄를 하나씩 회개합시다. 너무 많아서 그 “10개 계단”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다면, 다시 내려갔다가 올라올 필요는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다 아시지요?” 그렇게만 해도 됩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올라온 교회당에서는 ‘은혜’입니다. 기도해도 은혜, 찬송해도 은혜입니다.

성도가 ‘온전하고 거룩한’ 성도가 되는 길은, 그냥 맘 먹는 것으로 다는 아닙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훈련’의 길을 가야 합니다.

운동 안하던 사람이 갑자기 며칠 뛴다고 살이 빠지거나 운동을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인 디모데전서 4:6-8입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If you point these things out to the brothers, you will be a good minister of Christ Jesus, brought up in the truths of the faith and of the good teaching that you have followed. Have nothing to do with godless myths and old wives' tales; rather, train yourself to be godly. For physical training is of some value, but godliness has value for all things, holding promise for both the present life and the life to come." 1 Timothy 4:6-8. 

게리 토마스가 쓴 “뿌리깊은 영성은 흔들리지 않는다”에서 소개한 훈련 몇 가지를 전합니다. I would like quote a series of spiritual training from Gary Thomas, <Seeking the Face of God> (Harvest House Publishers, 1994), pp. 55-80.

1. 경건한 책 읽기 Reading spiritual books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책입니다. 적어도 1년에 1회 통독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The Bible is the best book. I recommend you to read from cover to cover once a year.

아울러, 한 달에 한 권, 좋은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좋은 책’이란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 켐피스의 작품을 포함하는  ‘크리스찬 고전’을 말합니다. 옛날에 기록된 책은 물론, 오늘 출판된 책이라고 해도, 누구나 추천할 수 있는 검증된 책을 ‘고전’이라고 하겠습니다. 최근 우리교회에서 성경공부 교재로 선택한 <목적이 이끄는 삶>은 근래에 저술되었지만 ‘고전’으로 포함시켜도 좋겠습니다. 이 책은 40일 만에 완독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습니다. In addition, I challenge you to read one good book a month. Here, 'good book' includes Christian classic writings including Augustine and Thomas a Campes. Written recently but recommended widely, some newly published books may be categorized as 'classic.' <The Purpose driven Life> is a good example. This book was designed to be finished reading within 40 days. 

2. 훌륭한 본보기들 본받기 Imitating good models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7에서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했습니다. 또, 고전 4장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알민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4:15-16). Paul said, "Join with others in following my example" (Philippians 3:17a). He continued, "Even though you have ten thousand guardians in Christ, you do not have many fathers, for in Christ Jesus I became your father through the gospel. Therefore I urge you to imitate me." (1 Corinthians 4:15-16)

3. 덕목 기르기 Educating Virtues
덕은 본래 가지고 태어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덕은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을 요구합니다. 훈련으로 길러집니다. 얼마나 훈련이 필요하면, “박사 다음에 덕사”라고 할까요? 덕의 가장 좋은 본보기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갈라디아 5:22-23). Virtues are to be educated. They require concious effort. They grow with trainings and drills. Some Koreans named an excellent person "Virtue Scholar" who is above a Ph.D. scholar. A good example of the Christian virtue is the nine fruits of the Holy Spiri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gentleness, and self-control" (Galatians 5:22-23).

4. 불편을 활용하기 Using indisposition
우리는 편안한 것에 쉽게 빠집니다. 그러다 중독됩니다. 그러나 영적 성장은 ‘불편함’ 가운에 이뤄집니다. ‘십자가의 요한’이 쓴 이 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People tend to be addicted to comfortable ones. But spiritual growth comes with discomfort. Listen to John of the Cross:

네 마음을 항상 이런 것에 쏠리게 하라.
가장 쉬운 것이 아니라 가장 어려운 것에,
가장 즐거운 것이 아니라 가장 참혹한 것에,
가장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장 유쾌하지 못한 것에,
Put your mind to the following things:
not to easy but hard ones;
not to pleasant but painful ones;
not to satisfactory but unhappy ones;

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수고를 의미하는 것에,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위로 없는 일에,
가장 큰 것 대신 가장 작은 것에,
가장 높고 귀중한 것 대신 가장 낮고 비천한 것에,
not to reast but works;
not to comfort but discomfort;
not to big but to smalll things;
not to precious but to humble things; 

무엇을 원함이 아니라 아무것도 원하지 않음에,
순간적인 좋음이 아니라 순간적인 나쁨에...
이런 연습을 그치지 않으면, 네 편안함을 추구하는 네 의지를 바꿀 수 있다. 신중하게 연습하면, 더 큰 기쁨과 위로를 얻을 수 있다.
not to what you want but to what you do not want;
not to temporary goodness but temporary evil; ....
If you do these continuously, you could change your willingness looking for convinence. With serious practice, you will get bigger joy and pure comfort.

5. 진리를 몸에 적용하기 Applying the truth to the Body
영적인 훈련은 반드시 “몸”에 적용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몸을 무시하면, 몸 때문에 영적인 성장이 방해를 받습니다. 건강에 주의하지 않으면 건강 때문에 영적 성장을 멈출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하셨습니다. Spiritual training is to be applied to the body. Ignoring your body, your spiritual growth would be bothered because of body. If not paid enough to physical health, your spiritual growth is to be stopped. Jesus said, "Your mind wants, but your body is weak." (Matthew 26:41).

사도 바울도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로마서 7:22-23)했습니다. Paul confessed, "For in my inner being I delight in God's law; but I see another law at work in the members of my body, waging war against the law of my mind and making me a prisoner of the law os sin at work within my members." (Romans 7:22-23).

물론, 몸 자체에 초점을 두면 몸의 노예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인생을 가꾸어가는 것보다 ‘멋진 몸매’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됩니다. Of course, if you pay too much attention to body, you will be slave to your body. Rather than making good figure in the eyes of God, you use time and energy to make your beautiful body condition.

6. 아침 일찍 일어나기 Getting up early in the morning
사람마다 아침형, 초저녁형, 새벽형 그렇게 나눌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새벽형을 추천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새벽 일찍 일어나셔서 기도하셨습니다. 한국교회 성장의 비결도 새벽기도입니다. Men are different: some are morning type; some afternoon; and some are midnight. But the Bible recommends early morning. Jesus got up early and prayed.

아침 일찍 일어나면 “스스로가 뭔가 의미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생각이 참 중요합니다. 낮에 잠간 눈을 붙이더라도 아침 일찍 일어납시다. Waking up early in the morning, we feel we be someone meaningful. This kind of thought is very important. I recommend you to wake up early even if taking some midday nap.

7. 되돌아보며 살기 Reviewing the Past
훈련은 “발전의 정도를 측정”하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즉, 뒤돌아보며 사는 것입니다.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과거에서부터 얼마나 발전했나, ‘측정’해 보는 것입니다. As you train yourself, you need to review the past. It is to estimate how much you developed from the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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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은 힘듭니다. 그러나, 일단 시작이 반입니다. 시작하고, 날마다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가 돌아보는 것은 참 좋은 점검입니다. Training is hard. But starting is already a half. Start first, and check each day. It is a good check to examine whether we have hope or not.

혼자 훈련하면 중도에 그치기 쉽습니다. 팀을 이루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 공동체와 함께 가면 좋겠습니다. 청년부, 장년부, 성경공부팀, 이들이 함께 마음을 나누고 달려가면 좋겠습니다. 이 훈련의 과정에 날마다 귀한 열매를 거두시기를 축원합니다. Training yourself, you may stop it sooner or later. I recommend you to make a team. The best team is church community. Young adult, Adult, Bible study team, etc. May God richly bless each of you helping one another at such a spiritual team.

나는 지난 주 중에 만난 John이 좋은 교회 공동체를 만날 때까지 도와줄 생각입니다. 그는 식구 같은 교회에서 서로 도와가면서 ‘영적 훈련’을 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에서도 귀한 열매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족에 대한 미움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신실한 배우자를 만나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전파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I would like to help John whom I met last week until he finds good church community. I will pray for him finding family-like church and training himself spiritually. He could discard hatred against his family and meet a good woman to make a faithful home. I hope he deliver the gosple of Jesus daily.

오늘 설교 들은 여러분들도 주님께서 기억하게 해 주실 때마다, 산타 크루즈를 지나가실 때마다, 185cm의 고독한, 그러나 행복하고 건장한 사나이 John을 기억하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I ask all of you to pray for John, whenever God reminds you of him, when you drop by Santa Cruz, remembering the 185cm tall, lonely, but happy young man. 

기도 Prayer
귀하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은 부족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말씀에 약속하신 모든 귀한 것들을 저희들의 삶을 통해 이루어 주시기를 감히 기도드립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은즉, 소망을 품고 간구드립니다. 날마다 한 걸음씩 영적인 훈련을 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 앞에 설 때, 부족하지만 주님의 기뻐하심을 입게 하시옵소서.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recisous Father God. We are sinners. But we pray that you realize your promises through our daily lives. We ask your help. We want to grow physically and mentally as well as spiritually. Let us have your joy when we stand in front of you. In Jesus' name, Amen.

봉헌기도 Offering Prayer
가난한 가운데 모든 것을 바친 어떤 과부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그 과부의 헌금을 사랑하셨듯, 오늘 저희들의 헌금을 기뻐 받아주시옵소서. 미국 생활이 지치고 힘듭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 실로 높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거둔 열매를 주님께 바치오니, 주여 열납하여 주시옵소서. 구원의 소망을 품고 살게 하옵소서. 과거나 현재의 실패가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주여 축복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Benediction
May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our Father, and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be with you all. Amen.
(조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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